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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공동체운동이 대안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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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풀뿌리 공동체운동이 대안의 핵심이다

[개혁-진보 진영의 거듭남을 위한 제언] <중>

새로운 운동, 풀뿌리 공동체 운동

자본주의가 파괴한 공동체를 다시 만드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배부른 노예로 살 것인지 아니면 자유인들의 공동체에서 사람답게 살 것인지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을 넘어서 시민사회운동과 정당정치 또한 분명히 선택해야만 하는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종말을 고할 만큼 자원이 고갈될 때까지 사람과 사회, 지구 생태계가 전혀 생존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기후변화와 식량 위기, 신종 질병의 창궐, 이른바 유전자 조작의 위험성 등등 인류와 생명체의 멸종사태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 요인은 논외로 치자. 그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자본주의 산업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금융자본주의가 이미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근거와 사람들의 의지조차 말끔히 파괴하고 소진시켜 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파국을 맞이할 때 닥치게 되는 끔찍한 전쟁과 폭력, 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른 파시즘과 제국주의가 이미 우리의 의식 속에까지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점이다.

진정으로 우리가 미래의 평화를 준비한다면 먼저 우리는 나 자신의 존엄과 내 가족, 내 이웃의 자존부터 되찾는, 아주 작은 단위에서라도 자본주의로부터의 이탈과 공동체 회복의 경험을 준비해야 한다. 진정으로 지속가능한 미래를 기획하려면 우리는 다른 모든 대안과 청사진에 앞서 먼저 사람을 도구로 보는 자본주의 인간관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람을 그 자체 전체로서 나와 똑같은 인격, 스물 두 살 청년 전태일의 각성처럼 '나의 또다른 나'로 보는 공동체의 인간관계로 다시 재정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직접 현실의 세계에서 다양한 수준의 풀뿌리 공동체를 형성하는 경험을 통해 확립될 수 있다.

지속가능한 공동체 가치

새로운 공동체 경제 질서는 자본주의와 근본에서부터 다르다. 공동체 경제는 소비와 미친 낭비가 미덕이 아니라 검약과 절약이 미덕인 경제이다. 끊임없는 성장과 규모 배가의 무한 확대재생산, 지속불가능한 착취경제가 아니라 자원순환과 생태순환의 단순재생산, 재생가능한 상생의 호혜경제가 원리이다. 이자가 인민을 신용노예로 전락시키는 금융이 아니라 곤경과 궁핍을 이겨내는 상호부조, 든든한 사회안전망의 이자 없는 인민금융이 원리이다. 중앙은행의 국가 화폐 경제가 아니라 이와는 전혀 별개의 지역 공동체와 결합된 지역화폐 경제이다. 대규모의 대외의존 경제가 아니라 식량과 에너지를 자급하는 소규모의 자립경제가 근본이다.

이런 공동체 경제의 실현가능성은 공상이 아니다. 한살림운동과 생협운동, 지역화폐운동을 비롯한 수많은 실제 풀뿌리 공동체 경험은 자본주의 거대기업의 공격을 이겨내면서 생존해나갈 수 있다는 사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관혼상제의 상조회, 기존 보험을 대체하는 공제회, 각종의 동호회 등 우리가 새롭게 형성해 나갈 수 있는 공동체는 너무나 많다. 다만 여기에 지역화폐와 호혜, 상호부조, 자립, 자치 등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 가치를 함께 나누도록 하는 노력과 의지의 접목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키우는 육묘운동, 의식의 전환과 실천의 전환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 강화도환경농업농민회가 진행하고 있는 도농교류사업 ⓒ희망제작소

공동체 민주주의의 원리는 직접 민주주의이다. 이런 직접 민주주의의 공간이야말로 인민을 깨어 있는 주권자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산실이다. 자유로운 개인이자 동시에 공동체 성원으로서 자신이 직접 자신과 사회를 통치하는 능동의 주체로 성장시키는 훈련장이다. 물론 수많은 풀뿌리 공동체, 마을공동체들의 연합 차원으로 규모가 넓어지고 커지면 당연히 대의민주주의는 불가피하게 된다.

지역과 전국 규모의 정당정치도 마찬가지이다. 직접 민주주의와 간접 민주주의는 규모의 문제이다. 인민의 수가 수십 수백 명 단위의 기초공동체를 벗어나고 광역 단위의 지역 규모로 확대되면 간접민주주의는 불가피해진다.
공동체는 생산의 공동조직, 농민공동체, 마을공동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노동조합은 가장 주요하고도 강력한 노동자들의 공동체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성장과 공동체정신의 붕괴가 동전의 양면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최근 들어 한국 노동조합이 공동체정신을 잃어버린 미국식 장사꾼 노동조합(business unionism)으로 변질되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긴 하다. 제3세계 노동자들과 비정규 노동자들을 착취한 피의 떡고물에 마취된, 자본주의의 풍요에 눈이 멀어 노동조합의 본령인 공동체정신을 잃은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어떤 공동체고 상호부조와 우애, 협동, 환대 등 공동체 정신을 놓아버리고 눈앞의 이익과 돈을 좇는 순간 그런 현상은 늘 일어나게 마련이다.

