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를 서양사에서는 보통 '천재들의 세기'라고 부른다. 수많은 천재들이 등장하여 이 시기 서양의 학문적 수준을 한 단계 높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는 특히 자연과학자들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16세기의 코페르니쿠스에서부터 시작하여 17세기에는 브라헤, 케플러, 갈릴레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하비, 보일, 뉴턴 등 수많은 과학자들이 등장하고 이들에 의해 천문학, 수학, 물리학, 해부학, 생리학 등이 급격하게 발전한 것이다. 또 18세기에는 라부아지에, 프리스틀리 같은 사람에 의해 화학이 뒤늦게 이에 동참한다.
특히 뉴턴은 이 모든 성과를 하나로 종합하여 유럽의 자연과학을 새로운 단계로 진전시켰다. 중세를 지배했던, 지상과 천상의 원리가 다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인 이론을 무너뜨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세계와 우주가 하나의 수학적인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와 같은 것으로 믿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인간이 만든 가장 복잡한 기계가 시계였으므로 사람들은 이 우주를 거대한 시계와 같은 구조를 가진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유럽인들은 이제 세상 만물이 어떤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렇게 17세기에 기초를 다진 서양 근대과학은 18세기에는 계몽사상이라는 합리적인 사상의 기초를 마련했고 19세기에 들어오면 산업혁명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서양 근대과학은 유럽 물질문명 발전에 큰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유럽의 세계 지배를 달성하게 하는 데도 근본적인 요인이 되었다. 17세기의 과학 발전이 서양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이다.
이런 이야기는 17세기 과학발전을 '과학혁명'으로 규정하여 높이 평가하고 근대에 있어 서양의 우월을 자연과 세계에 대한 과학적, 합리적인 인식의 결과로 보는 서양 학자들의 일반적인 주장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특히 '과학혁명'은 짧은 시간 안에 유럽 자연과학에 일대 변화를 야기했다고 생각하므로 지난 반세기 동안 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근대 유럽과학의 발전에 대한 이런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유럽중심적인 것으로 상당한 문제를 갖고 있다.
'과학혁명'과 유럽중심주의
서양 근대문명의 발전과 과학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많은 서양학자들이 지적해 왔다. 사실 이 둘을 연결시키는 것은 근대에 있어 서양의 우월을 합리화하는데 매우 편리하다. 서양은 과학혁명이 있어서 발전했고 동양에는 그런 것이 없어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기 쉽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과학혁명이 서양의 우월을 가져오는 데 본질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넘어서서 서양과학이 중세시대에도 다른 곳에 비해 우월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를 쓴 린 화이트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는 16세기에 유럽이 앞선 것은 9세기에 이미 유럽의 농업기술이 세계의 다른 지역을 앞섰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 유럽은 8세기에는 군사기술로, 11세기에는 공업기술로 다른 지역을 모두 앞섰다는 것이다.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던 1950년대식의 생각이다.
그래서 많은 서양학자들은 동양에서는 수학이 발달하지 못했으므로 논리적인 사고가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과학이 발전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서양에서는 '그리스의 지적 사고의 유산이, 무엇보다 논리학과 논쟁을 통한 합리적인 대화와 의사결정이 그 후의 서양의 지적 발전의 길을 마련했다'고 주장한다. 이미 그리스 시기부터 달랐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인도나 중국, 이슬람 문명에서 과학이 상당히 발전했다는 사실과 일부 지역에서는 13, 14세기까지 서양을 능가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슬람 과학이 14세기까지 유럽과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과학사를 폭 넓게 연구하여 중국과학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데 크게 기여한 조셉 니덤 같은 사람은 중세 시대는 물론 15세기까지 중국 과학이 우월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1644년까지는 중국과 유럽 과학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차이는 그 후에 생겼다는 것이다.
이들은 아시아 과학이 근대과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서양에서만 그렇게 된 것을 사회경제적, 문화적, 제도적인 여러 차이의 결과로 본다. 즉 서양에서만 근대과학이 발전한 것은 서양사회의 여러 특징들과 법, 종교, 철학, 신학 등 서양의 여러 문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서양에서의 중세대학의 발전, 자유로운 연구 분위기의 존재,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결여 등 온갖 주장을 다 편다. 로버트 머튼 같은 사람은 그 원인을 프로테스탄티즘과 관련시킨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세계관 안에서 과학과 지식활동에 대한 어떤 유의미성을 찾아야 했다는 것이다. 이는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발전을 연결시키는 베버의 테제를 과학에 적용한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 유럽과학이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손쉬운 주장들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이슬람과학이나 중국과학 등 비유럽과학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으며 근대 유럽인의 독창성을 과장하여 유럽과학 발전의 실상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 근대의 어떤 중요한 역사적 사실에건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려 하는 것은 20세기 후반 서양 역사학자들의 특유한 태도이나 이런 주장들 가운데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많다. 17세기 '과학혁명'을 통해 근대과학과 관련한 이 문제에 한번 접근해 보자.
(매주 수,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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