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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의 즉위, '이명박'의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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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의 즉위, '이명박'의 취임

[TV와 수다] 권선징악이 그리워질 때

어머니는 말하셨다. 착하게 살라고. 거짓말 하지 말고, 부당한 방법으로 돈 벌지 말고, 잘난 사람 시기하지 말고, 너보다 어려운 사람 무시하지 말라고. 그렇게 착하게 살아야 벌 받지 않는다 말하셨다. 나쁜 사람은 언젠가 꼭 벌을 받는 법이라며.

어머니 말씀을 믿었던 적이 있었다. 그 순수의 시대에 나는 갖은 설움을 당하는 콩쥐가 행복해지는 이야기에 감명 받았고,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사악한 페르낭을 죽음에 이르게 했을 때 통쾌함에 몸을 떨었다. 그렇게 악한 사람은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꼭 행복해지는 권선징악의 세계에서 고민은 없었다. 하지만 세상 풍파에 찌들대로 찌든 지금의 나를 돌아보니, 권선징악은 사기라는, 그런 냉소만이 남아있더라.

<이산>이 불러내는 권선징악의 세계

그런 나에게 <이산>은 잊었던 권선징악의 세계를 불러낸다. 이병훈 PD의 전작, <허준>이나 <대장금>이 그랬던 것처럼 <이산>은 선을 권하고 악을 벌하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 이 드라마는 역사 속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윤리적 신념을 가지고 치열하게 경합했던 사람들을 선과 악 두 편으로만 줄 세운다. <이산>을 난생 처음 보는 사람도 이산과 송연이와 대수는 착한 편, 정후겸과 화완옹주와 정순왕후는 나쁜 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분명, 이전 '이병훈표 사극'에서 볼 수 없었던 홍국영이나 최석주 같은 인물이 등장해 선악 가치관에 혼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몇몇 '세련된 장치'를 가지고 <이산>이 현실적인 권력 암투를 다루는 드라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 MBC 드라마 <이산> 속 정조의 즉위식 장면. ⓒMBC

선악이 불분명한 현실의 권력과 다르게 <이산> 속 권력에는 분명한 구분선이 있다. 이산과 조력자들은 오로지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착한 권력'을 추구하나, 정순왕후와 노론의 중신들은 단지 자신들의 권세를 유지하고 죄를 덮기 위한 '악한 권력'을 좇는다.

이 편리한 구분만큼 <이산>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다섯 달 50여회에 가까운 방영 기간 동안 <이산>은 결국 '착한 편'이 '나쁜 편'의 해코지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수십 가지 이야기로 보여주었을 뿐이다. 머리를 쓰고 몸을 쓰고, 때로는 쓰러진 영조를 깨우는 초현실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등 대처방법이 다를 뿐, 나쁜 놈들이 만들어낸 위기를 헤쳐 착한 편이 오해를 풀고 죽음을 모면하는 이야기 구조는 변함이 없다.

거기에 이 드라마 속 권선징악의 정점은 '착한 왕' 이산이다. <대장금>이 궁중 안 '전문직 여성들'의 역동적인 삶과 욕망을 드러내는 '진보적 사극'의 모범을 제시했던 것과 달리, <이산>은 왕의 이야기로 뒷걸음질 한다. 이 왕의 드라마에서 민초들의 삶이란 없다. 그들은 극 중 인물들의 선과 악을 가르는 편리한 수단일 뿐이다. 능력이 뛰어나지만 서얼이라는 신분 때문에 뜻을 펴지 못하는 박제가 같은 '시대불운형' 인물이나 역모를 도모한 중신들에게 손가락질 하지만 또 그 시선이 두려워 몸을 숨기는 박달호 같은 '소시민형' 인물들을 누가 더 '긍휼히 여기느냐'에 따라 주인공과 악역이 나뉘는 정도다. 그들을 진심으로 어여삐 여기는 이산은 착하지만, 그들을 단지 '모반의 선동 도구' 정도로 이용하는 정후겸은 나쁘다. 이처럼 <이산> 속 민초들은 주인공의 '선'을 보장하기 위해 박제화 된다.

