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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도사로 한국사회를 논하려 하는가?

[이광수의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다'] <1>

연재를 시작하며

한국 사회에서 역사 인식은 주로 소위 국사를 통해 형성되어 왔다. 그런데 그마저도 식민과 분단, 그리고 내전과 독재의 과정을 거쳐 오면서 매우 불편하고 왜곡된 모습으로 만들어져 제대로 된 보편적 역사 인식이라 말하기 곤란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 안에는 민족주의, 국가주의, 자본주의 등의 영향이 과도할 정도로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 인식이 그 사회를 불편부당하게 평가하고 성격을 규정하는 잣대로서 매우 부적절한 상태다. 이 사회 내에서 만연한 역사 인식이 얼마나 '우리' 안의 특수한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다른 나라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국사와는 물론 다르고 중국사나 유럽사와도 다른 역사를 통해 역사가 갖는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도 현재 이 사회는 그렇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시민들이 국사의 세계를 벗어나 보다 넓고 다양한 역사의 세계를 접하고, 그를 통해 또 다른 종류의 역사 인식을 배우고 익힐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아닌 '남'의 역사를 통해 찾은 역사 인식을 통해 '우리'를 한 번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은 그 '우리'의 역사 인식과 다른 역사 인식을 인도사에서 한 번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인도사를 통해 새로운 또 하나의 역사 인식을 가져 그 천박한 한국 사회를 고칠 수 있는 일에 조금이나마 역할을 할 수 있다면 학자로서 그보다 더 보람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내 논문 내가 쓰고, 내가 읽는 논문 몇 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연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필자>


1. 왜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려 하는가?

천박스러운 한국 사회, 오로지 돈과 승리밖에 모르는 한국 사회. 돈과 힘에서 승리한 소수만이 기를 펴고 사는 한국 사회. 연구도 안 하고, 강의도 안 하고, 오로지 자리만 탐하거나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나 사는 것과 무슨 관계냐고 목에 힘주어 말하고 다니는 교수들이 각 대학마다 득시글거리고,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 할 때 미국 사람들보다 더 그 침략 전쟁을 옹호하는 목사들이 교회마다 득시글거린다면, 이 사회, 할 말 다 한 사회 아닌가.

독도 문제만 터지면 왜들 그렇게 호들갑이면서 중국에서 건너 온 독립 운동가 후손 재중 동포에게는 왜 그렇게 무관심하고, 무시하는지. 대학 강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면서 일용잡급직으로 분류되는 그 비정규직 교수는 당연한 경쟁 사회의 결과라고 인식하고, 중학교 1학년 교실에 드디어 0교시와 '야자' (야간 자율학습)가 생긴 것이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정책'으로 인식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감히 서울대도 스카이 출신도 아닌 상고 출신이 10년이나 이 나라를 통치하다니' 라는 한탄이 이 시대 기득권의 심성을 대변한다면 거의 절망 수준에 이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 경쟁에서 이기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사진은 최근 비정규직 교수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대해 자살로 항거한 한 비정규 교수를 추모하기 위해 국회 앞 천막 농성장에 모신 빈소다. ⓒ이광수

나는 전공이 인도사이고 아시아평화인권연대 라는 작은 반전평화 시민운동 단체의 공동 대표 일을 하고 있다 보니, 인도, 파키스탄, 네팔, 아프가니스탄, 캄보디아 등을 방문해 그 역사와 사회에 대해 관심 있게 지켜보거나 생각해 본 기회를 조금 가져 왔다. 그 때마다 느낀 것이 하나 있다면, 참으로 한국 사람들은 역사와 사회에 관해 독특하거나 이상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반화시켜서 말하기는 곤란하겠지만, 한국이 다른 나라, 적어도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비교해 볼 때 보편적 사회의 모습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가져 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한국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정상이고, 다른 나라들이 비정상적인데, 그것은 우리가 성공해서 잘 살고, 다른 나라는 못 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 사회가 아프가니스탄이든, 캄보디아든, 네팔이든 그 사회를 이해하는 기준은 모두 한국식 돈과 힘의 승리 이데올로기뿐이다.

한국의 신문같이 미국, 중국, 일본 등 소위 주요 몇 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설사 다른 나라를 다루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해외토픽'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한국과 같이 아시아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지한 아시아의 나라는 없을 것이다.

한국은 오로지 돈 있고, 힘 있고, '우리'와 가까이 있는 미국, 중국, 일본밖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프리카나 중남미는 차치하고라도, 지리적으로 가까이에 있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관심을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황사로 인해 그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스스로 제국주의의 틀 안에 들어가지 못해 안달이 나 있기 때문에 바깥 세상을 왜곡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조차 갖지 못한다.

