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베이컨 게임은 좁고 좁은 인간 사회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여기에 윤리적인 질문을 덧붙이면 촘촘히 연결된 인간 사회의 '책임' 문제까지 나아간다. 밸런타인데이에 <프레시안>에서 벌인 '착한 초콜릿' 캠페인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초콜릿을 사며 의도치 않게 제3세계 어린이들을 착취하는 '연결망(network)'이 도처에 퍼져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굳이 케빈 베이컨 게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네 사회가 생각보다 넓지 않다는 것을 웬만한 사람이라면 '감'으로라도 알 것이다. '저기서' 벌어진 일에 '여기 있는' 사람도 책임이 있는 세상이다. 그러니 항상 이런 말을 마음속에 새길 필요가 있다. "평소에 잘 하자."
'숭례문 화재 게임'
국보 1호 숭례문이 활활 타버렸다. 생뚱맞게 '케빈 베이컨 게임'이니 '평소에 잘 하자'니 뜬금없는 소리를 꺼낸 건, 안전핀 뽑힌 수류탄 마냥 화재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한심한 사람들 때문이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케빈 베이컨 게임'의 6단계 구조를 본떠 '숭례문 화재 게임'을 만들어보자. 규칙은 숭례문 화재 책임과 한국인 한 사람의 관계를 6단계 이내에서 찾아내는 거다. 우선, 자기 자신부터 해보자. 예를 들어, 나는 10일 저녁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경제야 놀자' 오세훈 시장 편을 시청했고(1단계), 방송에 출연한 오세훈 시장은 숭례문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서울시 시장이고(2단계), 전임 서울 시장인 이명박 전(前)시장은 숭례문을 재난 대책 없이 일반에 공개했고(3단계), 이명박 전시장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내 친구 A의 한 표 덕에 당선됐다(4단계). 게임 결과, 절친한 친구 A를 설득하지 못한 나에게도 숭례문 화재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숭례문 화재 게임에서 2단계 이상을 거치지 않고 1단계만으로 끝나는 사람들도 있다. 직접 불을 지른 사람이라든지, 문화재청, 서울시, 중구청에서 문화재 보호 관련으로 일하는 사람이라든지, 문화재 보호에 예산을 배정하는 국회의원이라든지, 기타 등등. 숭례문 관리에 책임이 있는 오세훈 서울 시장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숭례문 화재 발생 2시간 전에 오세훈 시장은 <일요일 일요일 밤에> '경제야 놀자'에서 서울을 '문화 도시'로 만들겠다는 굳은 결의를 천명했다. 하지만 오세훈 시장은 재수가 조금, 아니 많이 없었다. 하필이면 마음먹고 야심차게 방송 탄 날, 숭례문이 불타 무너질 줄이야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3개월 전에 섭외하고 이제야 방송으로 내보낸 MBC가 원망스러울 법도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시장님. 인생, 타이밍인 걸요.
카메라 앞과 뒤의 '이중인격'
정치인의 방송출연은 양날의 칼이다. 잘하면 큰 홍보효과와 더불어 많은 표까지 끌어올 수 있겠으나, 자칫 잘못하면 본전도 못 뽑는다. 대선 후 방송출연을 지나치게 즐기다 꼬리가 잡혀 구속 수감된 경제공화당 허경영 총재가 가장 극적인 사례다. 오세훈 시장도 <경제야 놀자>에 출연하는 바람에 'TV 나올 시간에 문화재 관리에나 신경쓰시죠'라는 기분 나쁜 비아냥을 들으며 본전도 못 뽑았다.
