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위대한 시간과의 조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위대한 시간과의 조우

[최창남의 '흐르는 강물처럼'] <12> 그랜드캐년 국립공원에서 (상)

한낮인데도 하늘이 검어졌다. 비가 오려나보다. 라스베가스(Las Vegas)를 떠나 자동차에서 주먹밥으로 점심을 해결한 우리는 실 끝에 매달린 요요처럼 길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길의 어딘가에 Grand Canyon National Park이 있었다. 낮아진 하늘 탓인지 바람이 거칠어졌다. 비가 내리지 않는데도 온도는 급격히 떨어졌다. 화씨 117도에 이르던 기온이 화씨 97도까지 떨어졌다.

어두워진 하늘에 섬광이 인다. 번개가 하늘을 수직으로 가르며 연이어 떨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굵은 빗방울들이 차창을 무섭게 때렸다. 빗방울과 트럭이 일으킨 물보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화씨 73도까지 떨어졌다.

차창으로 보이는 비 내리는 사막의 모습은 어둠 탓인지 아스라했다. 사막의 한 가운데를 지나면서도 사막은 멀리 있는 듯했다. 잠시 그쳤던 비 사이로 차창을 열자 물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가슴으로 젖어 들었다. 다시 비가 내렸다. 차창의 빗방울들은 어서 오라고 손짓하여 부르기도 하고 함께 가자며 소리 내어 부르기도 하면서 달려가고 있었다. 마치 지나온 길이 가야할 길을 불러 세우고 가야할 길이 지나온 길을 재촉하는 듯하였다.
▲ Grand Canyon Mapⓒ최창남

아무래도 비가 제법 오려나보다.
거짓말처럼 사막의 한 가운데로 길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이 길도 끝이 있겠지.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잠시 올랐던 온도는 다시 화씨 64도까지 급격히 떨어졌다. 한기가 느껴졌다. 옷깃을 여몄다. 옷깃을 여미는 사이 우리는 애리조나 주(Arizona State)로 들어서고 있었다. 애리조나 주로 들어오며 다시 시간 선을 넘었다. 서부로 내려오며 벌어들였던 시간을 돌려주어야만 했다. 손목시계를 물끄러미 들여 보았다. 얼굴이 비쳤다.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얼굴이 거기 있었다. 그 얼굴 곁에 삶도 따라와 있었다. 시간을 돌려주며 내 삶을 바라보았다.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어찌 시간뿐이랴. 삶 또한 그러하다. 아무리 오랜 세월 길 떠나 있었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떠나온 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처럼 젊은 날 어리석음으로 잃어버렸던 제 삶의 날들 역시 삶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한 시간을 돌려주었다. 이제 두 시간만 더 돌려주면 나도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Rim Trail에서 바라본 Grand Canyon South Rimⓒ최창남

하늘은 밝아지고 있었다. Kaibab National Forest라는 입간판이 보였다. 조금씩 밝아지던 하늘이 아주 맑고 밝아졌을 때 우리는 Grand Canyon National Park으로 들어섰다. 오후 6시 14분이었다. 조금 더 달리자 그랜드 캐년의 웅장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협곡을 따라 난 트레일(Trail)을 잠시 걸었다. 아직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지도 않은 그랜드 캐년의 모습에 나는 이미 압도되어 있었다.

지구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그랜드 캐년은 단애와 단애들이 저마다 제 품에 맞는 바위를 차곡차곡 품어 안은 채 거기 그렇게 있었다. 이름 그대로 위대한 협곡이었다.
▲ Grand Canyon을 지나는 Colorado Riverⓒ최창남