노동조합 이외에 가장 유력한 공동체는 협동조합이다. 신용협동조합, 농업협동조합, 어업협동조합, 임업협동조합, 노동자 생산협동조합, 소비자 협동조합, 주택협동조합, 생활협동조합, 의료협동조합, 보험협동조합 등등 삶의 모든 분야에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다양한 협동조합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공동체의 핵심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때부터 민간에서 협동조합운동이 벌어졌고 해방 후에도 협동조합운동을 벌이던 선각자들이 있긴 했다. 그러나 신협, 소협, 생협과 의료협동조합 등 최근 활발하게 밑에서부터 조직되는 협동조합을 제외하고 농협을 비롯한 대다수 기존의 한국 협동조합은 국가가 인민을 통제하기 위해 위로부터 만든 관제 협동조합의 측면이 강했다. 이런 협동조합을 그야말로 인민 스스로의 협동조합으로 탈바꿈시키고 새로운 협동조합을 만들어나가는 일은 새로운 사회,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첫걸음이다.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주식회사는 자원착취, 노동착취,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다. 우리는 주식회사와는 전혀 별개로 수많은 생산 단위를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거나 성장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자원순환, 생태순환의 협업을 통해 장인들이 만들어 나가는 중소 규모의 생산자 협동조합을 활성화하는 일은 불가피하게 닥치는 에너지-자원고갈 시대를 대비하는 현명한 길이기도 할 것이다.

협동조합뿐만이 아니다. 가족공동체부터 친구들끼리의 계나 학연과 지연에 따라 이루어진 친목 모임에 이르기까지 살벌한 자본주의의 인간관계를 극복하고 우애를 나눌 수 있는 공동체의 모습은 수없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그런 공동체를 다시 재구성해야 한다. 특히 농촌공동체는 새로운 가치관을 지닌 브나르도 운동, 귀농자들의 행렬과 함께 새로운 미래사회의 근거지이다. 지역의 식량-에너지 자립과 자치는 이런 새로운 마을공동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도시 젊은이들의 농민으로의 전환운동은 조만간 닥칠 식량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슬기로운 준비가 될 것이다.

흔히 지역이기주의의 병폐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지역주의와 지역이기주의는 다른 현상이다. 자신의 지역에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지역 사람들을 아껴주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땅과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소중히 대할 수 있겠는가. 그런 지역주의는 오히려 더 강화되어야 한다. 문제는 자신의 지역공동체가 소중한 줄만 알고 다른 지역공동체를 업신여기거나 배제하거나 착취하려고 하는 태도이다.

우리는 새로운 사회운동, 정치운동을 기획하고 실천에 옮겨야 할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르렀다. 그래야만 지금의 삭막한 사막사회를 녹색의 오아시스 사회로 바꿀 수 있다. 그 기획의 첫 번째 실천은 다른 무엇보다도 다양하고도 수많은 기초공동체의 건설이다. 풀뿌리 공동체 노동운동, 풀뿌리 마을 공동체 운동, 풀뿌리 공동체 시민사회운동은 우리가 지금 당장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현실가능한 공동체 형성의 대안운동이다. 때문에 민주주의와 새로운 사회의 기지로서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풀뿌리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위기에 처한 적녹청 운동의 돌파구로서 시급히 모색해야 할 최우선 과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상 아무도 경험하지 않은 모델이라 해서 실천과 실험을 주저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엄과 생존을 위해서라도 기꺼이 새로운 실험과 실천을 과감하게 열어젖혀야 한다.

시민사회운동의 방향 전환을 위하여

우리는 이제 국가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관행에서 과감히 탈피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새로운 사회 재구성의 기본은 국가보다도 공동체이다.

국가가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는 엄연한 실체이자 사회생활의 단위이며 오늘날 현실의 모든 공동체, 현실의 모든 민주주의 공간은 분명히 국가이다. 그러나 국가 안에서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국가가 국가주의와 전체주의로 치닫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풍림은 자립과 자치를 실제 실현해 나가는 수많은 푸른 기초공동체이다. 정당 또한 이런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선거를 통한 권력과 이권의 상거래 조직으로, 직업정치인들의 파당과 붕당으로 형해화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질리도록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1987년 6월항쟁 이래 민주화운동과 시민사회운동은 시민사회와 국가를 민주화하고 생활 속의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사회를 바꾸는 운동과 국가권력을 바꾸는 운동이 혼재되어 있었고, 시민사회운동과 정당정치도 분별 정립보다는 다양하게 혼재된 상태로 연결되어 있었다.