정치인들의 방송출연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이미지 정치'니 '편파적 홍보'니 온갖 비판들이 있지만, 정치는 이미 '이미지' 없이 할 수 없게 된지 오래고, '편파적 홍보'라는 비판은 상대 정당이 아닌 시청자 입에서 먼저 나오는 세상이다. 차라리 정치인들을 '생방송'에 더 자주 출연시켜 편집되지 않은 모습, 날 것 그대로를 드러내는 게 인간 됨됨이를 아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남 자극하는 데 달인인 김구라가 생방송에서 국회의원 몇 명을 살살 자극해, 국회에서 주먹질 하는 본성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하는 것도 왠지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정치인이 방송에 나와 자기를 홍보하든 본성을 드러내든, 그거야 내 알 바 아니다. 안 보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TV에 뻔질나게 출연하다가도 정작 얼굴을 들이밀어야 할 때는 어딘가로 숨어버리는 행태를 보면 화가 치밀 수밖에 없다. 오세훈 시장만 해도 그렇다. <일밤>에는 잘만 출연해 드럼도 치고 공관도 공개하며 쿨한 척 하시더니, 숭례문 화재가 난 다음날 국회 문화관광위가 개최한 긴급 전체회의에는 '선약'을 핑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더 화가 나는 건, 카메라 앞에서는 온갖 '바른 말'을 다 하다가, 카메라 뒤로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치미 뗀다는 점이다. 대국민 담화라는 걸 TV 카메라 앞에서 발표할 때는 시장이 머리 조아리며 "책임을 통감"하고 "앞으로 문화재 복원과 관리에 아낌없이 지원하겠다"고 바른 소리를 하지만, 정작 숭례문 복원 예산 문제가 실무적으로 논의되자 시 관계자가 나서 "숭례문 복원 책임은 전적으로 문화재청에 있으며 이에 필요한 예산부담 역시 정부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카메라 앞과 뒤의 '이중인격', 피곤하지 않으세요?
이런 빈정거림이 싫으면, 말 그대로 평소에 잘 하면 된다. 문화재를 제대로 관리하며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문화 도시 운운 했다면 누가 욕하겠는가. 경보 장치니, 화재 방재 대책이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추어 놓지 않은 상황에 텔레비전에서 근사하게 차려입고 "올해 목표는 문화 도시"라 말만 하니, 결국에는 엄청난 비극과 함께 이중인격이 드러난 것이다. 이건 다 평소에 잘못한 '당연한' 결과니 '타이밍' 탓하지 마시길.
숭례문 화재 게임의 최종 보스
다 타버린 숭례문에 물 뿌리는 격이긴 해도, 뒤늦게나마 책임을 깨닫고 사과한 후 앞으로의 대책을 모색하는 건 분명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숭례문 화재 게임'의 창시자이자 최종 보스라 불러도 손색없는 '그 분'은 책임 따위 관심 없으신 것 같다.
2006년, 이명박 당선인은 문화재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난 대비책 없이 숭례문을 일반에 개방해 성대한 행사까지 개최했다. 분명하게 책임이 있는 사람이 책임을 통감하며 백배 사죄는 못 할망정, 코 묻은 돈을 모아 숭례문을 새로 짓자고 '쇼'를 한다.
서울시장 시절, 지금의 "10분의 1만이라도" 숭례문에 신경을 썼으면 좋았을 것을. 그래도 이번 화재로 '경제'와 별 관련 없는 문화재 소실에 국민들이 "큰 충격"을 받고 "허전한 마음"을 느낀다는 것을 실감했을 테니, 설마, 앞으로 '경제만 살리면 되지' 논리로 숱한 문화재를 수장시키는 짓은 하지 않겠죠? 제발~
어쨌든, 이 당선인이 끝끝내 숭례문 복원을 '국민성금'으로 하고 싶다면 아주 '합리적인' 방법을 알려드리겠다. 숭례문 화재 게임을 해서 단계별로 성금 액수를 정하는 거다. 1단계에 걸리는 사람은 50억, 6단계에 걸리는 사람은 500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모든 오락실 게임의 최종 보스는 반드시 '더블 스코어'를 뿌린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그러니 숭례문 화재 게임의 최종 보스께서는 1단계 액수의 두 배로 성금을 내야 '게임의 규칙'을 거스르지 않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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