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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게 서있는 죠수아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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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게 서있는 죠수아 나무

[최창남의 '흐르는 강물처럼'] <11> 로스앤젤레스를 지나며

열이틀 째였다. 동부의 끝 워싱톤(Washington)을 출발하여 서남부의 끝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 들어서는 날이었다. 약 4,000Mile, 6,400Km를 달려왔다. 서울에서 부산을 7번 반을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였다. 이제 온 길을 따라 돌아가는 길만 남아 있었다. 상상하기 힘든 먼 길이었다. 많은 것을 만나며 보고 온 길이었다.

여행이란 지도를 따라 난 길을 (따라) 가면서도 마음 길을 따라 가는 것이다. 여행이란 길을 따라 떠났다가 마음을 따라 돌아오는 것이다. 아니 마음을 따라 떠났다가 마음을 따라 돌아오는 것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여행은 우리가 잊었거나 잃어버렸던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것이다. 많은 것을 만나고 보고 듣고 느끼는 가운데 자신을 새롭게 만나는 것이 여행이다.

여행은 일상으로부터의 떠남이다. 늘 반복되는 일상은 때로 우리의 삶을 매우 위태롭게 만든다. 변화 없는 일상의 반복은 감각을 둔화시키고 마음을 무기력하게 만듦으로 자신이 만나고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고마움과 소중함을 잊게 한다. 제 삶에 들어와 있는 진실 된 가치들을 보지 못하고 참된 말과 소리들을 듣지 못하게 한다. 제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고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제 인생의 사랑을 잃어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자신을 잊게 만들고 더 나아가 잃어버리게 한다.
▲ LA로 가는 길ⓒ최창남

일상으로부터 떠난다는 것은 이러한 위험성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여행은 갇힌 삶의 유일한 출구이며 주어진 축복이다. 길을 따라 나아가며 마음을 늘 새롭게 하는 은총이다. 삶이란 나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존재들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으로 마음은 절로 깊어지고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제 말을 한다.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고 있는 나무도 뿌리 뽑히고 잘리어 팔려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목재들도 모두 제 말을 한다. 나무는 나무대로 제가 살아온 삶과 그 삶의 말을 하고 목재는 목재대로 자신이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지 말한다. 그 뿐인가. 바람에 쓸리며 이 거리 저 거리 구르는 낙엽들도 발에 차이는 돌멩이들도 모두 살아 있어 저마다 자신의 말을 한다. 낙엽들에게서는 희망으로 설레며 새싹 움트던 봄과 울울창창한 숲을 이루었던 무성하고 화려했던 여름과 마음 깊이 품고 있던 아쉬움과 그리움을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으로 드러내던 가을의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돌멩이들에게서는 많이 말하려하지 말고 많이 들으라는 오랜 세월을 통해 체득한 침묵에 대한 가르침이 전해져온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듣는 것이 여행이다. 그러나 여행의 진정한 묘미는 숲 속과 숲길과 사막과 도시 그리고 길을 따라 달리던 그 순간순간 들었던 모든 이야기들을 그대로 흘려보내는데 있다. 들려온 수많은 이야기들을 가슴에 담아두지 않고 모두 제 갈 길로 흘러가도록 놓아두는데 있다. 그들도 우리 자신들도 모두 자유로울 수 있도록 말이다. 그 자유로움이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새로워진 우리 자신을 만날 수 있게 말이다.
▲ LA 한인타운에 있는 빨래방에서 밀린 빨래를 하다.ⓒ최창남

그렇게 열이틀 동안 달려오며 보고 들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모두 제 갈 길로 흘려보낸 후에야 우리는 이 여행의 반환점인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로 들어섰다. 그러나 아직은 지나 온 길 만큼의 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떠나보낸 시간들만큼의 시간들을 다시 맞이해야 했고 흘려보낸 수많은 사연들만큼의 또 다른 이야기들이 남아 있었다. Grand Canyon, Zion, Arches, Rocky Mountain, Shemandoah National Park 등과 여러 도시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설렘으로 달려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길은 아득하기만 하였다.

