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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

[지상현의 Homo designans·19] 디자이너의 성공 요건

"성공하고 싶으면 빨리 이 학교에서 벗어나라"

서울에 있는 모대학 패션디자인과에서 있었던 일이다. 잘나가는 졸업생을 초청해 재학생들에게 경험담을 듣게 하는 자리였다. 이탈리아에서 디자이너로 활동 중인 이 졸업생의 얘기가 참석했던 교수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성공하고 싶으면 빨리 이 학교에서 벗어나라"는 요지의 발언을 한 것이다. 후배들을 위한다는 마음에 지나치게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한편으로는 "너무했다"는 생각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요령은 없었지만 옳은 얘기라고도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디자이너들의 성공요인을 살펴보면 대학의 교과과정에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디자인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예컨대 경영학과를 나왔어도 성공적인 경영인이 되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배운 것 이상의 개인적 판단과 재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경영학의 교육과정에 경영인이 되기 위한 모든 것을 담아내야 한다는 당위성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디자인 전공의 교육과정에서도 필요한 자질과 지식을 모두 담아내야 한다.

문제는 현재의 디자인 시스템에서는 그럴 수가 없는 몇 가지 요인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우리 대학의 교육내용이 창의력을 제대로 살리기 어렵게 후진적이라는 케케묵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디자인 산업의 구조나 디자인 자체의 성격에 그런 속성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은 디자인에 대한 관점의 차이 때문인 것도 있다. 그래서 이 참에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 가운데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한국의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디자인전문 회사나 일반 기업에 소속돼 일한다. 일반 기업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들은 다른 부서의 직원과 근무여건이나 급여 등은 동일하지만 승진에 어려움이 있다. 어느 회사건 최후의 승자는 소수이지만 승진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열려 있다. 그러나 디자이너는 그 가능성 자체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사실이다.

특수 전문직에 속하는 디자이너들의 전문성을 살리면서 경력에 맞는 대우를 해줄 인사조직시스템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 우리 기업의 과제라면 과제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수직적 기업문화와 잘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물론 대기업의 임원진에까지 오른 디자이너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뭄에 콩나기 식이고 개인요인보다 기업요인이 작용한 경우가 많아 그들을 역할모델로 삼으라고 힘있게 말하기는 힘들다.

디자이너를 가장 많이 채용하고 대접도 좋으며 직장인으로서 수명이 길었던 직장이 광고대행사였다. 그런데 여기도 이미 기획기능만 남기고 디자인 제작은 아웃소싱을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디자이너들이 몸담을 곳이 줄어든 셈이다.

디자인 전문회사는 사정이 더 좋지 않다. 산자부에 등록된 디자인 전문 회사는 약 2,000개가 넘지만 대부분 직원이 10명 미만의 영세업체들이다. 10년 전만 해도 중소기업에 디자인 아이템을 하나 개발해주고 1,000~2,000만원 정도를 받더니 그것이 600~700만원으로 떨어지고 최근에는 300~400만원에 디자인해주겠다는 업체들이 줄을 선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이 나빠졌기 때문인 것 같지는 않다. 디자인 진흥을 위한 정부 보조비에 익숙해진 기업들이 자기 주머니에서 디자인 비용을 내놓는 데 인색해졌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이너가 나름의 사회경제적 성취를 이루고 장기간 안정적으로 활동하려면 현재로서는 자기 이름을 걸고 창업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창업한 회사가 성공하려면 빼어난 디자인 실력이 필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기 이름을 브랜드화해서 인지도와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써 디자인료에 이름값을 얹어 받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언젠가 소비자들이 구매하는 것은 이미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의 하나가 디자이너의 이름이다. 그런데 이 이름값을 만드는 것이 쉽지가 않다. 학교에서는 기업이나 브랜드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관리하는 디자인방법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는 조직과 예산이 있는 기업에나 써먹을 수 있는 것이고 디자이너 개인의 경우에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디자이너의 이름값을 올리려면?