문제는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진부한 논의는 이제 더 이상 현실을 설명하지도 현실을 바꾸지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국가에 초점을 맞춘 대안제시, 정책 제시의 운동을 뛰어넘어 새로운 사회,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운동으로 전환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정책 제시의 운동이란 국가가 그같은 대안 정책을 수용하는 순간 운동 자체가 소멸해버리고 마는 역설이 발생한다.

이제 시민사회운동은 공동체의 형성, 재구성과 직접 민주주의의 실천이라는 180도 다른 출발점에서 새로운 활동을 기획할 필요가 있다. 국가형 시민사회운동에서 풀뿌리 공동체 건설의 시민사회운동으로 전환하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시민사회운동은 회비를 내는 회원과 활동가라는 대의제 민주주의와 비슷한 조직 구조로 활동해 왔다. 회원 가운데는 단체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들부터 그냥 회비만 내는 것으로 회원 활동의 전부를 갈음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이런 구조는 저항의 운동에서는 아주 적합한 구조일 수가 있다. 저항운동은 당연하게 전투부대화의 경향으로 치닫게 된다. 보다 큰 힘의 집적체인 국가와 자본에 대항해 전투를 치르기 위해서는 전략전술 이전에 효율성 있고 간명한 힘있는 질서, 즉 군대가 적격이다. 사회주의 혁명운동이 그러했고 민주화운동 기간 내내 한국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또한 역설이지만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었다. 시민사회운동 또한 한때 그러한 경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회원은 군대의 병사가 아니다. 그래서 오늘날 수백의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한 집회에 수십명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활동가들의 선도투쟁과 언론을 의식한 이벤트 행사 등이 주활동으로 정착하게 된다.

시민사회운동은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 회원들의 요구와 참여 정도에 맞추어 협동조합 성격이건 느슨한 친목회 성격이건 어떤 수준이건 간에 다양한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시각에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래야만 지금처럼 언론의 노출빈도에 따라 회원이 고무줄처럼 왔다갔다 하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구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활동가-회원의 이원구조는 다양한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시민사회단체 대부분은 이미 활동가들의 저임금과 이로 인해 활동가 충원이 어려운 게 현실이다. 게다가 명망가 활동가 위주 운동이라는 비판 등에서 늘 자유로울 수가 없다. 시민사회운동 활동가들의 성장 이후 활동 공간 자체의 협소함도 문제이다. 풀뿌리 공동체와 확고하게 연결된 정당정치의 부재는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자연스러운 정당정치 진출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활동가-회원 구조에서 회원 수가 정체 내지는 감소하게 되면 이는 곧바로 재정 자립의 문제와 직결된다. 일부 시민단체들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프로젝트를 통해 경상비를 마련하면서 알게 모르게 '새로운 관변단체'로 전락해버린 현실도 이와 무관치 않다. 특히 기업의 후원 의존 문제는 시민사회운동의 정체성 문제와 관련해 새로운 '기업기생 단체'의 등장이라고 말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대표 사례가 환경재단이다. 환경재단은 이미 시민사회운동의 근본을 이탈해서 기업에게 환경 면죄부를 판매하는 대가로 후원금을 걷고 있는, 시민사회운동 명망가 출신의 환경귀족 이벤트 재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안타까운 평가를 받고 있다. 환경재단은 재단 누리집에 적혀 있는 이사장의 인사말대로 "한마디로 환경운동을 도와주기 위한 일종의 공익재단" 성격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환경운동을 도와주는 시민사회단체 지원 사업비는 2006년의 경우 64억의 수입 가운데 10%에 불과한 6억 8천만 원에 그치고 있다. 나머지는 대부분 재단 자체 사업 활동비와 인건비로 충당된다. 환경연합 창립자가 만든 또다른 환경단체인 셈이다.

시민사회운동이 기업의 후원과 확실히 결별해야 하는 까닭을 시민사회운동의 명망가들로 구성된 이른바 '삼성을 지켜보는 모임'이 보여주고 있다. 삼지모는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 구속이나 최근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이 계기가 되어 드러난 온갖 불법로비와 비리 백화점같은 삼성 사태에 대해 꿀먹은 벙어리마냥 어떠한 입장도 표시하지 못하고 있다. 시민사회운동 단체나 개별 인사들이 기업의 둘러리로 전락했을 때 어떤 결말로 귀결될 것인지 상징하는 하나의 삽화이다.

