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사람'과 '말'이라는 딱 두 가지 힌트만으로 '믿다'의 뜻을 끌어낼 수 있을까? 회의자로 설명되는 대부분의 글자들이 안고 있는 문제다. 信자의 경우 더욱 큰 문제는, 옛 모습 가운데 人 부분이 千(천)이나 身(신)으로 돼 있는 글자꼴도 가끔 있다는 것이다. 이 글자가 회의자라면 그 구성 요소의 하나인 人이 숫자 千이나 '몸'의 뜻인 身으로 바뀌었을 때 전체 의미가 달라져야 한다. 의미가 제각각인 人-千-身을 바꿔 써도 같은 글자라면 그 부분은 발음기호고 人-千-身이 같은 발음이었다는 얘기일 수밖에 없다.
人과 身의 발음 뿌리가 같음은 이미 살펴봤고, 千 역시 身의 현대 중국말 발음이 '선'이니 유사성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信은 의미 요소 言에 발음기호 人을 더한 형성자지만, 발음기호 부분을 같은 발음이었던 千이나 身으로 바꿔 쓰기도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千은 어떻게 만들어진 글자일까? 발음이 人-身과 연결됨은 이미 말했지만, 그것이 人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글자라는 사실은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千자를 다시 한 번 찬찬히 들여다보자(<그림 1>). 중간의 가로획을 뺀 부분이 바로 人의 변형 亻이다. 다시 말해 千은 人에 줄을 하나 그은 글자다. 人보다는 亻이 사람 옆모습을 그린 본래 글자에 가까운데, 千 속의 人은 그런 옛 모습의 반영인 것이다.
千 역시 회의자라는 게 전통적인 설명이다. 사람(人)이 많은 것을 나타냈다는 것인데, 一로 그런 의미를 나타냈다는 건 지나친 의미 부여다. 같은 설명이지만 人과 十(십)을 합친 글자로 十에 '많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도 한다. 획이 겹쳤다는 얘기다. 그러나 꿰맞추기를 위한 상상일 뿐이다.
이런 설명의 허구성은 갑골문에서 숫자를 어떻게 나타냈는지를 살펴 보면 금방 드러난다. <그림 2>를 보자. 亻자에 줄을 세 개 그었다. 3000을 나타낸 글자다. 갑골문에서는 人자에 줄을 하나 그어 1000, 둘 그어 2000을 나타냈다. 4000이나 5000도 人자에 四(사)·五(오)의 옛 모습을 더해 나타냈다. 결국 千에서의 一은 줄 하나다.
그렇다면 千이 人과 一의 회의자라고 할 수 있을까? 一이야 억지로 의미와 연결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人은 의미 요소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람' 1000명을 나타낸 글자? 억지스럽다.
千이 人과 같은 발음이었음을 주목해 보자. 옛날 한자에서는 숫자나 간지, 인명 등 특수한 경우에 두 글자를 하나로 몰아 쓰는 경우가 있었다. '武(무)'와 '王(왕)'을 합쳐 珷로 쓰는 식이다(<그림 3>). 千 역시 一과 人의 두 글자를 합쳐 쓴 것이다. 한 글자가 아니라 두 글자다. 珷를 '왕무' 또는 '무왕'으로 읽는다면 千은 '일인'으로 읽었다는 얘기다. 발음이 변해서 조금 이상하겠지만, 요즘 발음으로 치면 '일천'이겠다.
숫자 百(백)도 마찬가지다. 百은 본래 '一白(일백)'을 합쳐 쓴 것이었다. <그림 4>는 300, <그림 5>는 500이다. 각각 '삼백', '오백'으로 읽었을 것이다. 여기서 白은 가차자다. 그렇게 보면 단위숫자인 100이나 1000은 지금처럼 별도의 글자를 가진 게 아니라 음이 같았던 白과 人을 가차해 나타낸 것이었다.
당시에 한자사전이 있었다면 百이나 千은 독립된 글자가 아니기 때문에 표제자로 오르지 못했다는 얘기다. 百과 千이 단위숫자를 나타내는 독립된 글자가 된 것은 후대의 일이다. 이 단계가 되면 '一白'으로 썼던 100을 '一百'으로 쓰게 되는 것이다.
내친 김에 十(십)도 보자. 十은 처음에 丨으로 썼다가 중간에 점을 찍었고(<그림 6>) 나중에 점이 선으로 변해 지금의 十이 됐다. 처음의 丨에 대해, 一보다 한 단계 위의 숫자를 막대기 세운 모습으로 나타냈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百·千과 같은 구조로 볼 수도 있다. 丨은 지금 '곤' 발음의 글자로 남아 있는데, 처음의 丨은 이를 가차해 쓴 것이고 十은 百·千과 마찬가지로 '一丨'을 합친 글자일 수 있다. 지금은 '곤'(丨)과 '십'(十)으로 발음 차이가 크지만, 十의 발음을 이어받은 針(침)을 중간에 놓고 보면 발음상 접점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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