이름값을 이미 확보한 디자이너들을 보면 방법은 각양각색이다. 어떤 이는 해외에서 무슨 상을 타거나 호평을 받은 덕에, 또 다른 이는 누구보다 독창적이고 성실한 작품을 장기간 선보여 이름값을 확보했다. 하지만 디자인 외적인 엉뚱한 방법의 덕을 톡톡히 본 디자이너들도 꽤 된다. 예컨대 유명연예인과의 교류, 톡톡 튀는 이벤트나 퍼포먼스, 기이한 풍모와 언행 등을 통해 자신의 이름에 '아우라'를 씌우는 이들이 있다. 이런 방식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성이 맞아야 한다.

외국의 사례를 하나 들자. 디자인 선진국인 일본에서도 예외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사토 카시와라는 젊은 광고디자이너가 세운 "스튜디오 사무라이"의 성공스토리다. 사토는 타마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하쿠호도(博報堂)'라는 일본 굴지의 광고 대행사에서 근무했다. 그는 회사 복도를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다니며 헐렁한 T셔츠에 닭 벼슬 머리를 하고 다니는 펑크족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회사 임원들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복장과는 달리 매우 예의바르고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이 그를 보수적인 일본 광고대행사에서 살아남게 했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감성의 소유자'라는 아우라까지 만들어 주었다. 퇴사한 그가 "스튜디오 사무라이"를 설립했을 때 클라이언트들에게 추천해준 사람들이 바로 전 회사의 임원들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사토 카시와가 디자인한 유니클로 뉴욕 매장 디자인과 NTT의 휴대폰 도코모 디자인.

"Made in Jail"

또 다른 사례는 이탈리아의 T셔츠 전문 인터넷 쇼핑몰 "Made in Jail"이다. 마약 밀매상, 살인자, 성범죄자 등 전과자나 복역수들이 디자인한 제품이 실제로 밀라노의 패션거리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판매가 호조를 보여 로마에 지점을 2군데 새로 개점했고 도쿄에도 곧 문을 열 예정이라고 한다. 아직 디자인을 보지 못해 어떤지 알 수는 없지만 T셔츠 디자인의 성패는 세련미가 아니라 어떤 문화적 코드를 전달하느냐에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메이드인 제일'의 성공은 체제 비판적인 젊은 세대들의 문화적 코드와 교도소가 주는 이미지가 통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이렇게 디자이너 혹은 디자인 전문회사의 성공적인 브랜드화에는 가지각색의 상황이 작용해 유명세를 만들고 아우라를 씌운다. 이건 일부러 하려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성격이 맞아야 하고 인연이 닿아야 된다. 만약 작위적으로 이런 여건을 만들려 한다면 자기 삶의 일정 부분을 희생해야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렇게 얻은 유명세는 건강하지 못하다고 비난할 것도 없다. 어차피 현대의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은 이미지요 환상인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하여간 디자이너는 유명세를 얻고 그 유명세를 통해 소비자들이 원하는 이미지를 상품화하여 제공한다. 현대의 시장에서 팔리는 디자인은 이렇게 완성되어 간다.

대학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 것들

문제는 여기서 대학이 할 역할이 없다는 점이다. 대학에서는 기능적이고 아름다운 디자인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들만큼 중요한 것이 위의 사례에서 본 디자이너 자신의 브랜드화다. 이는 각자 개인이 알아서 헤쳐 나가야할 문제다. 삶의 일정 부분을 희생한다면 그 역시 개인의 선택의 문제다. 초두에 졸업생이 한 말도 바로 이 대목을 이야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최근에는 디자이너 중에서도 패션디자이너의 작품이 다른 제품군에 적용되는 경우를 흔히 본다. 패션디자이너의 이름에 마케팅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갑에 만원하는 '에쎄' 담배를 사는 사람들은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이 디자인했대"하고 한마디 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이 판매에 도움을 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이 한글을 이용해 디자인한 '에쎄' 담배갑

이렇게 다른 분야에 손을 뻗는 패션디자인과는 반대로 시각디자인과나 제품디자인과에서 디자이너의 브랜드력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쉽지가 않다. 필자도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교과 내용으로 담아내는 것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학제상 분류나 산업계의 구조와 맞지 않고 시장도 매우 폐쇄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저 "시각이나 제품 디자인도 디자인 자체가 상품이 가진 가치의 전부가 될 수도 있고, 디자이너가 브랜드화될 가능성도 있다"고 일깨우는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 패션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가구들. 패션디자이너 브랜드의 가구들은 기능성이나 쾌적성 측면에서 조금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괘념치 않는 소비자들도 많다. 브랜드력을 얻게 되면 다른 디자인 분야로의 진출이 쉬워진다.

