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전 대표가 선거 기간 중 황금 같은 하루를 털어 수행한 '개인 일정'의 비밀은 이날 해질 무렵에야 공개됐다. 지원유세를 요청한 개별 후보들을 위해 간단한 응원 메시지를 담은 영상물을 보내기로 하고 영상물을 녹화한 것이다.
각 후보와 자신과의 인연을 부각시킨 박 전 대표의 지원 메시지는 강창희(대전 중구), 김학원(부여·청양), 김태흠(보령·서천), 구상찬(서울 강서갑), 김선동(도봉을), 함진규(경기 시흥갑), 손범규(고양 덕양갑), 유영하(군포) 등 수도권·충청권에 출마한 친박(親朴) 인사 11명에게만 배달된 것으로 전해졌다.
"공천에 대한 사과 없이는 선거지원 어려워"
전날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박 전 대표가 어려운 경선과정에서 자신을 밀어준 사람들이 공천을 못 받아 당을 떠나는 등 가슴 아픈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박 전 대표를 밀었던 의원이 당에도 많은 만큼 마음을 움직여 주면 고맙겠다"고 말했다.
텃밭인 대구·경북의 일부가 '친박연대' 등 무소속 후보 앞에 휘청이자 당 지도부가 공식적으로 박 전 대표에게 SOS를 친 것이다.
박 전 대표가 전달한 응원의 메시지는 그 '회신' 격이다. 녹화된 영상을 보냄으로써 '직접적인 지원유세는 없다'는 기존 입장을 확인했고, 그마저도 수신인을 친박 후보들에게 한정함으로써 당을 바라보는 박 전 대표의 '냉담한 마음'을 전달했다.
실제로 강 대표의 지원요청은 공천에 대한 불만을 지역구 관리로 삭이고 있던 박 전 대표 측을 도발한 것으로 보였다. 지지율이 80%를 상회하는 마당에, 중앙 선거엔 눈길을 두지 않고 달성군 내만 훑어대는 박 전 대표의 최근 행보엔 이미 '달성 농성'이란 별칭이 붙어 있었다.
박 전 대표 측 한 인사는 박 전 대표의 지역구 몰두를 "침묵시위"로, 강 대표의 전날 발언을 "압박"으로 표현했다. 그리고선 "밥상 앞에서 내쫓더니 이제와 설거지거리가 생겼다고 부른다"며 "박근혜가 한나라당 식모냐"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 인사는 또 "박 전 대표는 무엇보다 경선 승복의 결과가 공천 보복으로 돌아온 데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며 박 전 대표의 선거 지원 가능성에 대해서는 "원칙이 훼손된 데 대한 당 차원의 사과와 재발방지가 없는 한, 당이 박 전 대표의 지원을 바라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무소속 친박도 기대걸어 보지만…
이처럼 박 전 대표 캠프 문틈으로 '분 삭이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이번에는 친박 무소속 후보들의 귀가 솔깃해 지는 모습이다.
투표일까지 6일이 남은 현재 대구·경북의 선거 판세는 한차례 몰아친 박풍이 조정국면을 맞은 상황이다. 하지만 한나라당을 탈당한 친박 후보들은 박 전 대표가 당에 머물러 있는 친박 후보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데 이어 자신들에게 모종의 시그널을 보내줄 경우에는 이 같은 교착국면은 어렵잖게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SOS 역시 박 전 대표에겐 응답하기 어려운 요청이다. 당 밖의 인사를 지원하는 것은 명백한 '해당 행위'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선 이미 이방호 사무총장이 "친박연대가 출마해서 피해를 보는 우리 출마자들도 있는데 이들의 불만이 크다. 이 문제 대한 박 전 대표의 분명한 입장이 필요하다"며 견제구를 날린 바도 있다.
5년 후를 생각해야할 박 전 대표로서는 측근들의 공천에 연연해하다 '원칙주의자'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도 경계해야할 부분이다.
이에 박 전 대표는 무소속 후보들의 '박근혜 마케팅'을 제어하지 않는 정도로 소극적 지원의 선을 긋고 있다. 요컨대, 지난 1일 박 전 대표가 화원 유세에 나서자 인근 지역의 친박 무소속 이해봉 의원과 한나라당 서상기 후보가 양 옆을 수행하고 나서거나 다사지역 방문에선 친박연대 박종근 의원이 찾아왔을 때 반갑게 맞는 선이다.
박 전 대표 측 한 측근은 "당을 나간 분들에 대해서는 할 만큼 했다는 것이 우리 생각"이라고 했지만, 친박연대 한 관계자는 "요새 같은 국면에서 박 전 대표의 한 마디가 아쉬운 게 사실"이라며 좀 더 적극적인 지원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달성, '하나마나' 선거에 고요한 민심 선거철마다 구름처럼 많은 군중을 몰고 다니는 박 전 대표의 별명은 '선거의 여인'이다. 그러나 '선거의 여인'이 2주째 머물고 있는 달성은 여인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듯 했다. 대구 지하철 1호선의 한 끝인 대곡역에서 화원읍 소재 박 전 대표의 사무소까지, 택시비가 기본요금 1800원에서 200원이 더 붙도록 대로변을 달려도 박 전 대표의 선거 운동원은 물론 플래카드 한 장을 찾아볼 수 없었다. 화원 시내를 누벼 화원초등학교 앞 사거리에 이르러서야 박 전 대표와 민주노동당 노윤조, 평화통일가정당 임정헌 후보의 플래카드가 나란히 걸린 길목이 나왔다. 기자와 함께 플래카드를 찾아다니던 30대 택시 기사는 "이 동네는 투표하는 종이가 아까울 지경"이라고 혀를 찼다. 박 전 대표의 선거운동 역시 다른 후보들에 비하면 간소하기 짝이 없었다. 하루에 한 읍면을 골라 시설 위주로 인사를 다니니 오전 11시에 시작한 일정은 해거름에 끝이 난다고 했다. 지금까지 박 전 대표가 마이크를 잡고 직접 유세를 한 것은 단 두 차례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달성군민이 지켜주셔서 어려운 위기를 이겨냈다"는 식의 간단한 인사였다. 별다른 운동이 없어도 박 전 대표의 인기는 전국 최고다. 지난 달 29일 한나라당 여의도 연구소 여론조사에서 박 전 대표가 지역구인 대구 달성에서 80.7%의 지지율을 얻어 전국 1등을 차지했다. 반드시 투표하겠다는 층에서는 85.9%로 그 인기가 더 높았다. 그러나 '하나마나'한 판세에 선거 자체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는 분위기도 적잖은 듯 했다. 화원읍 달성농수산물 종합유통센터 앞에서 만난 한 40대 주부는 "어차피 박근혜 씨가 될낀데 투표할 필요가 있겠나"고 반문했다. 대구로 돌아오는 길의 택시 기사는 "서울에 앉아서도 훤할낀데 뭐 들을끼 있다고 여까지 왔냐"며 외려 취재 온 기자를 나무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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