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지도에만 있는 나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지도에만 있는 나라

전쟁 5년, 이라크는 지금 <상>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03년 3월 20일 아침(한국시간) 미국은 이라크를 전격 침공했다. 공격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과 이라크-알카에다 연계설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 지 오래다. 이라크를 점령해 이란을 견제하겠다는 지정학적 목적도 시아파가 이라크 정부를 장악함으로써 물거품이 됐다. 오히려 미국은 이라크를 이란에 헌납했다.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지난 2일 역사적인 이라크 방문에서 미국을 마음껏 조롱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석유 자원 장악이라는 실리도 챙기기 힘들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든 돈이 3조 달러라고 계산했다. 경제위기에 빠진 미국의 국민들은 이제 이라크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무감해졌다.

미국이 3조 달러를 잃었다면 이라크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미국은 전쟁을 시작하면서 테러세력을 척결함에 있어 '부수적인 피해'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수십만에서 수백만까지, 헤아릴 수 없는 이라크인들의 피해는 결코 '부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각종 국제기구와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이라크 여성, 어린이, 일반인들의 참상은 지옥 그 자체다.

끝 모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라크의 생생한 모습을 알아보기 위해 현지에서 활동하는 독립언론인들의 글을 3회 연속 소개한다. 첫 번째는 영국 <인디펜던트>의 전쟁종군기자인 패트릭 콕번이 미국 웹사이트 <카운터펀치>에 보낸 '5년의 전쟁은 한 나라를 어떻게 파괴했나'라는 글이다. 두 번째는 전쟁 르포 기사로 유명한 다르 자마일이 지난 17일 미국의 외교정책 비평 사이트인 <포린 폴리시 인 포커스>에 보낸 '지배는 있지만 화해는 없다'라는 글이다. 세 번째는 세계적인 평화운동가인 A.K. 굽타가 쓴 '이라크에서 승리하고 세계를 잃은 부시'이다. <편집자>


5년의 전쟁은 한 나라를 어떻게 파괴했나?

"사담 시절의 이라크를 보는 것 같다."

지난 주, 붉은색 모자를 쓴 이라크 병사들이 누리 알 말리키 총리를 호위하기 위해 바그다드 중심부를 폐쇄하는 걸 보면서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사담 후세인에 저항하는 무장투쟁을 벌였던 그는 화를 냈다.

이라크 침공 후 5년이 지난 지금 미국과 이라크의 정부는 이라크가 덜 위험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말리키 총리를 보호하기 위해 취해지는 조치를 보면 그런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 총을 든 군인들은 먼저 교통을 통제한다. 그리고 각각 세 정의 기관총을 장착한 장갑차가 요새화된 그린존(바그다드 내 미군 특별경계구역)에서 나오고, 황색 미군 험비트럭과 또 다른 장갑차가 뒤를 따른다. 그 후 빠르게 지나가는 호위 행렬의 가운데에 똑같은 방탄차량 6개가 있다. 말리키 총리는 그 중 한 대에 타고 있다.

바그다드에서는 아무리 철통같은 호위를 해도 과하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라크 총리는 그가 속한 다와당(堂) 당사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당사는 그린존에서 반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수백명의 경비대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마치 적진에라도 들어가는 것 같다.
▲ 점령이 계속되도 삶은 계속된다. ⓒ로이터=뉴시스

국가로서의 이라크는 없어졌다

5년간의 점령은 국가로서의 이라크를 파괴했다. 오늘의 바그다드는 높은 콘크리트 담장으로 갈라진 수니파와 시아파 거주지(ghetto)들이 그냥 묶여 있는 도시다. 각 지역에서는 심지어 국기조차 다른 걸 쓴다. 수니 지역에서는 바트당을 상징하는 세 개의 별이 그려진 과거의 이라크 국기를 쓴다. 그러나 시아파들은 시아파와 쿠르드족이 구성한 정부가 새로 만든 국기를 쓴다. 쿠르드는 원래 자신들의 국기를 따로 가지고 있다.

정부는 이라크가 정상국가가 됐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이라크 언론인들은 여전히 계속되는 폭력상황을 쓸 수가 없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 인근의 카라다 지역에서 폭탄이 터져 70명의 주민들이 사망했을 때에도 경찰은 방송국 카메라멘을 때리고 쫓아냈다. 2006년 11월부터 2007년 8월까지 하루 평균 65명에 달하던 민간인 사망자 수는 지난 2월 26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사망률이 줄어든 것은 종파별 거주지 정리라는 무자비한 작업이 끝났기 때문이다. 이제 바그다드에는 종파간 혼합 거주 지역이 거의 없다.

이라크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라크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라크 사람들 스스로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에게는 시아파냐, 수니파냐, 쿠르드족이냐 하는 자신들의 집단에 대한 지식만 있지 이라크 내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가 사담 후세인 정부를 전복시키겠다고 결정했을 때, 그 전쟁은 1991년 부시의 아버지가 했떤 전쟁과는 매우 다를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어야 했다. 91년 걸프전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를 쿠웨이트 영토 밖으로 쫓아내는 데에만 초점을 둔 보수적인 전쟁이었다.

그러나 2003년 전쟁은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사담 후세인을 몰락시키고 선거를 하면 이라크는 인구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수니파가 아니라 쿠르드족과 연합한 다수파인 시아파에 의해 지배되게 되어 있었다. 이란과 연계된 시아파 정당들이 기게 되어 있었고 실제 2005년 있었던 두 번의 선거에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 미국은 후세인 몰락 후 남겨진 권력 공백기를 파고 든 무크타다 알 사드르 같은 반미 시아파 지도자들과 이란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면서 힘든 상황에 빠졌다.

