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지난 70년대 아르헨티나 군정 통치시절에는 어린아이들의 입양이 마치 거리에서 자동차를 훔쳐다가 서류를 조작해서 판매하는 것처럼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생부 생모들의 의사가 무시된 채 전리품처럼 빼앗긴 어린아이들이 필요한 가정에 물건처럼 공급이 된 것이다. 나 역시 그런 피해자 가운데 하나였다."
이 말은 지난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지속된 아르헨티나 군사정권 당시 한 정치범의 아이로 태어나 강제로 입양된 뒤 23년 만에 자신의 혈통을 되찾은 마리아 에우헤니아 삼빠죠 바라간(30)이 자신을 입양해다 키운 양부모를 처벌해달라고 고발하면서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의 일부다.
7년 동안이나 좌파정치인들과 페론주의자 소탕이라는 명목으로 벌인 이른바 '더러운 전쟁'으로 인해 3만 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들이 실종 혹은 살해되었고, 이들 중 임신 상태에서 납치된 임산부들의 숫자만도 5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르헨 군정 당시 군인들 가운데는 자식을 입양하거나 어린아이들을 빼앗아다 파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지나가는 임산부를 납치해 아이들은 양자로 팔고 산모는 감옥에 처넣는 천인공로할 범죄를 아무 거리낌 없이 공공연하게 저질렀다.
피는 물보다 진한가
군정기간 동안 이렇게 입양되어 양부모를 친부모로 여기며 살아오던 피해자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은 건 바라간 외에도 60여명이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군정피해자들은 HIJOS(침묵 속에 잊혀진 아이들의 정의회복과 신원확인을 위한 모임)라는 협회를 조직하고 상호 친목을 다지고 있다. 또한 같은 처지에 있는 젊은이들의 뿌리 찾기를 주도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대다수는 바라간처럼 양부모를 처벌해달라고 고발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생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정도 크지만 키워준 부모에 대한 정 역시 포기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존재하더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를 이렇게 훌륭하게 키워준 은공을 생각해서 악감정은 버리자, 그리고 과거는 모두 잊자'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생모의 가족을 찾은 뒤에는 대다수가 자신을 키워준 양부모들과 관계를 끊고 생모와 생부의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피는 물보다 더 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필자가 5월의 광장의 할머니회와 HIJOS, CELS 등 군정 관련 민간 인권단체 간부들과의 인터뷰 중에서 밝혀낸 것이다.
그런데 무려 23년 동안이나 자신을 키워준 양부모를 아동납치범으로 처벌해 달라고 법정에 호소한 마리아 에우헤니아 바라간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었을까?
군부가 테러 제거와 좌익분자 청산이라는 기치 아래 인간사냥을 벌이던 1977년 바라간의 생모였던 미르따 마벨 바라간은 산업중장비 정밀부품을 생산하는 SIAP 라는 회사의 종업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진 공산당 간부직을 맡고 있어서 군부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녀의 생부인 레오나르도 루벤 삼빠죠는 조선소 근로자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정치활동을 하는 것보다 부인의 활동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들 부부는 3살 난 아들을 하나 두고 있었고 미르따 바라간은 두 번째 아이를 기다리는 임신 6개월의 몸이었다.
이들 부부가 정치적인 이유로 긴급 납치가 된 건 1977년 12월이었다. 이들은 이후 주소지 불명의 비밀감옥에 수용되었고 1978년 2월 8일 미르따는 군 병원으로 이송되어 딸을 낳게 된다.
이때 낳은 딸은 군 병원에서 길러졌지만 이들 부부는 다시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어진 후 곧바로 실종됐다. 친부모가 실종돼 사망한지도 모른 채 기구하게 태어난 마리아 바라간은 2~3개월을 군 병원에서 보낸 후 엔리케 호세 베르띠에르라는 육군대위의 손에 넘겨져 당시 중산층이었던 오스발도 리바스라는 가정으로 팔려나갔다.
양부모 손에서 길러진 바라간은 10살이 채 되기도 전에 자신이 리바스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챈다. 지나치게 다른 외모와 성격,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이질감등이 자신은 입양됐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것이다.
이웃사람들로부터 자신이 입양된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라간은 주위의 도움을 받아 5월의 광장 할머니회에 자신의 신원확인을 의뢰하기에 이른다. 그때가 1989년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군정의 피해자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DNA 유전자은행이 지금처럼 현대화 돼있지 않아 바라간의 생모 생부의 유전자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바라간이 친부모 확인에 나섰다는 것을 눈치챈 양부모는 자신들이 바라간을 입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지만 너는 시골농부의 딸이었는데 그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으니 친부모를 찾는 일을 그만두라"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바라간의 친부모 찾기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2001년 5월의 광장할머니회로부터 바라간의 유전자 확인 의뢰서를 받은 CONADI(신원확인을 위한 국가위원회)는 바라간의 친부모 유전자를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5월의 광장 할머니회는 바라간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고 바라간의 친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물론 오빠와 삼촌 등 그녀의 혈육들과 상면을 주선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해서 뿌리를 되찾은 바라간은 생모와 생부의 실종사건에 관련된 자들을 아동납치범으로 고발하기에 이른다. 바라간의 양부모와 어린 바라간을 이들에게 판 엔리케 호세 베르띠에르는 중형을 면치 못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에 대한 최종 판결은 오는 4월 4일에 있을 예정이다.
한편 아르헨티나 군정의 과거사 청산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5월의 광장의 할머니회(Abuelas de plaza de Mayo)라는 민간단체다. 이 단체는 군정 당시 체포된 피해자들이 수감 중에 낳은 아이들의 뿌리를 찾아주기 위해 1977년에 결성된 단체다.
5월의 광장의 할머니회를 이끌고 있는 에스뗄라 까를로또 회장은 군인들에게 자신의 딸과 사위를 동시에 잃은 피해자다. 까를로또 회장은 자신의 딸이 체포될 당시 임신을 한 상태였고 나중에 감옥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까르로또 회장이 5월의 광장의 할머니회를 조직하게 된 동기는 딸과 사위는 포기를 하더라도 손자만큼은 꼭 찾아내겠다는 굳은 결심 때문이었다.
범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활동중이던 할머니회의 노력을 인정한 정부는 CONADI(군정 당시 실종자 신원확인을 위한 국가위원회)를 설립하여 이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게 된다. CONADI와 할머니회의 노력으로 3만 명 이상에 달하는 피해자가족들의 DNA 은행을 설립할 수 있었다. 또한 군정 당시 군인들이 벌인 더러운 전쟁 관련수사기록 등 공식문서들도 보관하는 기록보관소도 함께 설립하게 된다.
이때부터 오월의 광장 할머니들은 본격적으로 민간단체들과 언론들을 상대로 잃어버린 손자들 찾기 홍보에 주력한다. 현재 부모 형제들과 외형적으로 너무 차이가 나거나 자신의 정체성에 의심이 나는 젊은이들은 한번 자신의 신원을 확인해 보라고 홍보하는 것이다.
까를로또 회장은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심지어는 음악공연장이나 디스코 장에서까지 "너희들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이 들면 지체 없이 5월의 광장 할머니회를 찾아오라"고 호소할 정도다.
할머니회의 이런 노력의 결과로 60여명 이상이 자신들의 뿌리를 찾았다. 그러나 자신들을 강제로 입양해 키워준 양부모를 고발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날 추세여서 30여 년 전 군인들이 남긴 역사의 깊은 상처는 아물지 않고 지속적으로 아르헨티노들을 괴롭힐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