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것 역시 '장면 상형'이라는 점이 문제다.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다. <그림 1>과 <그림 2>만 비교하면 바로 드러난다. 淵의 오른쪽은 泉의 변형이다. 말하자면 湶 형태의 글자가 변해 淵이 된 것이다. 거기서 泉은 발음기호인데, 초성이 약화됐다. 고구려 淵蓋蘇文(연개소문)을 泉蓋蘇文(천개소문)으로 쓴 옛 책들이 있는데, 이는 唐(당) 고조 李淵(이연)의 이름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淵과 泉이 밀접한 관계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淵의 옛 모습 가운데 <그림 4>와 같은 글자꼴은 囦 형태로 정리됐다. 그래서 囦은 淵의 본래자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泉의 변형일 뿐이다. 지난 회에 盥(관)의 윗부분 역시 泉의 변형이지만 白 부분이 臼(구/국)으로 변했다고 했는데, 囦에서는 가운데 획이 없어져 囗 형태가 된 것이다. 아래에 있던 水가 안으로 들어간 것은 두 경우가 같다.
여기서 또 하나 끄집어내야 할 글자가 衍(연)이다. 물이 '넘치다' '흐르다'의 뜻이니 氵=水와 行(행)을 합친 글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氵가 글자 안으로 파고들어간 이례적인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그림 1>과 같은 泉의 옛 모습에서 水 부분을 뺀 나머지 부분이 行으로 변했다고 볼 수도 있다. 발음이 淵과 일치해, 상당한 발음 변화를 상정해야 하는 行 쪽보다 훨씬 그럴듯하다. 衍 역시 泉=囦의 변형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衍의 일부 옛 글자꼴은 또 永(영)의 옛 모습과 비슷하다. <그림 5>는 <그림 6> 같은 모습이 간략해진 것인데, 이는 永의 소전체와 똑같다. 물론 永에는 <그림 8>처럼 더욱 간단한 모습도 있지만, 이는 衍=泉의 원본인 衆의 초기 글자 众과 일치한다. '길다'(永)나 '흐르다'(衍) 등은 泉의 '샘'에서 파생된 의미일 수 있다. 永의 발음은 衍과 받침만 약간 다르지만, 큰 차이도 아닌데다 오히려 衆의 받침과 같아졌다.
永은 강의 본류와 지류가 합쳐지는 모습이라거나 강에서 사람이 헤엄치는 모습이라는 식으로 상형적인 설명이 이루어지던 글자지만, 衍=泉=衆의 변형 또는 衆의 아랫부분 众의 변형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淵의 옛 모습이라는 囦과 관련되는 글자들이 있다. 困(곤)은 나무(木)가 어떤 틀(囗)에 갇혀 자라지 못하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모양이라거나, 문(囗) 입구의 문지방(木)을 나타내 문지방 안에 갇혀 있거나 출입이 제한돼 있는 어려움을 나타낸 글자로 설명된다. 생경한 회의자식 설명들이다.
그런데 水와 木이 비슷한 글자기 때문에 困은 囦과 같은 글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그림 10, 11> 같은 困의 옛 모습들을 보면 囦의 뿌리인 泉처럼 상하 구조로 된 글자꼴이다. 충분히 泉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발음도 '연'에서 초성만 발음 부위가 같은 ㅇ>ㄱ으로 변한 셈이고, 淵이 물이 고인 것이라는 의미에서 어딘가에 갇힌 이미지인 困과 통한다.
菌(균)의 발음 부분인 囷(균)도 困과 비슷한 발음이고 모양상 차이점인 禾(화) 부분 역시 木과 옛 모습에서 헛갈리기 쉬웠다는 점에서 그 변형일 가능성이 있다. 돗자리(囗) 위에 팔다리를 쭉 뻗고 누운 사람(大) 모습을 그렸다는 因(인)자도, 大 부분이 상당히 간략한 감은 있지만 困의 변형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大 부분이 발음기호 文(문)의 변형인 별도의 형성자일 가능성도 있긴 하다.
衆의 이체자인 泉·囦·衍 등에서 水 부분은 人을 셋 합친 众의 변형인 셈이다. 그런데 이들의 발음은 水보다는 川(천)과 가깝다. 水나 川은 모두 강물의 흐름을 상형한 것이라고 하는데, 같은 것을 상형해 두 가지 다른 글자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둘 중 하나는 틀린 얘기다. 川이 泉·囦·衍 등의 발음과 비슷하다면 泉·囦·衍에 들어간 水는 川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고, 그 부분은 众의 변형이니 川은 众의 변형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사실, 강물의 흐름을 상형했다는 얘기 자체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것 역시 '장면 상형' 내지 '풍경화'다. 일단 발음이 조금 다른 水는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水와 川이 같은 원리로 만들어졌다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 발음과 모양에서 泉 등과 밀착된 모습을 보이는 川은 人을 셋 합친 众의 변형으로 보는 게 나을 듯하다. 人을 흘려 써서 S자 곡선으로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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