도대체 뭐가 문제고, 왜 이 모양으로까지 됐을까?

일반화해서는 곤란하겠지만, 이는 잘못된 역사 인식으로 인해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본다. 역사는 사회를 평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시각을 제공해주는 학문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역사학이 다른 어떤 학문보다 사회의 모든 부문을 포괄하고 연계하는 종합적인 성격을 가진 데다가, 사회 현상을 평가하고 그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그 필수적인 사명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갖는 역사 인식은 주로 한국이라는 매우 독특한 공간에서 발생한 역사를 통해 만들어졌다. 그것은 지리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치우쳐 있어 다른 역사 공간과 상대적으로 격리되어 있었고 그 결과 중국 혹은 동아시아와의 관계에 너무 치우친 역사적 사실과 관계가 있다. 게다가 한국에서의 근대적 의미의 역사 연구는 식민과 분단 그리고 내전과 독재의 과정을 거쳐 오면서 매우 불편하고 왜곡된 모습으로 전개되면서 역사학의 한계가 너무나 많이 만들어졌다.

역사는 항상 힘 있는 권력층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는데, 특히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으로 인해 이데올로기가 심하게 왜곡돼 과거를 보는 불편부당한 시각으로서의 역사학이 크게 훼손되어 왔다. 그래서 유독 민족주의, 국가주의, 자본주의 등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고, '국사' 중심의 역사가 과도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역사 인식은 곧 국사로부터 받은 역사 인식이 되어 왔다. 그래서 역사가 사회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성격을 규정하는 잣대로서 매우 부적절하게 되어버렸다.

잘못된 역사 인식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이것 말고도 또 있다. 한국 사회가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또 한 번 - 이미 1950년 한국전쟁을 통해서 한 번 겪은 적이 있다 - 세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다. 역사적 평가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오로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만 하면 되는 이데올로기 그 안에 역사라는 세상을 보는 잣대는 파묻혀버렸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리 썩 중요하지 않는 물음이 되어 버렸다. 세상이 오로지 이윤을 추구하고, 결과만 보는 것에 미쳐 날뛰고 있다. 대학에서 역사와 인문을 논하며 인생을 거슬러가면서 살아가려는 학생은 이제 멸종되어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아니, 그런 교수도 이제는 드물다. 교수가 거의 말라 비틀어져 버린 곳에서 싱싱하고 거침없는 학생이 어떻게 나겠는가?

더군다나 현재의 역사학은 교육 기관인 대학에 종사하는 연구자의 전유물로 굳어져 가고 있다. 그래서 역사학은 사회와 대중으로부터 괴리되어 있다. 여기에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역사라는 게 균질적이고, 실증적인 것으로 가르치는 경향이 그 안에서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이 일제의 식민 잔재의 모습인지, 역사학 하는 학자들의 학문적 환경이 치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역사학의 그런 경향은 대중으로부터의 외면과 소외의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 잘못된 역사 인식은 학살과 테러를 낳는다. 사진은 현대 인도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종교 공동체 사이에 벌어진 학살과 갈등의 악순환 속에서 터진 1993년 뭄바이 연쇄 폭발 테러다.

역사학자가 대중과 소통하는 쉬운 글을 쓰거나, 창의적이고 재기발랄한 방법론을 사용하면서 강의를 하면 가볍고 인기에 영합하는 사람으로 몰리게 되는 것이 일쑤다. 그러니 오로지 연구를 위한 연구밖에 할 수 없고, 논문을 위한 논문을 쓰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연구자들은 자기가 쓰고 자기만 읽는 논문을 쓰느라 몇 년씩 죽을 고생을 하는 안쓰러운 일을 하곤 한다. 슬픈 일이지 않는가?

연구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연구를 치열하게 하자는 것이다. 내가 쓴 글 나만 읽는 풍토일지라도 연구하는 사람은 꾸준히 연구를 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역사학이 오로지 사료의 치밀한 고증과 검증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 중심 풍토에 함몰되어 있다 보니, 고대사 하는 사람은 오로지 고대사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영국사 하는 사람은 오로지 영국사 이야기만 하고, 중국사 이야기 하는 사람은 오로지 중국사 이야기만 하는 풍조가 만연하다.

인도 고대사 하는 사람이 한국 현대의 사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지간한 용기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이명박 정부가 영어 몰입 교육에 있어서 큰 착각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해 영어 수준을 높여야 된다 할지라도 - 이 자체에 찬동할 수 없지만, 찬동하다 할지라도 - 그 영어 수준 높이기를 위한 교육을 왜 모든 학생들이 다 받아야 할 필요 없듯이, 역사학에 있어서도 역사학을 전공으로 계속 하고자 하는 학생에게만 치밀한 학자적 훈련을 시키는 게 옳다. 그렇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다양한 역사 인식과 대중적인 역사 활용의 훈련을 하는 게 옳지 않겠는가?

