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하고 슬펐던 생태 다큐
사전에 신문·잡지 등의 비평을 보고 예상하기 했지만, 영화는 시작부터 관객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보는 동안 내내 처절하고 참담했으며, 음울하고 슬펐다. 급기야 러닝타임 97분이 지나고 엔딩 크레딧이 나올 때 '울컥' 하는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도대체 다큐 영화 한편이 왜 그토록 인간의 감성을 자극한 것일까? 아마도 인간이라는 종(種)이 먹이사슬의 정점(頂点)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생물 종이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태 공간을 마구 재단(裁斷)하고 유린한 결과 파생된 자연질서의 무자비한 파괴 상황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기 때문 아니었을까?
<어느 날 그 길에서>는 한마디로 압축하면 과속으로 달리는 차량을 피하지 못해 도로에서 죽는 갖가지 동물에 관한 이야기, 즉 로드 킬(Road kill) 스토리다. 영문학도 출신의 젊은 여성감독 황윤은 2004년부터 3년 동안 최태영, 최천권, 최동기 등 로드 킬 연구팀의 뒤를 좇으며 지리산을 둘러싼 88고속도로, 섬진강변 도로, 산업도로(19번 국도)에서 벌어지는 로드 킬을 조사하고 화면에 담았다.
목숨 건 연구와 촬영
"이틀 동안 300㎞를 달리면서 무려 1000여건의 버려진 야생동물을 찾아냈다"는 그는 그것조차 빙산의 일각이라는 사실에 충격 받았고, 그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고속 질주하는 차량이 일으키는 바람에 가냘픈 몸이 휘청거리는 것도 마다 않고 로드 킬의 현장을 앵글에 담았다.
그것도 로드 킬의 피해 종인 동물들의 눈높이에 맞춰 아주 낮은 각도에서 말이다. 그 각도는 산토끼와 고라니, 소쩍새, 부엉이, 족제비, 뱀, 삵 등 소중한 생명체가 '네 바퀴 달린 동물'(차량)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바로 그 순간의 앵글이기도 했다.
바꿔 말하면 황윤 역시 목숨을 내놓았다는 얘기다. 황윤 뿐 아니었다. 최태영 등 로드 킬 연구팀원 모두가 그랬다. 이들은 생명보험까지 들었다고 한다.
"도로로 사방이 막힌 생태계에 갇혀버린 동물 입장으로 보면 결국 자신들의 집과 땅에 인간이 허락도 없이, 용서도 구하지 않고 길을 만들어 하루아침에 쫓아내는 거나 마찬가지다. 야생동물은 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지구라는 마을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이자 사회적 약자다."
야생동물 피해→인간 피해
황윤의 절규를 생태 다큐 감독의 상투적인 멘트라고 흘려버리자. 하지만 "동물은 인간이 보호하고 관리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대지라는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 자매다. 그런데 인간은 숲을 태워도 우리 집만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대목에 이르면 흘려버리기 찜찜한 구석이 있다.
기실 우리나라 야생동물들에겐 밀렵보다 로드 킬이 더 광범위하고 치명적인 위협이라고 한다. 인간은 더 빨리, 더 편하게 목적지로 가면 그뿐이지만 동물들은 노골적인 위험과 단절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영화의 압권인 삵 '팔팔이'의 사연에서 그 가설은 현실로 확연히 입증된다. 교통사고를 당해 치료를 받고 야생으로 돌아갔던 팔팔이는 결국 싸늘한 주검으로 연구팀과 황 감독에게 발견된다.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치명적 위협이 결국 인간에게 도래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우리나라 로드 킬 정말 심각
로드 킬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미국이나 호주 등 국토가 넓은 나라에서도 흔히 목도할 수 있는 것이 로드 킬이다. 문제는 그들 나라에선 로드 킬이 별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로드 킬로 사라지는 개체를 능가하는 자연 생태 복원력에 의해 먹이사슬의 생태가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아울러 전체 국토에서 도로가 차지하는 비율이 비교적 성겨 있어 총체적인 산술에서 볼 때도 그리 문제가 될 게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남한 면적은 9만9천㎢다. 그런데 도로 길이는 벌써 10만㎞에 이른다. 1㎢ 당 도로 길이가 1㎞인 셈이다. 세계 최고의 도로 밀도다.
