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의 집중이슈 코너에서 <한미FTA 뜯어보기>를 검색해보았다. '천문학적'인 연재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이 기획연재물은 2006년 2월 1일 노주희 기자가 쓴 <농산물시장 개방이 미국의 제1목적>이라는 기사로 첫 회를 시작했다. 이후 지난해 5월 한 경제학자가 쓴 <한미FTA 영향평가, 이론&실증 둘 다 실격>편에 이르기까지 장장 1년 4개월에 걸쳐 총 544회가 연재됐다. 연재는 <프레시안> 기자의 기사와 외부 필자의 릴레이 기고, 토론회 지상중계, 인터뷰, 해외 특파원 기자가 쓴 현지 취재물과 각종 칼럼 등으로 진행됐다. 이 연재물 <한미FTA 뜯어보기>를 다시 낱낱이 뜯어보니, 그저 망연할 지경이었다. 이 집요한 문제의식과 열정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이 땅의 어느 언론매체에서 한미FTA를 주요의제로 설정하고 이토록 집요하게 심층 기획취재를 한 적이 있었던가.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어느 야생동물이 연상될 정도였다. <프레시안>의 이 연재는 우리 언론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프레시안>의 박인규 대표가 지난해 11월 중순, 사고(社告) "<프레시안> 제3의 주인을 모십니다"에서 토로했듯이, <프레시안>은 바로 이 연재물 때문에 언론의 올바른 존재방식 문제와 그 해법을 깊이 성찰하는 기회를 가졌던 듯하다. 매체의 편집방향과 광고 사이에서 이율배반적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지면에 한미FTA를 홍보하는 정부 광고를 실었던 것이 바로 그 계기였다. 독자들로부터 "기사로는 그토록 열심히 한미FTA를 비판하면서, 한미FTA를 옹호하는 광고를 싣다니"라는 호된 질책을 받았던 것이다. 나 역시 정부의 그 한미FTA 관련 광고를 보면서, <프레시안>의 고민을 읽었던 적이 있다. 속된 말로, 결국 '쩐(錢)'의 문제였다. 매체의 수입 중 광고에 의존하는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이었던가. 재정난에 처한 <프레시안>이 어느 손 큰 자본의 손으로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풍문을 접했을 때는 깊이 절망했다. 인터넷 대안매체가 해왔던 실험과 탐색이, 결국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좌절하고 마는 것인지 탄식했다. 지난날 <프레시안> 지면에 2년 남짓 <서연의 '농막(農幕)에 불을 켜고'>를 연재한 인연이 있던 나로서는 그 안타까움이 더했다. 그런데 어느 손 큰 자본이라니, 과연 자본의 속성상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 언론의 편집권 독립을 온전하게 보장해 주는 그런 자본이 존재할 수 있는 건가.
<프레시안>을 '프레시안'답게 지켜내는 일은 결국 독자의 몫이 아닐까. 며칠 전 나도 개미오줌만한 후원금을 내고, 이어 '프레시앙'에도 참여했다. 막차를 탄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늦게 참여했다. 나 같은 농부 역시 먹고 사는 문제로 피가 마를 지경이었던 것이다. 한 문화예술기관의 문학작품 공모전에 참여했던 결과가 잘 나와 그나마 이제라도 '프레시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내가 막차를 탄 독자가 아니길 빈다.
독서에 게으른 나는 최근에야 영화 <일 포스티노>의 원작인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고 있다. 작품에는 칠레 출신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한 우편배달부가 등장한다. '시(詩)란 메타포(Metaphor)', 곧 은유(隱喩)'라고 말하는 네루다에게 우편배달부인 마리오가 묻는다. "선생님은 온 세상이, 즉 바람, 바다, 나무, 산, 불, 동물, 집, 사막, 비…… 기타 등등 온 세상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네루다는 한참 생각 끝에 "내일 내 생각을 이야기해 주지."라고 말을 받는다. 마리오의 질문도 절묘하고, 네루다의 답변도 절묘하다. 나는 아직 독서를 마치지 못한 처지라, 네루다가 '내일' 무어라고 말을 했는지 그 뒷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다만 메타포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시 한 편이 있다. 존 던(John Donne)이 쓴 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바로 그렇다. 헤밍웨이가 자신의 소설 제목으로 차용했던 바로 그 시다. 수사법으로서의 메타포와 더불어 특히 메타포의 철학성(哲學性)을 공부하려는 이한테는 이 시 한편이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메타포를 잘 한다는 것은, 두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동일성(to homoion)'을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설파한 적이 있다. '동일성'을 통찰하는 일은, 결국 사물과 사물의 관계, 사물과 사물이 내적으로 서로 깊이 연결되어 존재하는 그 우주적 존재방식을 통찰하는 행위다. 이를테면, 위의 시는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대륙의 한 조각이며, 전체의 일부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어 "어느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 전체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이어서 종장은 "그러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지를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나니."로 끝을 맺는다. 메타포의 철학성이 이처럼 명료하게 시어에 담긴 예도 드물다. 알다시피 여기서 종은 '조종(弔鐘)'이다.
최근에 읽던 소설 한 편의 이야기와 함께 <프레시안>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하는 문제와 그 해법, 독자들의 참여문제를 생각하다보니, 웬 메타포 이야기까지 나왔다. <프레시안>의 '존재'와 '부존재' 역시, 나의 삶 혹은 우리의 삶과 겉으로 드러나거나 혹은 드러나지 않는 형식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관점이 있는 뉴스(views)'를 모토로 내세우며 분투해 온 <프레시안>이. 앞으로도 독자와 함께 그 실험과 탐색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
☞ '프레시앙' 되기
■ [발행인의 편지] 보기 <프레시안> 제3의 주인을 모십니다 ① 새로운 언론 실험에 나서며 '프레시앙' 1000명을 맞으며 ② '프레시안언론공동체'를 향하여 '이명박 시대'를 맞으며 ③ 이제 다시 시작이다...용기와 함께 지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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