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54회의 TV토론이 진행됐던 1997년 대선, 총 27회의 TV토론이 열렸던 2002년 대선과 비교하면, 올해 대선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게다가 올해 대선을 앞두고 진행된 TV토론은 형식의 경직성 등으로 인해 후보들의 차이를 보여주는 데는 더욱 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한계는 경제민주화, 복지 등 올해 대선을 가로지르는 중요 키워드에 대한 후보들의 생각을 드러내지 못하게끔 하는 장애물이기도 했다. 결국 국민은 후보들의 생각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투표를 하게됐다. <프레시안>이 주요 후보들의 생각을 그나마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기회인 TV토론을 복기하는 기획을 마련한 것은 그래서다. <편집자>
박근혜, 문재인 두 후보는 다른 쟁점에선 첨예하게 대립했지만, '과기부 부활'에 있어서만큼은 뜻을 같이 했다. 박 후보가 활기 있게 발언을 한 것도 이 대목이었다. 박 후보는 16일 3차 TV토론에서 자신이 "전자공학과 출신"이라고 강조했고, 지난 총선에서 이공계 출신 비례 대표를 많이 내세웠다는 점을 강조했다. '과학기술 대통령'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한 것.
그런데 박 후보의 이런 이미지는 과연 얼마나 사실에 부합할까. <프레시안>이 따져봤다.
박근혜는 왜 과기부 폐지에 반대하지 않았나
과학기술계에서 현 정부에 대해 갖는 불만 가운데 대표적인 게 과학기술정책 사령탑의 부재다. 참여정부 당시 부총리급으로 격상됐던 과학기술부는 이명박 정권이 출범한 지난 2008년 정부 조직개편을 통해 교육과학기술부로 통폐합됐다. 아울러 정보기술(IT)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정보통신부도 해체됐다. 이는 과학기술인들 사이에서 현 정부의 과학기술 홀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곤 했다.
사회·교육·과학기술 분야를 다룬 3차 토론에서 두 후보 모두 이명박 정부의 '과기부 폐지'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과기부 폐지에 관한 책임을 놓고선 공방이 벌어졌다.
문 후보는 "과학기술부를 폐지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박 후보도 공동발의했다. 찬성했다. 과기부뿐만 아니라 정보통신부 폐지 법안, 해수부 폐지법안도 공동발의하고 찬성했다"고 말했다. 해당 법안에 박 후보가 공동발의자로 서명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에 대해 박 후보는 "저는 오죽하면 미래창조과학부를 새로운 개념으로 설립하겠다고 공약을 했겠나. (과학기술 관련 부처가) 꼭 필요하다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박 후보는 "국정운영에 하나의 중심과제로서 과학기술을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 만들어질 과학기술 관련 부처는) 지난 과기부보다 더 큰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박 후보가 과학기술 관련 부처의 중요성을 강조할수록, '그렇다면 왜 2008년 정부 조직개편 당시 왜 과기부 폐지에 반대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궁금증 역시 커진다. 이에 대한 답변은 공백으로 남아 있다.
항공우주산업 민영화에 대한 모호한 입장
두 후보가 함께 목소리를 높였지만, 제대로 된 쟁점이 만들어지지 않은 대목도 많다. 예컨대 두 후보 모두 '나로호의 발사 실패'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실패 사례로 본 것이다. 문 후보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카이)를 이명박 정부가 민영화하려 한다며 "국가가 장기적 비전을 갖고 계속 투자하고 지원해야만 뒤처진 항공우주기술을 살리면서 세계적 수준으로 올릴수 있는데 역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박 후보는 "민영화 과정에서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도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라고 했을 뿐 분명한 답변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영화'를 옹호하는 논리와 박 후보의 과학기술 정책은 양립하기 어렵다. 박 후보는 "기업에서는 당장 쓸 수 있는 기술에 집중해야 하지만 (정부) 출연연구소 등은 중장기적 국가적 과제를 갖고 연구를 해야 한다. 그래서 너무 시간에 쪼들린다든가, 수입에 신경 써야 한다든가 해서는 연구·개발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한국항공우주산업 민영화'를 반대하는 주장과 일치한다. 구체적 영역에선 민영화에 반대하지 않으면서, 추상적 영역에서 민영화 반대 논리와 겹치는 주장을 하는 것은 모순이다.
