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1>은 犬의 갑골문이다. 동물의 모습이 분명하다. 개가 앞발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일까? 그건 아니다. 네 발을 딛고 선 자연스러운 모습을 오른쪽으로 90도 돌려 세워 놓은 것이다. 한자는 세로로 줄을 맞춰 쓰던 것인데, 이렇게 가로가 긴 글자를 포함해 줄을 맞추자면 공간을 많이 잡아먹기 때문에 글자를 돌려 놓은 것이다. 특히 대나무를 잘라 종이 대용으로 쓰던 시대에는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동물을 그렸다는 글자 가운데 이런 것들이 많다.
이것이 <그림 2>를 거쳐 犭으로 변화했다고 볼 수 있다. 犭에서 왼쪽은 다리, 위-아래는 머리와 꼬리의 흔적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표준 글자꼴인 犬은 <그림 2> 같은 것에서 변형됐다고 볼 수도 있지만, 획이 너무 달라져 다른 글자의 변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돼지는 지금 豚(돈)자로 주로 표현되고 있지만, 본래의 상형자는 그 오른쪽인 豕(시)다. 豕가 돼지의 상형이라는 것이다. <그림 3>이 그것인데, 犬의 갑골문이라는 <그림 1>과 거의 비슷하다. 그래서 보통은 豕가 배 부분이 더 불룩하고 꼬리가 처져 있는 반면, 犬은 배가 홀쭉하고 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간 것이라고 구분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난센스다. 꼬리의 방향을 일일이 체크한다는 것은 옛날 문자생활에서 거의 불가능한 얘기였고, 꼬리가 말린 것으로 치더라도 개보다는 돼지가 더 말렸다고 봐야 한다. 배가 불룩한 정도라는 것은 순전히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더욱 말이 안 된다. 실제로 豕와 犬으로 분류된 글자들을 보면 이런 설명은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다.
여기서 다시 부수자인 犭에 주목해 보자. 의미 요소로서의 犭은 개와 그 특성과 관련된 글자도 있지만, 개와는 다른 네발짐승과 관련된 글자들도 많다. '여우'인 狐(호), '이리'인 狼(랑), '원숭이'인 猿(원), '멧돼지'인 猪(저), '사자'인 獅(사), '오소리'인 狟(훤) 등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다.
이건 무얼 말하는 걸까? 犭은 '개'라는 특정한 동물을 나타낸 글자가 아니라 일반적인 '네발짐승'을 가리키는 글자였다는 얘기다. 당연히 돼지도 거기에 포함되는 것이고, 그것은 猪자에 犭이 의미 요소로 들어갔다는 사실로 확인된다. 그렇다면 犭과 豕는 별개의 글자가 아니라 같은 글자였다고 볼 수 있고, <그림 1>과 <그림 3>을 별개의 글자로 보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같은 글자에서 출발해 조금 복잡한 모습이 豕로, 간단한 모습이 犭으로 분화한 것이다.
犭=豕가 뭉뚱그린 '네발짐승'의 개념이었다면, 그것은 가축이 아니라 야생 동물이다. 들개나 멧돼지다. 그 단계에서는 종류를 일일이 구분해 나타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나중에 이들을 가축으로 기르면서 글자가 분화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돼지'를 나타내는 글자로 豕보다 豚을 쓴 것도 豕가 犭과 개념상으로는 나뉘어졌지만 글자 모양이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형성자 豚은 ⺼=肉(육)이 의미 요소여서 '돼지고기'가 본뜻이었는데 이런 사정 때문에 '돼지'의 뜻으로 징발돼 쓰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豕는 본뜻을 豚에게 물려주고 의미 요소인 부수자로만 남아 '화석'이 됐다.
또 다른 부수자인 豸(치)는 '발 없는 벌레'라는 옛 책의 설명이 있지만 이는 뭔가 착오가 있었던 듯하다. 이 부수에 있는 글자들은 '고양이'인 貓(묘)나 '표범'인 豹(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모두 훌륭한 발을 가지고 날쌔게 뛰어다니는 동물들이다. 豸는 모양도 豕와 비슷하고 발음도 큰 차이가 없어 그 변형으로 보인다. 貓가 猫의 이체자인 것도 豸=豕=犭이라면 너무도 당연한 얘기겠다. 좀 낯선 글자들이지만 '수퇘지'인 豭가 貑·猳로 쓰이기도 하는 것은 豸=豕=犭임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준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