止는 '발'이라는 본뜻에서 벗어나 '가다'로, 다시 '멈추다'로 거듭 변신해 지금의 뜻이 됐다. 止가 팽개친 본뜻을 위해 새로 만든 형성자가 '발' '발자국'의 뜻인 趾(지)다. 그러나 趾는 足에 밀려 활약할 기회를 좀체 얻지 못했고, 지금 우리에게 '발'의 뜻으로 가장 친숙한 글자는 역시 足이다.
발을 나타내는 글자로는 또 疋(소)가 있다. 무릎부터 발끝까지를 함께 그린 것이라고 한다. 윗부분 一은 본래 둥그스름한 모습이어서 무릎이고, 그 아래는 정강이와 발이라는 것이다. 이 글자는 匹(필)의 다른 형태라 해서 보통 '필'로 읽는데, 엄밀히 말해서 이는 잘못된 관습이다. 匹과 글자 모양이 비슷해 헛갈린 것이겠다.
止와 疋가 모두 발 또는 그 윗부분까지를 그린 상형자라면 足은 무얼까? 역시 발을 그린 것이라고 하니, 疋와 구분하기가 어려워진다. 疋도 一 부분이 원래 둥그런 모습이었다면 足과 별개의 글자라고 보기 어렵다. 足의 옛 모습으로 분류된 어떤 글자꼴(<그림 3>)은 바로 疋의 상형 설명과 부합한다.
足과 疋의 발음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다. 초성 ㅅ/ㅈ은 같은 계통이고, 받침 부분에서 ㄱ이 있고 없고의 차이며 그것은 발음의 강약 차이에 불과하다. 결국 足과 疋는 같은 글자인데 口 부분이 一로 간략화된 글자꼴을 별개의 글자로 보아 두 가지 음으로 전해진 것이겠다. 그러나 足=疋가 무릎 아래를 그린 것이라는 상형설은 믿기 어렵다. <그림 3> 같은 모습이 그 근거로 제시되고 있는 듯한데, 이는 口 부분을 길게 늘여 '다리' 같은 의미에 부합하도록 꾸민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런 식의 기괴한 상형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足의 口 부분이 一로 간략화돼 疋가 됐다면, 正(정)자와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疋의 아랫부분도 止의 변형이니 正과 疋는 같은 구조의 글자다. 正의 발음을 이어받은 定(정)·旋(선)·蛋(단) 등에 疋자가 들어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발음기호여서 疋보다는 正의 변형으로 봐야 한다. 正 역시 본래는 一 부분이 口 형태였다가(<그림 5>) 나중에 一로 간략화된 것이다. 足=疋=正의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正은 다른 나라(囗)를 정벌하러 가는(止) 것을 나타낸 글자라고 한다. '치다'인 征(정)의 본래 글자라는 것이다. 회의자식 설명이지만, 회의자에 대해 懷疑的(회의적)인 필자의 입장에서는 囗(성/정)이 발음기호 역할을 겸하는 회의 겸 형성자로 본다. 어쩌면 囗이 의미에 참여하지 않는 단순 형성자일 수도 있다.
그럼 足=疋은 어떨까? 상형을 부정한다면 합성자일 수밖에 없고, 그 경우 아랫부분은 止, 윗부분은 口 또는 一이다. 一이 의미나 발음 측면에서 기여했을 가능성이 없다고 보면 口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口+止'다. 그 가운데 止는 의미 요소일 가능성이 높다. 口는 囗으로 보더라도 의미와 연결시키기 어렵다.
다시 正으로 가보자. 正이 다른 나라를 정벌하러 '가다'인데, 足의 변두리 의미로 '가다'가 있다. 의미상 통하고 모양이 똑같다. 발음은 받침이 ㅇ/ㄱ으로 조금 다른데, 발음의 변화인지 두 가지 발음이 섞여 있다가 하나씩만 남은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한자 발음에서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다.
결국 足=疋는 正의 변형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足의 옛 모습(<그림 4>)과 正의 옛 모습(<그림 6>)은 구분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무릎 아래의 상형이라는 足 또는 疋의 상형설도 미덥지 않다. 발음과 의미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확신'은 어렵지만, 그래도 가장 무리가 덜한 것이 正=足의 형성자 가능성이다. 윗부분 口=囗이 점을 거쳐 一로 간략화되면서 의미를 쪼개 正과 足의 두 글자로 분리됐고, 疋는 한 발(모양)은 正 쪽에, 다른 발(의미)은 足 쪽에 걸친 어정쩡한 상태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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