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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 강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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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 강을 바라보며

[최창남의 '흐르는 강물처럼'] <13> 그랜드캐년 국립공원에서 (하)

아침이었다. 커튼을 걷자 따가운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늦잠을 잤다. 오랜 여정으로 쌓인 피로와 지난 밤 깊도록 잠들지 않은 탓이었다. 과일과 커피로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주먹밥을 만들어 숙소를 나섰다. 우리는 셔틀 버스를 타고 Desert View Drive로 내려갔다. South Kaibab Trail이 거기 있었다. 정오에 가까워지며 햇살은 점점 뜨거웠다. South Kaibab Trail은 협곡의 가장 밑바닥까지 닿아 있었고 거기서 다시 North Rim으로 연결되었다. 약 6,000피트(2,000미터)를 내려가야 했다. 태백산 보다 깊은 협곡의 바닥까지 길은 산허리를 따라 굽이치며 이어져 있다.

이 위대한 협곡은 자연이 만들어 놓은 두 개의 비밀을 품고 있었다. 영겁에 가까운 20억년이라는 위대한 시간과 협곡의 깊이이다. 시간과 콜로라도 강이 만들어 놓은 2,000미터 깊이의 공간은 이 협곡이 품고 있는 또 다른 비밀이다. 이 공간에는 건조한 아열대 기후와 한대 기후가 공존하고 있다. 생태계 또한 다양하다. 협곡의 남쪽에는 소나무 향나무 등의 삼림 지대가 있는데 협곡 바닥은 모자브 사막의 생태계를 지니고 있다. 또한 협곡의 북쪽에는 전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또 하나의 경이로움이다.

우리를 내려놓은 버스는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우리는 트레일이 시작되는 지점(Trail Head)으로 이동했다. 뜨거운 기온 탓으로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안내판이 있었다. 훈련된 하이커(Hiker)라도 이틀을 잡아야 트레일을 다녀 올 수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 트레일을 걷다가 사망한 한 여대생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시간과 장비와 식료품 등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은 채 무모하게 도전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 Kaibob Trail에서 바라본 Grand Canyon의 단애ⓒ최창남

말없이 바라보았다. 협곡의 높고 낮은 단애들이 끊어질 듯 이어지며 굽이굽이 물결치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띠를 두르고 있는 단층들이 바람을 따라 춤을 추듯 물러났다 다가서며 흔들리고 있었다. 아스라했다. 그 아스라함 뒤로 끝이 보이지 않는 협곡의 대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콜로라도 강의 한 자락이 가물가물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열려 있는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길은 수직으로 놓여 있는 듯 가팔랐다. 끊어진 듯 보이던 길은 협곡과 허공 사이사이로 이어져 있었다. 길이 열릴 때마다 우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위대한 협곡에 심취했다. 가장 나이 어린 돌의 나이가 500만 살인 협곡은 20억 살이나 된 돌 또한 품고 있었다. 영겁과도 같은 세월이 쌓아올린 길을 지나며 나는 고작해야 칠팔십년을 사는 사람의 삶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그 짧은 삶조차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들의 삶이 안쓰러웠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이 그 안쓰러움을 숨겨 주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고개를 돌리자 내려온 길의 끝이 멀리 있었다. 하늘에 닿아 있었다. 전나무 한 그루 하늘가에 홀로 서 있었다. 외로워 보였다.
▲ '우! 아! 포인트'(Ooo Aah Point)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경치에 절로 감탄사를 연발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최창남

우리는 '우! 아! 포인트'(Ooo Aah Point)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 지점을 지나는 이들마다 너무나 아름다운 경치에 '우!' '아!'하고 감탄을 연발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눈앞에 South Rim의 절경들이 펼쳐 있었다. 협곡을 흐르는 콜로라도 강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그뿐인가. 멀리 있던 8,000피트 높이의 North Rim이 곁에 있는 듯 정겨웠다. 자연의 위대함을 바라보며 나는 말이 없었다.

그런 내가 조금 안쓰러웠던가. 바위 곁으로 노란 들국화 한 무리 피어 있어 나를 보며 배시시 웃는다. 메마른 땅에 피어난 노란 들국화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햇살 아래서 들국화는 더욱 아름다웠다. 들국화 아름답게 핀 길 아래로 이어져있는 길을 바라보았다.