그래도 <이산>은 '정의'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산>은 '나쁜' 드라마인가. 분명 '권선징악 이데올로기'는 허점투성이다. 세상에는 온전히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은 없으며 선과 악을 나누는 것도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르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물' 홍국영이 '권력을 놓지 않는 세도가'가 되는 건 한 순간이다. 그만큼 인간은 다채로운 욕망을 지닌 복잡한 존재이다. 그런 인간과 인간 사회를 단순 이분법으로 나누는 권선징악은 비현실적이다. 게다가 권선징악은 나쁜 놈들이 희희낙락 수천억씩 빼돌리며 '말하고 놀고 사랑하라(talk play love)'고 가식을 떠는 그런 세상을 숨긴다. 나쁜 놈들이 힘 들이지 않고 잘 먹고 잘 살 때, 착한 사람들만 세상이 언젠가 "사람을 향하게 될 것"이라 믿으며 고통을 감내하게 만든다. 그러니 온갖 욕망을 지닌 인간을 쉽게 단순화하고 권선징악이라는 '사기술'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이산>은 나쁜 드라마인가.

하지만 마침내 이산이 왕위에 오를 때,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그간의 온갖 설움을 다 담아 기염을 토할 때,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인다. 또 한 번의 암살 위기를 넘긴 후, 정후겸과 김귀주를 잡아 죄를 묻고, 홍국영이 정순왕후에게 "발칙한 표정"과 함께 "역당의 수장" 운운 하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짜릿함과 카타르시스는, 이것의 정체는 또 무엇인가.

그것은 <이산>에 희망과 정의가 있기 때문이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남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들은 언젠가 행복해질 거라는 희망이 있고, 권력을 탐하고 민초들 등골 뽑아 자기 배만 불리는 인간들은 '꼭' 처벌되는 정의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산>을 사랑한다. 권선징악이 분명 '나쁜 이데올로기'일지라도, 좋은 일 하면 행복해지고 나쁜 짓 하면 불행해지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니까. 거기에 일주일에 두 번씩 사리사욕을 좇지 않고 오직 백성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애쓰는 이산 같은 '비현실적' 인물을 볼 수 있는데, 불만 가질 이유 따위 없다.

권선징악이 그리울 때

어디서든 '새 출발'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 <이산>을 보며 정조의 즉위식에 기뻐한 이유 중 하나는, 드라마 속에서 '착한' 이산이 만들어낼 새로운 사회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우리는 분명 앞으로의 <이산>을 통해 서얼을 등용하고 균등한 상업 활동을 보장하며 백성의 어려운 일에 귀 기울이는 새 세상에 대한 청사진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이 청사진을 방해하는 몇몇 저항들이 나오겠지만, 홍국영이라는 가장 매력적 인물의 배신을 보는 가슴 아픈 순간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병훈표 사극의 특성상,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착한 권력' 이산은 또 이겨낼 테니 말이다.
▲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 내외. ⓒ뉴시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현실의 취임식에는 마냥 기뻐할 수가 없다. 그건 이곳이 선을 권하고 악을 벌하는 '안전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일 테다. 게다가 취임 전 '이산' 흉내를 낼 법한 시기에도 '민초'들에게는 관심도 없는 듯 '세도가'들만 줄줄이 뽑아 올리는 '드라마 바깥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위험하며 정의롭지도 않다.

게다가 현실에는 해피엔딩도 없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현실은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70부작 역사 드라마가 아니다. 앞으로의 5년으로 끝이 아니라, 이 5년이 남은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게 틀림없다.

이럴 때는 정말, 드라마 속 권선징악의 단순한 세계가 그리워진다. 그런 믿음 혹은 두려움이라도 있다면, 세상 무서운 줄 아는 일말의 '지성'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적어도 어떻게 모았는지 모르는 수십, 수백억 재산을 가진 사람들을 "돈 많은 게 죄냐"고 편들며 들이밀지 않을 테고, 많은 사람들이 경고하는 '끔찍한 재앙(들)'을 막무가내로 추진하지는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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