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달리 약속이 없으면 취미활동시간이다.
세계사 연표와 역사지도책을 펼쳐놓고, 지나간 역사의 일들을 60 甲子(갑자)를 매겨가며 들여다본다. 60 년과 360 년의 순환주기를 통해 어떤 자가 일어났고 또 사라져갔던가? 앞으로는 어떤 세력들이 새롭게 생겨나고 스러져갈 것인가?
보충자료를 위해 인터넷을 들락거리기도 하고, 다음 날 코앞에 있는 교보문고에 들르기도 한다.
오늘의 얘기는 A.D. 200 년경 지금의 이란 지역에서 흥기했던 사산조(朝) 페르시아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문명 세계는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로부터 진출해오는 여러 기마유목민족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서쪽의 로마제국은 게르만 족의 이동에 따라 문패를 내려야 했고, 중국 역시 여러 유목민족의 침입에 의해 5호 16국 시대라는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유목민족들은 그러나 서남아시아 방향으로 진출하는 데 실패했다. 사산 페르시아 제국이 굳건하게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기마민족의 기본 전술은 창이나 칼이 아니라, 말 위에서 적과 거리를 두고 연신 쏘아대는 화살이었다. 그러나 이 전술이 사산 페르시아에게는 통하질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통하지 않았던 이유와 배경, 이것이야말로 세계사의 흐름을 크게 바꿔놓았다.
사산 페르시아의 앞선 왕조는 파르티아 왕국이었는데 이들 역시 본래는 유목기마민족이었다. 그들이 말 위에서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는 것을 서양에서는 '파르티안 射法(시법)'이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궁기병들이었다.
말 위에서 몸을 뒤로 돌려 화살을 쏘는 기법은 우리와도 연관이 깊은 유목민족인 스키타이 인들이 발전시켰던 것이었기에, 고구려 벽화에도 잘 묘사되어있다.
그런데 파르티아 인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들은 '알팔파'라는 영양가 높은 특수재배 사료를 통해 초원지대의 작은 조랑말을 대단히 키가 크고 힘과 지구력이 좋은 새로운 품종의 말로 개량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개량 말은 힘이 좋아서 무사와 말 스스로도 철제 갑옷으로 무장할 수 있었다. 결과, 가벼운 옷차림의 유목민족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할 수 있었다. 물론 중갑 기병은 그 무게로 인해 도망가는 유목기마병을 추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들의 침입을 막는 데는 성공했던 것이다.
파르티아 왕국은 그러나 중장갑 기병을 유지하는 데 따르는 비용과 여타 정치문제로 고전했다. 그래서 그들은 무사들에게 영지를 주어 자체 해결토록 하는 방안을 마련했는데 이것이 중세 유럽 봉건 제도의 원형이었다.
하지만 무사들은 수시로 중앙 정권에 대항했고, 농민들을 수탈했는데 모두 결국에는 비용 문제가 원인이었다. 그 바람에 파르티아는 사라지고 사산 페르시아 제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여기서 사산 페르시아 제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정치제도를 창안함으로써 인류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사산 왕조의 통치자들은 당시 지역의 주된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를 國敎(국교)로 하여 무사집단과 지주들을 교화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툭하면 반란을 일으키던 무사와 영주들에게 종교적 교양을 가르침으로써 이해관계를 조절하고 그 폭력성을 순화했던 것이다.
사산 페르시아가 굳건하게 자리 잡자 유럽과 중국, 그리고 인도를 잇는 새로운 교역로가 안정을 찾았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실크로드였다. 사산 제국은 그 교역로를 지켜주는 대가로 비싼 통행료를 받았고 그 수익으로 중장갑 기병의 비용 중 상당 부분을 감당하여 상비군으로 유지할 수 있었으며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사산 페르시아 제국이 강성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사산 페르시아 제국이 팽창하면서 만나게 된 서쪽의 라이벌은 동로마 제국이었는데, 그 두 강대국은 종교와 여타 이해관계로 인해 수 백 년에 걸친 전쟁과 화해의 과정을 밟게 된다.
처음에 동로마 제국 역시 보병이 중심이었으나 사산 페르시아의 철갑 궁기병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그러자 동로마 제국 역시 사산 페르시아와 같이 큰 말을 길러내고 철갑을 덮은 궁기병을 만들어내었다.
이를 두고 카타프락트(catapract)라고 한다. '카타'는 갑옷, '프락트'는 protect의 그리스 어로서 '갑옷으로 보호된' 기병이란 뜻이다.