어느 결엔가 다람쥐가 나타나 먹이를 찾고 있었다. 그랜드 캐년의 독특한 환경이 만들어낸 회백색 알버트 다람쥐였다. 내려온 길로 따라 올라갔다. 숨이 차올라 바위틈에 기대어 쉴 수밖에 없을 때 즈음 우리는 떠났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 바위틈에 핀 들꽃ⓒ최창남

Aiki Point로 이동한 우리는 Picnic Area부터 찾았다. 허기를 달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나무 그늘을 찾아 앉았다. 제법 큰 나무 한 그루 앞에 있었다. 비틀리고 비틀려 나무의 껍질들이 실 가닥처럼 풀려있는 나무였다. 아니 그것은 나무가 아니라 실타래를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처럼 보였다. 손을 대면 한 올 한 올 풀려 나올 것만 같았다. 손을 대자 나무껍질들이 한 올 씩 벗겨지며 비늘처럼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나뭇잎은 무성했다. 무성하게 달린 나뭇잎들이 간간이 불어오는 잔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아직 나는 살아 있어요. 살아있는 나무에요.'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 알버트 다람쥐ⓒ최창남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런 모습이 되었을까.

주먹밥을 맛나게 베어 물었다. 꿀맛이었다. 마침 불어온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친 후 Grand View Point를 지나 Tusayan Museum으로 갔다. 그곳에는 그랜드 캐년의 원 주인들이었던 하바수파이 부족과 후알라피 인디언 부족의 주거 환경과 삶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었다. 약 4,000년 전부터 이 땅에서 살아왔던 인디언들은 이 땅에 들어온지 고작해야 467년 밖에 안 된 백인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 백인들이 이 땅에 처음 들어온 것은 1540년이었지만 이 땅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869년 5월 John Wesley Powell 소령 일행이 콜로라도 강을 따라 본격적인 탐사를 하였을 때부터였다.
▲ Aiki Point Picnic Area에서 만난 나무ⓒ최창남

그러니 백인들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실제로는 백 몇 십 년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백 몇 십 년의 세월이 이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의 삶을 보호구역과 박물관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지금도 그랜드 캐년의 하바수파이 인디언 보호구역에는 약 300여 명의 하바수파이 인디언들이 소규모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푸른 물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하바수파이 인디언들은 이제는 푸른 물 곁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호구역 안에서 제한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 Tusayan Museumⓒ최창남

나는 하바수파이 인디언들의 삶을 바라보며 낮에 보았던 비틀린 나무가 떠올랐다. 인디언들의 삶도 그 나무처럼 빼앗긴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살갗 터지며 찢어진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틀리고 비틀려 터져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이미 오래 전 빼앗긴 그 날 그들의 삶은 이미 찢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나무는 정말 인디언들의 삶을 닮아 있었다. 갈라진 껍질도 갈라진 그들의 손등과 깊게 주름 잡힌 얼굴을 닮아 있었다. 나는 아주 오래도록 그 나무를 생각할 때 마다 인디언들의 잠들지 않은 영혼이 그 나무에게 옮겨 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하였다.

숙소로 돌아와 잠시 지친 몸을 쉰 우리는 다시 서둘렀다. 어둠이 깃들기 전 Bright Angel Trail을 걸을 예정이었다. Bright Angel Trail은 장사진을 보는 듯 협곡의 굽이마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길게 이어져 있었다. 길을 따라 내려가자 깊은 협곡에 깃들던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이 벌써 나와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길은 어둠 속으로 보이지 않는 끝을 숨기고 있었다. 멀리 콜로라도 강이 보였다. 강 곁으로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Indian Garden 을 지나 있는 Plateau Point였다.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Plateau Point는 숨 막힐 듯 아름다웠다.
▲ 나뭇가지에 앉은 갈까마귀(Raven)ⓒ최창남

가고 싶은 마음을 부여잡고 길을 돌렸다. 체력도 어둠도 시간도 모두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 위대한 협곡을 비취며 붉게 타오르던 낙조는 어느 덧 협곡 너머로 사라졌다. 어둠이 짙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재게 발걸음을 놀렸다. 어둠을 따라온 것인지 새들이 나뭇가지로 날아들었다. 깊은 협곡에 드리운 어둠보다 더 검은 몸집 커다란 갈까마귀(Raven)였다. 갈까마귀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어둠 깃드는 협곡을 내려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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