한국말로 된 간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한인 타운이었다. 반갑고 낯설었다. 머나먼 미국 땅에서 보는 한국말에 반가웠고 낯설었다. 당구장 간판도 사우나 간판도 보였다. 자동차 정비소도 보이고 음식점도 보였다. 나는 몹시 지쳐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옆구리가 심하게 결리며 아팠다. 작은 기침에도 허리가 울렸다. 배도 몹시 고팠다.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서의 우리 일정은 자동차 정비와 식료품 구입 그리고 세탁과 영양 보충을 위해 열심히 먹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충분한 휴식이 우리 일정의 전부였다. 우리는 자동차를 맡긴 후 밥을 먹었다. 조선 갈비라는 이름의 식당이었다. 후회 없이 먹은 후 숙소인 Wilshire Grand Hotel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눈을 뜨자 저녁이었다. 창 밖에는 어둠이 깃들고 있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저녁을 먹기 위해 나갔다. 한국인들이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 오면 꼭 들린다는 베버리순두부 집으로 갔다. 실내에는 한국인들이 삼삼오오 안에 있었다. 반가운 마음이었다. 워싱턴(Washington)에도 뉴욕(New York)에도 버지니아(Virginia)에도 꽤 많은 수의 한국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었다.
▲ 화씨 117도(섭씨 약 48도)로 뜨거웠다.ⓒ최창남

이렇게 서로들 보듬으며 살아가면 되는 것을...
아무리 그럴 듯하고 멋지게 살아가도 그저 한 사람의 생인 것을...

알탕을 좋아하는 나는 알 순두부를 시켜 먹었다. 등 뒤에서 유학생으로 보이는 한국학생들의 말이 들려왔다.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모르면서도 괜히 살가웠다. 식당을 나서자 그 사이 어둠이 깊어졌다. 숙소로 향했다. 차창으로 한인 타운의 불빛들이 비쳐왔다. 그 불빛들 또한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서러움과 그리움과 자부심과 어리석음과 깊은 회한과 눈물 그리고 기쁨들이 거기 있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이 내 가슴을 지나고 있을 때 밤은 깊었고 아침이 왔다.

우리는 서둘러 세탁과 식료품 구입을 마친 후 다음 목적지인 라스베가스(Las Vegas)로 향했다. 라스베가스(Las Vegas)는 Grand Canyon National Park으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이기도 했다.
▲ 라스베가스에서..ⓒ최창남

출발했다. 드디어 기수를 동쪽으로 돌렸다.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기 위한 출발이었다.
"돌아간다~!"

나는 차창을 열고 큰 소리로 외쳤다. 감격적이었다.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기쁜 일이다. 삶에서도 그러하고 죽음에서도 그러하다. 삶 또한 온 곳으로 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죽음 역시 삶의 하나의 과정이며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인류의 자산이 된 많은 가르침들은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제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가는 것이 어찌 슬픈 일이겠는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약간의 망설임이 있을 뿐이다. 마치 새로운 길로 떠나는 여행객들의 마음에 설렘과 두려움이 함께 있듯이 말이다.

한 사람의 죽음이 슬픈 것은 남은 자들의 슬픔 때문이다. 위로는 남은 자들이 받아야 할 그들의 몫이다. 나는 어울리지 않게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며 마치 큰 숙제라도 풀은 듯 즐거워졌다. 충분한 휴식이 가져다 준 가벼워진 몸을 따라 마음도 가벼워졌다. 그러나 날씨는 뜨거웠다. 온도계는 화씨 118도(섭씨49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Gas Station)로 들어섰다. 자동차의 문을 열자 뜨거운 열기가 밀려 들어왔다. 숨이 막혔다. 말로만 듣던 사막의 뜨거운 열기가 온 몸을 타고 올라왔다. 몸이 타는 듯하다. 이런 사막에 도시를 세우고 살아가는 이들의 용기와 지혜에 절로 경외의 마음이 일었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만난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 외롭게 서 있는 죠수아 나무(Joshua Tree)ⓒ최창남

사막의 한 가운데로 난 길은 끊임없이 다른 길을 불러들이며 사막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하늘은 맑고 지나는 구름 한 점 없는데 하늘 아래 메마른 낮은 산들은 황량하기만 했다. 빈 들 여기저기 듬성듬성 자란 잡초들은 불어오는 열풍에 흔들리고 있었다.

간간이 죠수아 나무(Joshua Tree) 외롭게 서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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