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문제는 이 여정을 가로막고 있는 정체불명의 요괴들이나 예상치 못했던 장애물이 도처에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모시고 서역으로 가는 길과 흡사하다. 싸우지 않고서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는 것이다. 이 싸움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제대로 이길 수 있을까?
싸움의 현장에서는 숨어 있거나 위장하고 있던 적을 먼저 알아차리고, 상대의 술책에 속지 않도록 하며 전세를 총괄하면서 허를 찔러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그건 발상, 또는 생각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습관적인 생각의 포로가 되면 상대의 전술에 말려들어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발상의 전환을 위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 하나를 연습문제라고 여기고 한번 풀어보자. 가령, "양치기 소년과 늑대"의 이야기는 어떻게 해석하면 될까?
거짓말의 부메랑
이야기의 골격은 아이들도 잘 알고 있듯이, 매우 간단하다. 양치기 소년은 처음에야 장난으로 늑대의 출몰을 마을 사람들에게 통보한다. 사람들이 이거 큰일 났구나하면서 허둥대고, 있지도 않은 늑대를 잡겠다고 들판에 우~ 하고 몰려드는 모습이 우스웠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거듭되다가 거짓임이 들통 나자 마침내 마을 사람들에게 소년의 말은 통하지 않게 되고, 정작 자신이 진짜 위기에 직면했을 때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게 되고 만다. 진짜 늑대가 나타났을 때 소년이 있는 힘껏 "늑대야!"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마을 사람들은 "저 애가 또 저러는구나."하고 꼼짝도 하지 않아 양들이 늑대에게 잡아먹힌다.
양을 지키는 자의 거짓말이 결국 양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상대방을 골리려고 한 거짓말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된다는 이 이야기의 교훈은 "양치기 소년과 늑대"에 대한 일종의 "공인된 해석"이다. 이 이야기는 이러한 뜻풀이로서 물론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런 표면적 해석만으로는 만족스러운 이야기 읽기가 완료된 것이 아니다. 이미 교훈처럼 되어버린 관성적인 이해나 그간 의문의 여지없이 받아들여 온 해석에서 벗어나 은폐되어 있던 이면을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늑대의 범죄는?
학교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 "양치기 소년과 늑대" 이야기를 달리 새롭게 해석할 여지가 없겠는가 물었다. 이론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서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방법과 관련한 강의였다. 예를 들자면, "바보 이반 이야기", "심청전", "여우와 두루미" 등의 민담이나 우화 또는 전설 등을 가지고 이제까지와는 좀 다른 각도로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겠느냐는 질문이 토론의 화두였다.
한 학생이 "양치기 소년과 늑대"의 통상적인 해석에 문제를 제기했다. 아무리 거짓말을 했다고 하지만 오로지 소년만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은 어쩐지 부당하다는 것이다. 정작 문제 삼아야 할 바는 "양에 대한 늑대의 약탈"이 아닌가라는 점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거짓말의 문제가 앞서다보니까 늑대의 범죄에 대한 논란은 사라지고 말았다는 주장이다. 이 문제 제기에서 우리는 "양치기 소년과 늑대"의 이야기에 자기도 모르게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 우리의 자화상을 보게 된다. 소년에서 늑대로 시선을 이동시키면, 늑대로 말미암아 양들이 겪게 되는 희생과 진정한 위기의 순간에 마을 사람들의 대응이 보인 문제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수업시간의 목표는, 우리의 시선에서 비껴나 있지만 어쩌면 보다 주목해야 할 바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이 토론을 매우 즐거워했다.
사실 이 우화에 본래 숨겨져 있는 의도는, 권력자의 거짓과 그 말로에 대한 경고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권력자의 상징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양치기 소년으로 바꿔버린 것은 우화의 성격상 가지게 되는 정치적 부담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권력자들이 외적의 침입과 관련한 허구의 공포를 무기 삼아 내부 단속을 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에 대한 질타가 여기에 담겨져 있다.
그런 까닭에 이 이야기는 과거 우리의 현실에서, 전쟁의 위협과 관련한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되받아치는 비판적 담론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가만히 따져보면 힘도 없는 무명의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과, 양들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권력자의 거짓말을 동일선상에 올려놓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약해진다.
양치기 소년의 진짜 고용주
한편, 현실에서 우리는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 일을 무수히 본다. 우리가 그 양의 신세가 되어 억울하게 희생되는 일을 겪기도 한다. 늑대는 평소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양인 척 하거나 양을 보호하는 양치기 소년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또는 양치기 소년의 진짜 고용주가 늑대인 경우도 있다. 진실을 은폐하거나 엉뚱한 존재를 늑대로 지목하는 언론이라면 그것은 늑대가 고용한 겉만 그럴싸한 양치기 소년일 수 있다.
늑대가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늑대의 출몰을 알린 소년의 동기는 당연히 고약한 것이었지만, 늑대가 나타나면 양은 목숨을 잃고 피를 흘리게 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아까 그 학생의 문제 제기를 더 이어나가면, 우리는 정작 늑대가 양떼를 공격했을 때 어떻게 이 사태를 감당할 것인가에 대해 이 마을은 아무런 대비도 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평소 "늑대의 약탈"을 알리고 막는 경고와 대응 시스템을 정비하는 노력을 했다면, 소년의 거짓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또한 거짓말을 하는 소년은 더는 양치기를 하지 못하게 하도록 하면 된다.
도대체가 이 우화에 등장하는 문제의 마을은 양치기의 안전을 이 소년의 말에만 의존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자신들 스스로 최적의 경보 시스템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소년만 비난하고 있는 형국이다. 소년의 거짓말을 이미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실제로 늑대가 양들이 있는 들판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숙의해야 하는 과정이 있어야 했다.
마을 사람들의 대응, 문제없나?
물론 이 짧은 이야기에 이렇게 거론하는 그 모든 것을 다 담을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 이야기가 설정한 현실 상황을 새롭게 재구성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것이다. 그 핵심이란 다름 아닌, 늑대를 알아보고 이를 제때에 제대로 막고 양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늑대의 범죄를 고발하고 이 늑대들의 출몰을 경고하는 목소리일 수 있다. 그리고 늑대의 공격으로부터 들판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을 보호해서, 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상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현실에서 어떤 교활한 목소리가 적이 될 수없는 엉뚱한 존재를 무서워해야 할 늑대라고 잘못 가르친다든가 또는 마을 사람들에게 소년만 비난하면 다 되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어버리는 일이 생긴다든지, 아니면 정작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뒤에 숨어서 이 모든 상황을 조정하는 다른 존재인데 양치기 소년을 그 심판의 자리에 세우고 있다면 우린 어찌할 것인가?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여러 가지 현실의 진상을 직시하면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이자,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무기를 마련해줄 책임이 있다. 그 실마리를, 생각을 바꾸는 이야기 읽기, 또는 만들기에서 시작해본다면 우리의 인문주의는 보다 친숙하고 유쾌해지지 않겠는가?
* 이 글은 <출판저널>에 동시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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