학교에서 가르치기 곤란한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이 있다. 아래 그림은 친한 동료교수가 교육용으로 일본에서 구입한 것이다. 이 희한하게 생긴 녹색 파이프의 중간 부분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페트병의 뚜껑과 크기와 홈이 같다. 그래서 아무 빈 페트병과 연결하면 손쉽게 물뿌리개로 사용할 수 있다. "디자인은 이런 것이다"라고 웅변하는 것 같은 이 물건은 어느 발명품 경진대회에 내놔도 손색없을 것 같다. 제품디자인의 가치는 이런 통념을 뛰어넘는 기발함에도 있다.

유명한 디자이너 김영세씨가 개발한 독특한 지퍼도 기발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이런 제품들을 보고 있으면 디자인은 일종의 '낮은 수준의 발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도체나 체세포 복제기술과 같이 고도의 지식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높은 수준의 발명'은 아니지만, 폭넓은 상식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낮은 수준의 발명은 바로 디자인의 속성과 일치하는 것 아닐까.
▲ 아무 페트 병이나 중간에 연결하면 집안의 작은 화분을 위한 물뿌리게가 된다. 일본 '무인양품'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신상품이다.

▲ 필자의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만든 디자인 상품. 좌측은 원룸에 거주하는 학생들을 위한 종이로 만든 간이 브라인드고 우측은 각종 충전기의 선들을 정리할 수 있는 두루마리식 수납장치다.

디자인 대학의 제품디자인 수업시간에는 학생들에게 이런 것들을 생각해내라고 요구한다. 문제는 이런 발명을 위한 방법이나 필요한 자질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잘 모른다는 것이다. 인지 심리학계에서 '창발성'이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 주먹구구식으로 "상관없는 것 같은 물건들 연결시켜보기", "공간적으로 회전시켜보기" 등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해 보지만 신통치 않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발명을 위한 자질은 디자인대 입시에서 필수과목인 묘사력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묘사력이 좋다고 발명에 소질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언뜻 생각해 보아도 심미적 감수성보다는 이것저것 고장 난 물건을 고쳐보고 조립해 본 공학적 경험과 재능이 더 필요해 보인다.

경계를 주목하라

지금까지 디자인적 가치를 구성하는 현실적 요소이지만 대학의 교과과정에 담아내기 어려운 몇 가지에 대해 점검했다. 이를 통해 교과서에서 말하는 디자인이 아닌 세상 속의 디자인을 보여 주고 싶었다. 최근 우리 사회가 디자인에 거는 기대가 커졌다. 그러나 어떤 기대는 좀 엉뚱해 보이는 것도 있다. 그래서 디자인이 갖고 있는 가능성을 제대로 펼치려면 우리 모두가 디자인의 모습을 정확히 보고,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세상의 흐름에 민감하고 변화에 적극적이어야 할 디자인계가 좀 정체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인상 때문이다. 예컨대 그동안 수많은 디자인 전문회사들은 주업무가 디자인 제작대행이었다. 그러나 디지털기기 덕분에 디자인 프로세스가 자동화하면서 수익률은 급락하고 있다. 이제 와서 디자인 제작 대행이 아닌 부가가치가 높은 디자인 컨설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막상 그럴 만한 능력은 키워오지 않았다. 대학에서 배출해내는 디자이너들도 마찬가지다.

이같은 저간의 사정은 근본적으로는 디자인계가 문화와 산업, 혹은 과학과 예술의 경계부분에 있다는 인식을 갖지 못했다는 점, 그래서 양쪽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관점이나 방법을 개발하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 아닐까.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 로버트 위너는 자신을 '서로 다른 두 분야의 경계선 상에서 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자신의 창조성의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다. 디자인과 같은 소프트 과학에 대해 사람들의 기대하는 바는 바로 두 분야의 경계선에서 나오는 창조성이다. 이 창조성은 예술이나 문화 혹은 산업과 과학의 어느 한쪽에 머물러서는 나오기 힘들다. 경계선 상에서 둘 사이를 오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디자인이라는 소프트 과학에 맞는 연구패러다임의 개발이 시급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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