그런데도 한국도로공사는 2020년까지 10만㎞를 더 건설하겠단다. 문제는 도로 중엔 차량 소통이 별로 없는 노선도 많은데, 바로 인근에 또 도로를 내는 현상이 빚어진다는 점이다. 실제로 한국도로공사가 관리하는 고속도로. 국토해양부가 관리하는 산업도로 및 일반국도,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는 지방도로가 제각각 건설되고 있다. 중복 건설, 교통 및 환경영향평가가 통과의례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말이다. 아무튼 관계 당국은 원활한 교통소통을 위해서 도로 증설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명명돼 느림의 미학으로 유명한 '섬진강변 도로'조차 소통원활을 위해 조만간 증설된다고 한다. 도로 증설=교통원활, 과연 그럴까?
브라에스 역설
브라에스의 역설(Braess' paradox)이란 게 있다. 독일 보쿰 루르대 수학과의 디트리히 브라에스(Dietrich Braess) 교수가 주창한 가설이다. "도로를 넓히면 그만큼 수요가 늘어 정체는 점점 더 심해진다"는 것이다.
자동차 수가 늘어남에 따라 도로가 막히게 되면 그로 인한 교통체증을 해소하고자 또다시 새로운 도로를 건설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교통 소통이 개선되기는커녕, 더 악화된다는 것이다. 도로 확충에 따라 통과 차량이 더 느는, 이른바 양성되먹임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것이다. 이를 '풍요의 악순환'이라고도 부른단다. 반대로 도로를 축소하거나 폐쇄하면 묘하게도 교통 소통이 빨라진다고 한다.
실제로 서울에서 속초까지 가는 도정을 예로 들어보자. 예전엔 경부(또는 중부)고속도로를 거쳐 영동고속도로를 지나 강릉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동해안을 북상해 도달하는 코스와, 양평을 지나 홍천~인제~원통을 지나 한계령이나 미시령을 지나 속초에 도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홍천~서석~구룡령~양양~속초, 또는 홍천~인제~원통을 지나 새로 뚫린 미시령 터널을 타는 길이 새로 생겼다. 그렇다고 피서 철이나 단풍 시즌에 속초까지 가는 시간이 단축됐다는 얘긴 듣지 못했다.
서울시내에서도 브라에스역설은 어김없이 적용된다. 1999년 2월 이후 3년간 보수공사를 위해 서울 도심의 남산 2호 터널 구간이 3년 간 폐쇄된 적이 있다. 남산 1, 3호 터널 구간에서 혼잡통행료를 징수하는 상황에서 단행된 2호 터널 폐쇄 기간 동안 서울시 전체가로망의 속도가 시간당 21.95km에서 22.21km로 미세하나마 개선되었던 점 역시 브라에스의 역설을 입증한 사례다.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삼일고가도로가 철거되고, 이어 시내의 수다한 고가도로(원남고가도로, 미아리 삼거리 고가 도로 등)가 철거된 이후, 당해 지역의 교통 소통이 전에 비해 훨씬 원활해진 점 또한 브라에스의 역설을 입증하고 있다.
공직자들 꼭 봐야
<어느 날 그 길에서>를 보고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먼저 최근 첨예한 논란이 되고 있는 '한반도 대운하 프로젝트'가 생각났고, 이어 이 영화가 독립영화의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더 많은 관객에게 보일 수 없다면 관련 공직자들에게만이라도 꼭 보여줘야 할 영화라는 생각 말이다.
대운하 논란과의 연관성이야 차후에 논하기로 하고, 관련 공직자들은 정말 이 영화를 꼭 봐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그래서 며칠 후 황윤에게 전화해서 "이 영화 청와대, 기획재정부, 국토해양부, 환경부, 환경과학원, 건설기술연구원, 한국도로공사 등 관련부처 공직자들에게 보여줘야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다행히 도로공사에선 자발적으로 연락이 와 3월 28일 도공 본사에서 특별 상영회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이날 상영회에는 100여명의 한국 도로공사 직원이 참석했다는 데, 상영회 이후 도공 측이 "야생동물의 죽음을 막기 위해 울타리(일종의 유도펜스)를 마련키로 했다"는 피드 백이 왔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것으로 미흡하다. 기획재정부를 비롯한 관련 정부부처와 환경과학원을 비롯한 관련 출연연구기관, 그리고 정부부처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청와대와 총리실, 나아가 새로 구성될 18대 국회의 환경노동위원회 상임위원들 또한 이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는 필히 관람해야 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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