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규제책의 신기원을 열었다는 유럽연합(EU)의 강력한 화학물질관리제도가 시행 3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이 제도 주무부처인 핀란드 헬싱키에 있는 ECHA(유럽화학물질청)은 '리치'(REACH)로 불리는 신화학물질관리제도에 대해 "등록하지 않으면 더 이상 시장도 없다"는 말로 요약한다.
EU가 생산하거나 수입하는 모든 화학물질 포함 제품은 ECHA에 등록한 뒤 유해성 여부를 평가받아 인증받는 절차를 밟지 않으면 EU 시장에서 퇴출된다는 것이다. '리치'라는 용어 자체가 'Registration(등록), Evaluation(평가), Authorization(인증)&Restriction(제한) of Chemicals(화학물질)'의 약자다.
관련법안은 이미 지난해 6월 발효됐지만 1년 간 유예기간을 거쳐 오는 6월1일 사전등록 절차가 시작된다. 올해 11월 30일까지 기한 내 사전등록된 화학물질에 한해 중량과 위해성 여부에 따라 본등록이라는 또다른 일정을 밟아 10년 뒤인 2018년 5월까지 유지 혹은 퇴출 여부가 결정된다.
완제품 내의 화학물질까지 등록 대상
리치가 이전의 제도들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화학물질의 위해성 검증 책임을 국가가 아니라 수입자와 제조자 등 기업체에 지우고 있으며 적용 대상이 신규 물질 뿐 아니라 기존 물질, 그리고 완제품 내의 화학물질에까지 광범위하다는 사실이다. 즉 기업이 비용을 내서 유통되는 거의 모든 화학물질의 정보를 모으고 시험을 통해 위해성을 가려내는 것이다.
이에 따라 흔히 화학물질이라고 부르는 것들 이외에도 볼펜에서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 장난감, 비누, 휴대전화 등 제품에 포함된 화학물질도 규제 대상이 된다. 만약 어떤 상태의 물질이든 인체 건강이나 환경에 허용할 수 없는 위해성이 있다고 판단된다면 '제한'(Restriction)물질로 지정돼 사용이 전면 금지된다. ECHA는 내년 6월 제한물질목록을 발표할 예정이다.
화학물질 자체로나, 혼합물이거나, 아니면 제품에 포함돼 있거나 EU에 수입 혹은 제조되는 화학물질(EU 내 단일 수입·제조사 기준)의 양이 연간 1t 이상이면 등록 대상이 되기 때문에 ECHA가 예상하고 있는 등록 물질의 건수만 해도 3만여 종에 이른다.
EU가 중국에 이어 2번째로 큰 한국의 수출 지역이라는 사실도 리치가 국내 산업계에 미치는 파급력을 짐작케 하고 있다. 2006년 기준으로 한국의 EU 수출액은 492억 달러로 미국(432억 달러)을 앞질렀다.
ECHA에 등록·신고하는 데 드는 수수료도 만만치 않다. 물질 건당 최소 480유로(약 67만 4000원)에서 최고 3만1000유로(약 4350만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며, 허가 신청 수수료 역시 5000~5만 유로(약 700만-7000만 원)에 책정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환경부는 국내 산업계에 소요되는 비용이 최소 9590억 원, 최대 1조913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이제는 기업들도 신화학물질관리제도를 규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친환경적으로 안전한 제품을 만들어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내 600여 개 업체, 사전등록 대상 기업
환경부 REACH대응추진기획단이 추정하고 있는 국내의 사전등록 대상 기업은 EU 수출 업체 1만 5000개 회사 중 600여 개다. 기획단은 기업들 사이에 대응 정도와 문제 인식 수준에서 심각한 차이가 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어 주로 영세 수출업체들을 대상으로 사전 등록 준비를 독려하고 있다. ECHA는 사전등록 기간에 전 세계적으로 18만여 개사가 참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사전등록 의무를 가지는 대상자는 연간 제조량 혹은 수입량이 1t 이상인 제조자 혹은 수입자다. 여기서 수입량은 한국 같은 역외 국가의 기업체가 수출하는 양과 상관 없이 EU 역내에서 제조되거나 수입되는 양의 총합을 기준으로 한다.
사전등록에는 화학물질과 이 물질의 혼합물이 대상이 되며 완제품 중 특히 향기나는 초의 방향물질이나 향기나는 종이의 방향물질 처럼 '의도적'으로 화학물질을 배출하는 경우 사전등록 대상에 포함된다.
사전등록에서는 물질명과 등록예정자 및 담당자, 예상등록시한 등 기본적인 정보만 제출하면 되며 등록비도 무료여서 기업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만약 등록자가 자신이 수입 혹은 수출하는 물질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다면 준비 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EU 역내의 수입자와 역외의 수출자 중 누가 사전등록을 할지 여부는 주고받는 물질을 둘러싼 양측의 역학 관계가 작용한다. 즉, 해당 물질이 수출자가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것이라면 물질을 구하기 쉽지 않은 수입자가 비용을 부담하기 마련이지만 반대로 다른 회사에서도 쉽게 구할 만한 흔한 물질이라면 수출자가 비용을 부담하고 등록 절차를 밟게 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국내 화학물질 규제 수준은 선진국 기준에 크게 못미치는 실정이다. 환경부에 따르면 국내에서 유통되는 신·구 화학물질은 '유해화학물질 관리법'에 의해 규제되고 있다. 법률에 따르면 신물질은 유해성(물질 자체가 유해한지 여부) 검사를 거친 뒤 유해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유독물' 혹은 '관찰물질'로 분류된다.
하지만 유해성을 심사하는 항목이 적어서 매년 유독물질이나 관찰물질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유독물이나 관찰물질로 분류가 된다고 해도 바로 사용이 금지되거나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유해성을 심사하는 항목도 유전독성, 녹는점, 끓는 점 등 기본적인 항목 6개 뿐이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수준의 13개 항목에 크게 뒤쳐진다.
국내 화학물질규제 느슨, 위해성 심사퇴출 사례 전무
유독물 혹은 관찰물질로 분류된 신물질 중 만약 어떤 물질이 건강이나 환경에 위해성(노출 상황에 따라 피해를 주는지 여부)이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면 위해성 심사를 실시하게 된다. 만약 위해성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그때서야 취급제한 물질 혹은 금지물질로 지정돼 '퇴출'된다.
문제는 이렇게 규제의 강도가 느슨하면서도 위해물질 심사의 강도도 그다지 세지 않다는 데 있다. 위해성 심사는 2004년 관련 규정이 개정돼 처음 도입됐는데 이 심사를 통해 화학물질이 '퇴출'된 경우는 전무한 상태다.
만약 신물질이 개발되거나 수입되더라도 눈에 띄는 위해성이 없다면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고 시중에 버젓이 유통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특히나 완제품의 경우에는 적용할 법률조차 거의 없는 상태여서 한국은 유럽의 경우와 비교하면 화학물질 규제의 '무풍지대'나 다름이 없는 상태다.
미국은 최근 각 주별로 유해물질 규제 정책을 발효했으며, 일본 역시 지난해 7월부터 '전기·전자기기 화학물질 표시방법'(J-MOSS)을 도입했다. 중국 역시 EU의 환경규제인 '폐전자제품처리지침'(WEEE)과 '유해물질사용제한지침'(RoHS)을 그대로 따다가 자국 내에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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