그 안에 문학, 철학, 인류학, 고고학, 예술 등이 차지하는 자리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역사학이 다루는 대상 공간도 마찬가지로 다양화해야 하는 것이다. 국사 중심은 말 할 것도 없고, 중국사 중심의, 동아시아사만 하는 풍토를 바꿔야 한다. 인도사도 배우고, 서아시아/중동사도 배워야 한다. 오해 해도 할 수 없지만, 내 밥그릇 주장이 아니다. 교수는 일차 사료를 가지고 직접 연구하지 않고, 다른 연구자의 연구물을 공부해서 그 역사를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에 공감대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보다 다양한 세계에 대한 역사 교육이 이루어져 한국 사회의 시민들이 더 이상 애국애족 시민으로만 성장하지 않고, 더불어 사는 세계 시민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학을 학문적으로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역사 인식으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한 번 평해보자 것이다. 그것을 인도사라는 생소하지만,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줄 수 있고, 역사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분야를 통해 해보자고 하는 것이다.

내가 제시하는 역사의 평을 통해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재구성한다든지, 현실의 알레고리로 작용하게끔 한다든지 하는 건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다만, 협소해질 대로 협소해진 한국 사회의 시민들에게 - 대학에서 이러한 기회를 제공해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 이런 신문 공간을 통해 역사 인식의 다양함을 제시해주고 그를 통해 그 독자들이 더 넓은 역사와 사회의 분석 혹은 해석의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심정뿐이다. 그러면서 역사학이 교실 밖으로 나와 사회를 바라보는 중요한 잣대가 되고 그것이 살아서 작용하여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책문에 답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 주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럴 때 역사학도 살아나고 더불어 사회도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대중화든, 인문학 살리기든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내가 개의하는 것은 오로지 편협한 역사 인식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넓고 다양한 역사 인식을 갖추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사회를 건강하게 평가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 보자는 것뿐이다. 그런데 나는 인도사를 하는 사람이니 인도사를 통해 이야기 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사나 중국사 혹은 유럽사를 통해 얻은 역사 인식이 아닌 또 다른 차원의 역사를 통한 역사 인식을 한 번 접해보게 하였으면 하는 소망도 물론 있다.

인도사는 잡사(雜史) - 부산의 어느 대학 사학과 및 역사교육과 초청 특강을 갔다가 들은 우스개다 - 에 속한다. 그런 역사는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려 하지도 않고, 배우려 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우리' 아니면 힘 세고 돈 있는 데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한국사, 중국사, 일본사, 유럽사 이외는 역사 취급도 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인도사를 전공하는 정규직 교수가 인도사를 가르치는 사학과는 단 한 군데도 없다. 그러다 보니 비록 아주 적은 양이라 할지라도 인도사를 일선 학교에서 가르쳐야만 하는 중고등학교 역사 교사들이 대단히 곤혹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다는 불만을 많이 들었다.

결국 이 연재는 두 가지를 위해 기획되었다. 우선은 한국 시민들에게 역사 인식의 다양함을 제시해주고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도사를 쉽게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더불어 의도하는 바가 있다면, 역사학의 내부 소통과 그 이후 대중화를 꾀하는 데 일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 대중화를 통해 한국 사회 안에 팽배해 있는 인식을 한 번 바꿔보고자 하는 것이다. 물리적인 병은 메스를 들이대면 금방 고칠 수 있지만, 인식의 병은 그렇게 한다고 금방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인식의 병은 그 전염성과 충격의 정도가 매우 깊어 그로 인한 결과가 치명적인 수준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전쟁, 학살, 테러는 모두 그러한 잘못된 인식의 결과다. 펜이 칼보다 무서운 정도가 아니라 역사 인식에 관한 문제가 핵보유에 관한 문제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글쓴이 약력

인도 델리대학교 대학원 역사학과 박사 (역사학 박사)
현, 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인도사 전공)
현,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대표


저서로는 《인도문화. 특수성과 보편성의 이해》 (서울: 웅진출판사, 1998), 《카스트. 지속과 변화》 (서울: 소나무, 2002), 《인도사에서 역사와 종교 만들기》 (부산: 산지니, 2006) 등이 있고, 역서로는 《고대 인도의 정치 이론》 (서울: 아카넷, 2000), 《성스러운 암소 신화: 인도 민족주의의 역사 만들기》 (서울: 푸른역사, 2004), 《테러리즘, 폭력인가, 저항인가》 (서울: 이후, 2007) 등이 있다.

(매주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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