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얘기를 하면서 뜬금없이 똥돼지 얘기부터 꺼낸 것은 '집'의 뜻인 家(가)자 때문이다. <그림 1>이 그 옛 모습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구조와 똑같이 宀(면)과 豕(시)의 두 글자가 합쳐진 것으로 볼 수 있다. 宀이야 '집'을 뜻하는 의미 요소여서 제대로 들어갔다고 하겠지만, 거기에 왜 '돼지'인 豕가 들어갔느냐가 문제다.
여기서 나오는 얘기가 바로 똥돼지다. 집 밑에 돼지가 있으니 똥돼지를 기르는 형태의 가옥 구조를 나타낸 글자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런 구조가 우리나라에 독특한 것이라며 한자가 우리 민족의 글자라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하는데, 중국 각지에도 그런 구조는 많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집에서 가축을 기르는 모습이라는 얘긴데, 물론 다른 해석도 있다. 豕를 제물로 보는 것이다. 제물 얘기는 제물을 바쳐 제사를 지내는 공간을 나타냈다는 설과, 사당을 따로 두지 못하던 일반 백성이 집에서 제사를 지내던 모습이라는 설로 갈린다.
그러나 豕가 발음기호라고 생각하면 이런 논쟁은 무의미하다. <설문해자>는 이것을 형성자로 보고, 豕는 '수퇘지'인 豭(가)의 생락형이라고 설명했다. 家의 발음이 豕와 멀어 이런 궁리를 한 것인데, 이는 오버센스로 보인다. 초성 ㅅ>ㅎ>ㄱ의 변화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고, 지난 회의 豕=犬(견)을 상기하면 家의 초성은 犬과 일치한다. 豕와 家의 발음 격차가 벌어져 豕를 발음기호로 보지 못한 것일 뿐이고, 豭와 豕가 모두 '돼지'의 뜻인 것은 같은 발음이 '가'와 '시'로 벌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갑골문의 豕자에서 다리 사이에 점이 하나 더 들어간 글자꼴(<그림 2>)을 찾아내 그것이 수퇘지의 생식기여서 豭의 본래자라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는데, 우연히 점이 하나 더 들어간 豕의 이체자로 보는 게 순리다. 지금 琢(탁)이나 冢(총) 같은 글자에 들어간 豖(축)이 구조상 그런 형태를 이어받은 글자인 듯하다. 豖의 발음 역시 豕·家와 연결이 가능하며, '쫓다'의 뜻인 逐(축)의 발음이 豖과 일치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象(상)은 '코끼리'의 뜻이어서 코끼리를 그린 글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글자의 아랫부분이 豕인 점이 눈길을 끈다. 자전에서도 豕부에 들어 있다. 혹시 코끼리를 거대한 돼지로 본 것이 아닐까?
어떻든 옛 글자꼴을 보면 코끼리의 특징인 코와 상아 등 머리 부분이 좀더 자세히 그려진 듯하다(<그림 3>). 그러나 앞서 개와 돼지의 경우에서 봤듯이, 간단한 선 몇 개로 표현해야 하는 상형문자의 세계에서는 그런 세부적인 차이로 별개의 글자를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중국 중부 河南省(하남성)의 별칭이 豫(예)고 그것이 코끼리를 가리키는 글자였다며 지금의 서식 분포와는 달리 고대에 중국 중부 지역에도 코끼리가 살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은 코끼리 상형설의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그림 3> 같은 것은 글자의 변형이나 꾸밈으로 봐야 한다. <그림 4>는 아예 '그림'이어서 코끼리 모습이 분명한데, 이것은 비교적 후대인 금문이다. 이는 글자의 의미에 맞추어 모양을 꾸미는 현상이 후대에 나타났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그림 3>도 그런 꾸밈이나 豕의 단순한 변형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象은 별개의 상형자라기보다는, 豕의 복잡한 변형이거나 그 위에 어떤 요소를 더한 글자일 가능성이 높다. 전자의 경우 앞서 잠시 언급된 冢과 비슷한 발음이어서 豕의 변형 발음으로 보는 데 무리가 없고, 모양 역시 冢이 조금 더 복잡해진 모습이어서 象=冢(=豕)일 가능성도 있다.
緣(연)·篆(전) 등의 발음기호로 쓰이는 彖(단) 역시 윗부분이 복잡한 豕일 가능성이 있다. 머리가 큰 멧돼지의 상형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그런 주관적인 차이로 별개의 글자를 만들었다고 보가는 어렵다. 그렇다고 윗부분을 독립된 글자로 보기도 어렵다. 豕 위에 붙은 두 획은 冢의 冖 부분을 조금 다르게 정리한 것뿐이다. 彖=冢일 가능성이 높다.
이 밖에 遂(수)·隊(대)의 발음 부분인 㒸(수)와 毅(의)의 발음 부분 豙(의) 역시 그 변형인 듯하다. 이들은 받침이 떨어져나갔지만, 그 뿌리인 豕의 음에도 받침이 없는 것을 생각하면 문제될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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