그랜드 캐년은 45억년 지구의 나이 중 20억년의 역사를 품고 있다. 20억년이라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일어났던 대륙의 진화과정을 바위의 각 층마다 새겨 넣은 채 장구한 세월의 강을 건너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대륙판이 언제 어떻게 이동하였으며 파괴 되었는지 큰 바다가 어떻게 전진하고 후퇴하였는지 기록되어 있다. 전체 산맥의 융기와 침식 과정도 기록되어 있고 광활한 모래언덕의 형성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가깝고 먼 곳의 화산들이 제각기 언제 어떻게 폭발하였는지 빠짐없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자연이 품고 있던 이 위대한 시간의 비밀들은 콜로라도 강(Colorado River)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애리조나(Arizona), 캘리포니아(California), 뉴멕시코(New Mexico), 네바다(Nevada), 유타(Utah), 콜로라도(Colorado), 와이오밍(Wyoming) 등 일곱 개의 주를 지나고 있는 2,333Km의 긴 콜로라도 강은 5백 5십만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의 침식 작용을 통해 이 위대한 협곡을 이곳에 만들어 놓았다. 눈앞에 드러난 그랜드 캐년의 모습은 인간의 손길이라고는 조금도 미치지 않은 자연의 경이 그 자체였다. 자연의 위대함이 시간의 강을 건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위대한 협곡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20억년이라는 위대한 시간을 품고 있었다. 그랜드 캐년과의 만남은 바로 이 위대한 시간과의 만남이었다.
▲ Kaibab Trail에서..ⓒ최창남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한 시간을 품고 있는 위대한 이 협곡도 한 때 사라질 위험에 처했었다. 1960년 연방 정부가 캐년의 절반 이상이 잠기게 될 2개의 댐을 건설하려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 계획은 무산되었고 그랜드 캐년은 6,000피트의 깊이와 평균 10마일(Mile)에 이르는 넓은 폭과 277마일(Mile)이라는 길이를 그대로 지닐 수 있었다.

멀리 콜로라도 강이 보였다. 이 위대한 강은 협곡 사이를 유장하게 흐르며 South Rim과 North Rim를 가르고 있었다. 그 강 곁에 서고 싶었다. 뗏목을 타고 강으로 흘러들고 싶었다. 탐험가 존 웨슬리 포웰이 '위대한 미지의 것(Great Unknown)'이라고 이야기한 그 곳으로 강줄기를 따라 흘러들고 싶었다. 그리움 때문인가. 갈증이 일었다.
협곡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사이 저녁 어스름이 찾아 들었다. 어스름 내린 협곡은 깊은 잠에 젖은 아기처럼 고요했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이 위대한 협곡을 감싸고 있는 어둠 곁으로 우리는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나아갔다.

우리는 Canyon Village의 Yavapai Lodge에 여장을 풀었다. 하루 종일 달려오며 사막에서 묻혀온 노곤함이 몸에 남아 있었지만 기분은 매우 가볍고 상쾌했다. 위대한 시간과의 만남이 불러일으킨 흥분 때문이었다. 나는 다소 흥분되어 있었다. 저녁을 준비하는 내내 흥겨웠다. 햇반과 통조림 꽁치를 넣은 김치찌개와 김치였다. 오랜만에 소주도 곁들였다.
▲ Bright Angel Trail로 들어가는 길ⓒ최창남

창밖은 고요했다. 나무들은 이 깊은 밤을 지키는 파수꾼들처럼 말없이 서 있었고 별은 빛났다. 그 별 아래 20억년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을 품어 안은 그랜드 캐년과 내가 있었다. 나는 깊어가는 밤과 함께 시간의 흐름들을 느끼고 있었다. 예기치 못하였던 이 위대한 시간과의 조우는 나를 내 삶의 시간들로 이끌었다. 나는 지나온 내 삶의 날들로 돌아갔다.

그 곳에는 아직도 내 삶의 흔적들이 남아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싱싱했다. 펄떡였다. 슬픔은 슬픔대로 아픔은 아픔대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죄 없이 끌려간 김 씨와 남겨진 그의 어린 아들 생각에 기차 끊어진 철길 곁에 앉아 별 지도록 울던 날이 거기 남아 있었다. 마음 깊이 품고 있던 잃을 수 없는 사랑을 잃고 소리 없이 목 놓아 울던 밤들이 거기 아직도 남아 있었다. 제 믿음과 신념에 삶 전부를 걸고 살아가던 동료들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빼앗긴 후 피눈물 흘리며 지샌 밤들이 거기 아직도 그대로 남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 동료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참담했던 순간들이 그대로 남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어느 날이던가. 깊은 상처의 아픔으로 잠 못 이루던 영혼을 바라보며 하릴 없이 눈물짓던 순간들도 거기 그대로 남아 있어 깊은 눈망울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순간 그 밤 그 날들이 흐르고 흘러 삶의 또 다른 날들로 나를 데려왔건만 나는 아직도 그 날들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눈물이 어리는 듯 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깊은 협곡을 지나온 바람이 열린 창으로 들어왔다. 시원한 바람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새의 날개 짓처럼 퍼덕였다. 밤은 고요하고 하늘에는 오래 전 지나 온 그 날들처럼 별이 빛나고 있었다. 잠든 영혼을 깨우는 밤이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