동로마제국은 카타프락트로 균형을 잡았지만, 역시 엄청난 유지비용이 문제였다. 이에 동로마 인들은 제도상의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동로마 제국은 무사들의 집단에게 국경 주변에 있는 대량의 농토 지급을 통해 풍족한 생활을 보장함과 동시에 군비를 충당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런 제도를 테마(theme)라고 하는데, 이 테마 시스템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다시 부흥하여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동로마 제국은 사산 페르시아를 그대로 모방하여,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정교일치제를 통해 무사집단의 이해를 조정하고 중앙 권력에 대한 도전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기독교는 다양한 교파간의 교리로 인해 정통성 문제를 놓고 엄청난 소모전을 벌여야 했으니 니케아 종교회의란 것, 삼위일체 논쟁, 성상파괴운동과 같은 유명한 사건들이 바로 그것이다.
예전에 동로마 역사를 읽다가 왜 그토록 종교 교리가 국가의 안위와 깊은 연관을 맺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 겨우 알 수 있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다가 이윽고 마상에서 발을 거는 鐙子(등자)가 서양에도 소개되었다. 서양에 소개되고 일반화된 것은 거의 기원후 1000 년경이었는데, 고구려 기마 무사들은 이미 그보다 700 년 전에 등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고구려 기마병의 기술 수준은 단연코 세계 제일이었다. 높은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무사와 말에 철제 갑옷을 두른 개마기병은 물론 등자를 통해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운신할 수 있었고, 활과 활을 쏘는 사법 역시 최고 수준이었다.
그리고 말도 조랑말만이 아니라 중갑 기병을 운용할 수 있는 크고 튼튼한 품종을 나름대로 개발해내었음이 분명하다. 필자는 부여를 이어 등장한 고구려 자체가 이런 기술적 발전과 궤를 함께 한다고 추산하고 있다. 고구려는 기마민족과 문명국가의 장점을 모두 지녔던 것이다.
다시 본 줄거리로 돌아오자.
사산 페르시아는 중갑 기병과 실크 로드에서 나오는 수익, 정교일치를 통해 번영을 구가했다. 하지만 그 역시 운이 다하면 소멸하는 법이라 전혀 의외로 북쪽의 유목 민족이 아니라 그 반대방향인 아라비아에서 새롭게 일어난 이슬람 세력에 의해 종말을 맞이해야 했다.
이슬람 인들은 사산 페르시아의 찬란한 문화유산들을 우상이라는 명분 아래 철저하게 파괴해버렸다. 그 바람에 사산 페르시아의 찬란한 역사를 전하는 자료와 유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니 실로 애석한 일이다.
이렇게 사라진 사산 페르시아지만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훗날 유럽에서는 중갑 기병과 등자를 통해 활이 아니라 무거운 창을 들고 적진을 향해 돌진할 수 있는 기사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비용을 유지하기 위해 중세 유럽은 사산 페르시아의 봉건 제도를 도입했다.
창기병 기사의 파괴력은 대단해서 드디어 늘 수세에 몰리던 유럽은 십자군 전쟁을 만들면서 공세로 전환했으니 이는 역사의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또한 로마 카톨릭이 그토록 위세를 떨친 것 역시 사산 페르시아의 정교 일치제의 영향이었다.
사산 페르시아는 인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사산 페르시아가 유목민들의 남하를 막아주는 바람에 인도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굽타 통일왕조가 들어설 수 있었다.
사산 페르시아는 인도의 굽타 왕조에서 생산되는 물자의 교역로를 보호하면서 커다란 재미를 보았다.
굽타 왕조는 덕분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인도 문화의 원형을 완성했다. '마하바라타'나 '라마야나'와 같은 대서사시와 마누 법전, 십진법의 창안, 아잔타의 석굴과 같은 절정의 불교 미술 등이 모두 이 시대의 일이었으며, 아울러 힌두교에 밀린 불교는 사산 페르시아를 경유하여 중국으로 불교를 수출했다.
인도 불교가 중국으로 그리고 한국과 일본으로 수출되어 성공한 것 역시 근본원인은 불교를 국교로 하여 정치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사산 페르시아의 정교일치 제도 때문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처럼, 호국불교사상의 원형은 사산 페르시아였던 것이다.
사산 페르시아는 동서양의 길목을 지키면서 세계사의 흐름에 엄청난 기여를 했지만 이슬람에게 넘어간 뒤로 자취가 아련하다.
하지만 이슬람의 높은 문명과 기술 역시 사산 페르시아의 후예인 '이란' 사람들의 업적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산 페르시아의 기원과 흥망을 60 갑자로 짚어가며 연구하고 분석해보다가 더 중요한 것은 먼저 그들을 소개하는 것이라 싶어 이런 역사 에쎄이를 쓰게 되었다.
오늘날 사산 페르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는 책은 얼마 되지 않는다. 찬란한 문명을 통해 인류 역사 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했건만 누군가 알아주고 기려주는 이가 별로 없다 생각하니 그 넋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 글은 '사산 페르시아인'들에게 바치는 獻辭(헌사)이다.
(전화:02-534-7250, E-mail :1tgkim@hanmail.net)
김태규의 명리학 카페 : cafe.daum.net/8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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