여전한 국가주의, '황우석 사건'에서 뭘 배웠나
두 후보 모두 과학기술 정책과 관련해 '나로호'에 주목했다. 박 후보는 "2025년까지 달에 착륙선을 보내는 계획이 있는데 저는 그걸 2020년까지 앞당기려 한다. 이 계획이 성공하면 2020년에 달에 태극기가 펄럭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문 후보는 "취지에 100% 공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주과학으로 대표되는 '거대과학', '국가주의 과학'에 대한 집착이 지금도 유효한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목소리가 많이 나온다. 과학기술을 '국위 선양', '국익 증대' 등을 위한 도구로 설정하고, 국가적 캠페인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과학기술 입국'에 대한 환상을 부추겼던 게 과거 군사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과학적 성취를 무리하게 '국위 선양', '국가적 자존심'등으로 연결지으려다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가 '황우석 사건'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의 대표적인 과학기술 정책 실패 사례인 '황우석 사건'에 대해 후보들이 제대로 성찰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두 후보의 공약대로 차기 정부에서 과학기술정책 부처가 부활할 경우, '제2의 황우석 사건'을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함께 제기된다. '황우석 사건'으로 대표되는 '과학기술 물신주의', '국가주의 과학기술정책' 등에 대한 충분한 성찰이 없다면, 전망은 부정적이다.
이공계 기피, 원인에 대해선 입 다물어
두 후보 모두 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드러냈다. "중앙부처 4급 이상 중 이공계 비율 목표를 상향조정"(박근혜), "연구원 정년 연장"(문재인) 등 처방도 제시됐다. 그러나 이공계 기피 현상의 원인에 대해선 두 후보 모두 설명이 없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선 이미 다양한 설명이 나와 있다. 예컨대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는 여러 저술과 인터뷰에서 신자유주의를 그 원인으로 꼽았다.
장 교수는 지난 3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이공계가 주저앉고 의대 인기가 폭등한 것은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예전에는 대기업에서 핵심 업무를 담당한 이들은 미래를 크게 불안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주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경영방식이 자리 잡은 지금은 달라졌다. 당장 수익을 내지 못하면, 누구든 고용이 불안해졌다. 회사 생활이 과거보다 훨씬 팍팍해졌다. 회사원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직업으로 젊은이들이 몰리는 게 당연하다"라고 말했다.
장 교수의 이런 설명이 얼마나 타당한지는 두 번째 문제다. 다만 외환위기를 거치며 신자유주의 기조가 전면화 된 후 두 번째 정부에서 핵심에 있었던 문 후보,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주의적 과학기술 장려책에 향수를 드러낸 박 후보가 '원인 진단 없는 처방'에 머물렀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주최 마지막 대선 TV토론회가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스튜디오에서 열렸다. 새누리당 박근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가 토론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
- 과기부 폐지 당시 과학기술계 우려…"가장 잘못된 과학정책" 지난 2008년 1월 16일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은 정부조직 개편안에 대해 발표하며 전 과기부의 일부 기능이 지식경제부와 교육과학부로 통합된다고 밝혔다. 기초기술은 전 교육부(현 교육과학기술부)에, 응용기술은 전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에 넘기겠다는 것. 그러나 과학기술정책을 종합적으로 관리할 부처가 사라졌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교육부와 산자부가 각각 기초기술과 응용기술을 담당할 능력과 여력이 있는지도 문제로 떠올랐다.통폐합 발표 직후 이현구 전(前)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은 "교육 관련 업무는 현안에 중점을 두고 과학기술진흥 업무는 국가의 중장기적인 미래발전을 염두를 두는 것이어서 조화가 쉽지 않다"고 지적한 바 있다. 김상선 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사무총장 역시 "정부조직 개편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우려했고 일본 문부과학성 사례에서도 나타났듯이 한 부처 내에서 과학기술과 교육이 따로 노는 소위 '한 지붕 두 가족' 현상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지난 2010년 4월 과학기술계 시민단체인 '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이 한국과학기자협회와 함께 과학기술 분야 종사자 87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4.2%가 '과학기술부와 정보통신부를 폐지하고 교육과학기술부와 지식경제부로 개편한 것'이 가장 잘못된 과학기술정책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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