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했으면 인수위로부터 "질책"을 받은 공무원의 입에서 "관료에겐 영혼이 없다"는 자조섞인 말까지 나왔겠는가. 당선인부터 1월 중 정부조직개편안을 밀어부쳤으니 인수위가 이렇듯 핵심 국정이슈들을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것을 두고 인수위를 뭐라 하기도 어렵다. 이 와중에 한반도 대운하까지 바짝 몰아내고 있으니 아무리 변화를 바랬다 하지만 국민들로서도 인수위의 몰아치기를 따라가기가 버겁다 아니할 수 없겠다.
그런 중에도 여기까지는 10년만에 잡은 정권이니 "잘해보자"는 의기가 충천한 나머지 다소간 오버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이해해 줄 수도 있겠고, 인수위가 그 정도로 팔을 걷어부쳐야 조직 개편도 하고 업무 혁신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넘겨짚어 공감해 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어제 오늘 청와대 비서실 기능을 대폭 강화해 정책 조정 기능을 직접 행사하고 국무총리실의 국무조정기능을 통상적 조정-평가 기능으로 제한함과 동시에 영역별 부처제를 폐지한다는 방침이 인수위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서는 생각을 좀 달리하지 않을 수 없게 돼 버렸다. 인수위의 청와대 강화구상의 핵심은 국정조정기능을 내각으로부터 청와대 비서실로 이관하겠다는 것인데 심지어 예산 기능까지 청와대 비서실로 넘길것을 검토했던 모양이니 청와대 강화론을 당선인과 인수위의 확고한 방침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문제는 청와대 강화가 당선인의 '만기친람형' 리더십과 결합될 경우 대통령의 권력강화와 국정 운영 시스템의 유명무실화로 나타날 위험성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70-80년대 권위주의적 개발독재시기를 마감한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의 다원적 발전은 되돌릴 수 없는 대세가 되었고 이에 따라 특정 개인이나 소수과두집단에 의한 통치가 법과 제도와 시스템에 의한 경영으로 대체된 지도 오래되었다. 당선인이 내세운 CEO형 리더십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 이러한 사회변화를 정치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만약 국무총리실 및 부처 기능 조정론과 청와대 비서실 강화론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 대통령과 대통령 사람들의 권한강화라 한다면 이는 시대흐름과도 맞지 않고 당선인이 내세워 온 CEO형, 경영형 리더십에도 맞지 않는 역방향의 개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같은 프레임에서 보면 새 정부의 초대총리 인선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 또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정치인 총리라는 외피 아래 검토되었던 박근혜, 심대평 카드나 실무형 총리로 선회한 후 검토되고 있다는 대학 총장 출신 인사들 모두 충청권 연고라는 지역 정치적 변수로서 고려되고 있는 모양이니 여기에서도 '어차피 국정은 대통령과 비서실이 주도할 것이니 차제에 총리는 정치적, 지역적 고려하에 방탄형, 의전형으로 가도 좋겠다'는 총리 경시, 내각 경시 흐름이 은연 중에 배어 나오는 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공천 전쟁'을 향해 거침없이 치닫고 있는 당선인 측과 박근혜 전 대표 측의 갈등 양상도 이러한 프레임에서 보면 그 치열함이 현장감 있게 다가온다. 대통령이 국정 전반을 직접 챙기면서 강력하게 드라이브할 생각이라면 당선인 측 입장에서는 대통령을 든든하게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여당의 존재야말로 필수적 전제 조건 아니겠는가 말이다.
당선인 측이 이번 총선을 거치면서 한나라당을 완전히 장악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새 정부의 국정운영과 직접 맞닿아 있는 사활적 관심영역이 되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총리직까지 거부하면서 한나라당에 올인하는 것 또한 당선인 측의 당 장악 구상이 그만큼 구체적이라는 사실의 반증인 셈이다. 문제는 이로써 새 정부의 국정운영 구상이 정쟁구도에 함몰될 위험성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는 것이니 이 모든 정치적 긴장이 강력한 대통령에 대한 당선자 측의 집착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당선자는 알고나 있는 것일까?
이명박 당선인은 10일 한나라당 국책자문위 신년인사에서 "국민에 고개 숙여 국정을 운영하겠다" "미래를 향해 가는 당정이 되자"고 했는데, 강한 대통령에 대한 집착으로 "과거로 가는 당정", "국민 앞에 빳빳하게 고개드는 국정"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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