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마음이다. 그게 없다면 행사에 참석한들, 두툼한 봉투를 내놓은들, 진정한 축하일 수 없다. 이런 '철학'을 담고 있는 글자가 바로 '경사'를 뜻하는 慶(경)자라고 한다. 윗부분은 '사슴'인 鹿(록)의 간략형이어서 축하 예물인 사슴가죽을 뜻하고, 중간의 心(심)은 축하하는 마음 내지 정성이며, 아래 夊(쇠)는 '발'인 止(지)의 변형이어서 그 현장에 직접 가서 참석하는 것을 나타냈다는 설명이다.
전형적인 회의자식 설명이다. 정말 이렇게 복잡하게 머리를 굴려 글자를 만들었을까? 회의자가 근본적으로 미덥지 못한 얘기기도 하지만, <그림 1>의 경우 心은 아예 찾아볼 수 없고 夊는 난데없이 文(문)으로 바뀌었으며, <그림 2>에서는 아랫부분을 夊로 보기 어렵고 心도 후대의 心자를 당겨 쓴 듯한 모습이어서 의문이 든다. 예물(鹿)·참여(夊)·정성(心)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축하 3요소 이론'에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것이다.
文을 사슴가죽 무늬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수습을 위한 땜질 설명이라는 느낌이고, 心에 주목해 심장이 약재로 쓰이는 짐승을 잡으면 좋은 일이라는 설명은 어거지다. <그림 3>은 薦(천)자의 옛 모습인데, 이를 보면 慶은 薦의 아랫부분 廌(치)를 바탕으로 한 글자임을 알 수 있다. 慶의 중국말 발음이 '칭'으로 薦과 별 차이가 없으니, 慶이나 薦은 모두 廌의 발음을 이어받은 형성자로 볼 수 있다. 다만 廌에서 받침 부분이 떨어져나갔을 뿐이다.
慶은 모양의 분명치 않아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心 또는 文은 의미 요소로 봐야겠다. 心이라면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고, 文이라면 문신과 관련된 어떤 의식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티끌'의 뜻인 塵(진)에도 鹿이 들어 있다. 원래는 <그림 4>처럼 鹿이 세 개, 土(토)가 두 개 들어간 복잡한 글자였다고 하는데, 소전체에서 土가 하나 줄어 '麤(추)+土' 형태였다가 지금 모습으로 더욱 간단해졌다.
여기서도 역시 먼저 눈에 띄는 게 발음이다. 塵의 발음은 薦의 중국말 발음 '지앤'과 비슷하다. 역시 윗부분 鹿은 廌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발음, 土가 의미여서 '흙먼지'를 나타낸 형성자다. 사슴 떼가 땅위를 달릴 때 일어나는 흙먼지를 나타냈다는 설명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지만, 흙먼지는 햇볕에 노출된 마른 땅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사슴이 사는 산속에서 일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설정이라면 차라리 '말이 몰려 달아나다'의 뜻인 驫(표)와 土를 합쳤으면 제격이었겠다.
塵의 옛 모습이서 廌나 土가 여러 개 겹쳐 들어간 것은 별개의 의미를 지녔다기보다는 장식적인 필요에 따라 글자를 여럿 집어넣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전체에서 윗부분을 구성했던 麤는 지금 '거칠다'의 뜻으로 남아 있는데, 廌의 발음과 가까워 역시 鹿이 아니라 廌를 셋 겹친 글자로 봐야 한다.
그러면 慶·塵·薦의 발음기호인 廌는 어떤 글자일까? 廌는 '해태'의 뜻이다. 광화문 앞에 눈을 부릅뜨고 앉아 있는 그 상상 속의 동물이다. 사자 비슷하고, 이마에 뿔이 하나 나 있다고 한다.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동물로 인식됐고, 특히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이 있어 옳지 못한 사람은 뿔로 받아버린다는 '정의의 화신'이다.
해태는 한자로 獬豸(해치) 또는 獬廌(해치)로 쓴다. 廌는 발음이 豸와 같고 의미도 같아 결국 豸=豕의 이체자라고 할 수 있다. 모양은 머리 부분이 복잡해진 것이며, 이런 모습은 지난 회에 다룬 象(상)=冢(총)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廌에서 慶·塵·薦 등 받침이 있는 글자들이 나온 것도 象=冢의 경우와 비슷하다.
한편 獬도 '해태'의 뜻인데, 초성 ㅊ>ㅅ>ㅎ의 변화를 생각하면 豸=廌와 같은 발음에서 나온 말을 표현한 것이니 같은 글자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豸=廌의 형성자 버전이지만, 달라진 발음을 위해 만든 것이었겠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