제국주의적 오만함에 사로잡혔던 미국인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그들이 승리했다는 전쟁의 실체를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과 동맹국의 군대는 이라크 군대가 싸움을 포기했기 때문에 바그다드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후세인과 같은 부족 출신으로 꾸려진 정예 부대 요원들도 도망쳤다.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으로 전장을 묘사한 언론 보도는 사실과 매우 달랐다. 후세인에 복종했던 병사들이 총 한 방 쏘지 않고 체포되던 당시 나는 북부 도시인 모술과 키르쿠크에 가고 있었다. 바그다드 외곽에는 불타버린 이라크군 탱크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어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 탱크들의 대부분은 탱크 조종사들에 의해 그냥 버려진 것들이었다.

전쟁은 너무 쉬워보였다. 미국 사람들은 이라크 사람들이 뭘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건 문제될 게 없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갖게 됐다. 전쟁에서 패했다고 생각하는 이라크 사람들은 거의 없었지만, 미군들은 이라크인들이 1945년 패전 이후의 독일인들이나 일본인들처럼 행동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 후 이라크 군대를 해산시킨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누가 저질렀느냐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인들은 제국주의적인 오만함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라크 사람들이 군대 안에서나 밖에서 무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반(反) 후세인 리더였던 아흐메드 탈라비는 "미국인들은 우리가 (보통의) 중동 사람들인 걸로 생각했다"라며 "우리를 신경쓰지 않았다"라고 분해했다.

바그다드 함락 이후 몇 개월 동안 미국의 '승리자'들은 19세기 인도를 지배하며 가장 강력한 힘을 휘둘렀던 영국인들과 놀랍게도 똑같이 행동했다. 영국의 인도 지배 방식(the Raj)이 부활한 것이다. 바그다드 증권시장에서 일하는 한 친구는 24살 먹은 한 미국인 청년이 이라크 증권시장을 관리하면서 그곳에 있는 이라크인 증권브로커들에게 민주주의의 미덕에 대해 설교하던 장면에 대해 얘기해 줬다. 그 증권거래인들은 대부분 여러 언어를 구사할 줄 알고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고개를 들었던 또 하나의 착각이 있었다. 대부분의 이라크인들은 사담 후세인이 제거된 것에 기뻐했다. 후세인은 잔인했고,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무능한 지도자였다. 모든 쿠르드족 사람들과 대부분의 시아파들은 그가 없어지길 바랐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라크 사람들이 외국군의 점령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부시와 토니 블레어는 바트당 정권을 전복시키려면 점령군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달랐다. 점령 사령부에 있는 이들은 "우리가 떠나면 이라크는 무정부상태가 될 것"이라며 점령을 정당화했다. 그렇게 그들은 이라크에 머물렀지만 무정부상태는 왔다.
▲ 과거 수니파 저항세력의 무장요원들은 '요주의 시민'이란 이름으로 월급을 받으며 수니파 지역 치안을 책임지고 있다. 사진 오른쪽 총을 든 이들이 '요주의 시민'들 ⓒ로이터=뉴시스

수니파가 미군과 결탁한 이유는?

바그다드에서 미국 군인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을 때마다 나는 그곳으로 즉시 달려갔었다. 그곳에서는 연기가 가시지 않은 험비트럭 잔해나 길가에 묻어 있는 핏자국 옆에서 환호하는 이라크인들을 언제나 볼 수 있었다. 한 군인을 사살한 이는 "나는 비록 가난하지만 우리 가족들은 저 겁쟁이들을 요리한 것에 기뻐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과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이라크 저항세력은 '구체제의 패잔병들'이자 "막다른 골목에 몰린 자들"이라고 말하던 때였다.

이라크인들 안에서도 착각은 있었다. 자신들의 분열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몰랐던 것이다. 수니파들은 내가 시아파와 수니파의 차이를 과장한다고 비난하곤 했다. 그러나 내가 유명한 시아파 지도자들을 언급하자 수니파들은 손사래를 치며 "그들은 모두 이란 사람들이거나 이란사람들한테 매수됐다"라고 비난했다. 이라크에 있는 알카에다는 시아파들을 미국인들과 똑같이 죽여야 할 이교도로 보았다. 대규모 자폭테러는 시아파들이 밀집된 시장터나 종교행사에서 일어나 수백명을 학살했다. 시아파들은 민병대나 저격부대, 경찰을 동원해 수니파들을 응징했다.

2006년 2월 22일 수니파 게릴라들이 사마라에 있는 시아파 사원을 파괴한 후 종파간 싸움은 전면적인 내전 양상으로 번져갔다. 부시와 블레어는 내전이 아니라고 했지만 어떤 잣대를 들이댄다 해도 그건 분명이 대단히 격렬한 내전이었다. 전기 드릴과 산성 물질을 동원한 고문은 통상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시아파 메흐디 민병대는 바그다드의 75%을 장악했다. 요르단과 시리아로 탈출한 인구는 220만 명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수니파였다.

2006년과 2007년 초 바그다드 전투에서 수니파가 패배한 뒤 많은 게릴라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미군과 결탁했다. 과거에는 반미파였던 그들은 미국, 알카에다, 이라크군경, 메흐디민병대라는 4대 적과 동시에 싸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에 따라 이라크에는 현재 미국과 결탁해 미국으로부터 돈을 받는 강력한 수니파 민명대원이 8만명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라크 정부에 대해서는 적대적이다. 미국군과 영국군이 이라크에 들어온지 5년이 지난 지금 이라크는 지리적인 의미만 가진 나라가 됐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