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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은)/段(단)/辰(진)/彦(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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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은)/段(단)/辰(진)/彦(언)

[한자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14>

殷(은)은 '크다'의 뜻이지만 '殷盛(은성)하다' 같은 용례조차도 이미 낯설고, 그저 중국의 옛 나라이름으로만 우리에게 다가올 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갑골문이라는 귀중한 자료를 남겨준 商(상)나라의 또 다른 이름이니, 한자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넘길 수 없는 글자다.

殷자의 오른쪽 殳(수)는 보통 '갖은등글월문'이라 불리는 부수자의 하나다. 또 다른 부수자 攵=攴(복)이 文(문)자의 아류여서 '등글월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殳는 아류의 아류인 셈이다. 왼쪽은 <설문해자>에서 별개의 글자로 봤지만 身(신)자를 뒤집은 모습에 불과해 身자로 봐야 한다. 殷은 '身+殳'의 구조다(<그림 1>).

그러나 보통은 상형적인 설명들이다. 침 같은 도구로 불룩한 배를 찌르는 모습이어서 병을 치료하는 것을 나타낸 글자라고도 하고, 몽둥이로 임신한 여자를 때리는 주술 행위를 나타냈다고도 한다. 모두 근거가 박약한 추측들일 뿐이다.

어떤 '장면'을 그렸다는 상형적 설명은 믿기 어렵다. 상형은 한 가지 사물을 그린 것으로 한정해야지, 여러 사물을 한 화폭에 넣고 그렸다는 얘기는 후대 학자들의 꿰맞추기다. 殷은 두 요소로 분명하게 나누어지는 만큼, 합성자로 봐야 한다. 殳가 의미 요소, 身이 발음기호인 형성자겠다. 殷의 발음은 身의 뿌리인 人(인)에 더 가깝다.

이 殷의 다른 모습이 段(단)이다. 오른쪽의 殳가 공통임은 한눈에 알 수 있고, 왼쪽은 殷의 왼쪽과 매우 비슷하다. 殷의 왼쪽 아래 구부러진 획은 <그림 1>만 보아도 段의 왼쪽 맨 아래 一과 같은 요소임이 확인되고, 두 글자의 차이라 해봐야 왼쪽 중간의 ヨ 부분이 二로 간단해진 정도다. 발음 역시 초기 한자에서 초성 ㄷ/ㅈ이 구분되지 않았고 ㅈ과 ㅅ이 매우 가까운 발음이니 같은 발음이었다고 볼 수 있다. 몇백 년 전만 해도 天(천)의 우리말 표기가 '텬'이었단 사실이나, 특정 상황에서 ㄷ/ㅌ이 ㅈ/ㅊ으로 바뀌는 구개음화 현상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러나 보통은 段 역시 별도의 상형으로 설명된다. 망치로 벼랑의 돌을 때리는 모습이라 해서 '때리다' '깨뜨리다'의 뜻이라는 것이다. 모양이 아주 단순화된 <그림 2> 같은 글자꼴을 보고 짜낸 설명이지만, <그림 3> 같은 글자꼴은 殷자와 훨씬 비슷하다. 언덕(厂)에 인공(殳)을 가해 계단을 만드는 것을 나타냈다는 회의자식 설명도 있지만 역시 미덥지 않다.

옛 모습과 발음이 일치하는 두 글자는 같은 글자였던 것으로 봐야 한다. 의미 역시 殷은 '많다' '크다' 등이, 段은 '조각' '가지' 등이 주요 의미인데, 이들의 공통분모를 추적해 보면 '나누다'라는 뜻에서 두 갈래로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殳는 손 동작을 나타내는 의미 요소니 이런 분석은 충분한 타당성을 지닌다. 두 글자의 모양, 발음, 의미가 모두 통하는데, 단순한 추측에 불과한 '망치' 얘기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한자에서 殷과 段의 경우처럼 같은 글자가 모양과 의미를 조금씩 달리해 별개의 글자로 독립한 예는 상당히 많은 듯하다. 한 글자가 여러 개의 글자로 분화한 것은 중국에서 秦(진)나라의 통일 이전에는 통일된 문자생활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일 직전인 전국시대에는 여섯 나라로 나뉘어 있었고, 그 이전에는 더욱 많은 단위로 쪼개져 있었다. 그래서 어떤 지역에서는 殷과 가까운 모양을 '많다' '크다'의 뜻으로 주로 사용하고 또 어떤 지역에서는 段에 가까운 모양을 '나누다' '조각'의 뜻으로 주로 사용했다면, 이 두 지역이 통합됐을 때 殷과 段이 별개의 두 글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殷=段과 같은 글자였던 것으로 보이는 글자는 또 있다. 辰(신/진)은 <그림 2>처럼 단순화된 段의 모습과 연결되는 글자다. <그림 4, 5>에서, 다소 흐트러졌지만 殷=段과 닮은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辰이 농기구로 썼던 조개껍데기를 그린 것이라고 하지만, 조개껍데기와 닮은 구석보다는 殷=段과 닮은 구석이 더 많다.

辰은 우리에게 '진'이라는 독음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이는 간지자로 쓰일 때의 발음이고, '生辰(생신)' '星辰(성신)' 등 일반적인 쓰임에서는 '신' 발음이다. 그 발음은 殷의 발음 뿌리 身과 일치한다. '신'이나 '진'이나 마찬가지긴 하지만 말이다. 중국에서는 辰의 발음이 한 가지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왜 두 가지가 됐을까? 아마도 같은 간지자 申(신)과 똑같은 발음이어서 곤란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甲申과 甲辰이 똑같은 '갑신'으로 읽힌다면 혼란스러웠을 건 당연하고, 이를 피하기 위해 辰은 간지자에서 '진'으로 읽게 된 듯하다.

한편 彦(언)은 윗부분이 본래 文 형태여서 <설문해자>에서는 彣(문)자 중간에 발음기호 厂(한)을 끼워 넣은 것으로 봤고, 彡 부분이 弓(궁) 비슷하게 나타나는 글자꼴에 주목해 문(文)과 무(弓)를 함께 갖춘 사람을 나타냈다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文은 殳의 변형이고 아랫부분은 段의 왼쪽과 같아서 段 등과 같은 글자다. 다만 段은 좌-우 구조인 데 비해 彦은 文=殳가 위로 올라간 상-하 구조일 뿐이며, 이는 옛날 글자의 특성상 별개의 글자로 볼 근거가 되지 못한다. 彦 역시 殷=段=辰의 변형이다.

이 밖에 展(전)은 辰이 다소 복잡한 형태로 남은 것이고 殿(전)의 왼쪽 역시 그 변형으로 보인다. 다만 殿의 오른쪽 殳는 殷·段의 오른쪽 요소와 같은 것으로 왼쪽이 심하게 복잡해진 형태인지, 아니면 展 같은 형태가 왼쪽으로 들어가 조금 간략해지고 거기에 殳를 한 번 더 더해 새로운 글자를 만든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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