시민사회단체 자체가 조직과 활동 등 협동조합과 공동체 성격으로 재편하지 않으면 이런 폐단을 극복할 길이 없다. 공동체의 직접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었다면 개인 활동가의 돌출행동이나 1인 지배 단체의 문제점같은 것은 처음부터 나타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 시민사회운동은 협동조합에서 공동체 정신과 조직의 운영원리, 자치와 자조, 자립경제 구조를 배워야 한다. 구성원의 교육과 내부 민주주의, 재정자립과 자치는 그것 자체가 가장 강력한 민주주의의 근거지를 만드는 기본 동력이다. 환경, 생태, 여성, 문화예술, 교육, 복지, 의료 등등 모든 시민사회운동의 영역은 도시건 농촌이건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둔 인간관계의 결합지점이다.

저항의 운동에서 성찰과 형성의 운동으로

저항과 반대는 무엇을 무너뜨리고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무엇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그동안 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운동 또한 어떤 새로운 사회의 형상을 주조해내는 형성의 운동이 아니었다. 1990년대 초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그런 뚜렷하고도 새로운 대안사회는 부재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일찌기 일제 식민지해방투쟁 이래 저항과 투쟁은 한국 사회운동을 관통하는 핵심가치였다. 저항 이후의 한국 사회 재구성 기획은 조선왕조의 복구가 아닌, 민주공화국이라는 서구 근대 지향의 이데올로기가 이미 기성의 제품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 군정과 소 군정은 남과 북에 각각 미국식 자본주의 정권과 소련식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무늬만 다를 뿐 이들 두 정권은 각각 '인민공화국'과 '민국'을 내세우면서도 극심한 공포의 독재체제였다.

북한은 저항과 투쟁의 시민사회가 형성될 수가 없었다. 저항과 투쟁의 항일 빨치산 출신들이 북한 정권의 권력을 잡았고 공산주의 이념 자체가 그 당시까지는 궁극의 대안 이념이었기 때문이다. 전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통해 보릿고개를 해결한 북한은 1970년대 초까지는 적어도 남한의 일부 지식인들에게는 대안 사회의 모범이기까지 했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험이 실패로 드러난 오늘날, 북한 사회가 에너지와 식량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근본 까닭은 북한 사회가 일당독재, 나아가 일인 왕조체제이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새로운 대안사회로의 전환은 있지도 않은 위대한 수령의 천재성에 의존하기보다는 인민의 '자발성'과 '창조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밑에서부터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자유와 해방의 공간, 자립과 자치의 공동체가 있어야 가능하다. 일당 독재 사회에는 그런 자유와 해방의 꼬뮨이 존재할 수가 없다. 최고지도자 1인의 천재와도 같은 지도 결과는 수백만의 아사자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끔찍한 기아, 하루하루 힘겨운 생존투쟁을 이어가야 하는 참혹한 인민생활 뿐이다.

남한에서는 군사독재체제에 맞서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저항과 투쟁의 전통이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 남한 정권의 권력자들은 저항과 투쟁의 민족독립투쟁 세력이 아니라 기회주의, 출세주의의 친일 부역 세력, 친미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극심한 반공 정신병동 사회에서 철벽같은 군사독재정권의 무단통치 벽을 깨뜨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자신의 온몸을 던져 이를 깨뜨리고자 하는 수많은 젊은 학생들과 지식인, 문학인, 종교인들이 민주화운동의 수많은 푸른나무를 목숨처럼 붙잡고 키워 나갔다. 현실의 군사독재 체제는 전혀 사람이 사랍답게 사는 사회정의와 평등의 대안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군사독재 체제 자체가 수많은 민주주의자들을 길러내는 종묘장이었다. 무엇보다도 사회주의를 대안사회로 설정하는 이들은 그러한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 우선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을 절대의 가치로 인식하고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일부분에 그치긴 했지만 군사독재 체제를 종식시킨 6월 항쟁의 승리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저항과 투쟁이 압축된 하나의 빛나는 정점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후 민주화운동은 어떠한 새로운 사회의 청사진도 제시하지 못하고 쇠락과 침체의 내리막길로 미끄러져 굴러 떨어졌다. 이른바 민주정부 10년 동안 미래사회 프로그램은 전혀 없었다. 민주화운동의 계승과 극복을 내걸고 생활세계의 민주주의 실천을 내건 시민사회운동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이번 대선은 이제 시민사회운동이건 어떠한 개혁 진보정당이건 그런 실현가능한 새로운 사회의 재구성 기획이 없다면 일반 인민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저항과 반대의 가치가 필요없게 되고 사라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아마도 경부대운하를 비롯한 이명박 정권의 불도저식 환경파괴와 재앙 앞에서 우리는 또다시 처절한 저항과 투쟁의 머리띠를 다시 졸라매야 할지도 모른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대운하 예정지를 따라 각 마을마다 도시마다 종교인들 중심의 삼보일배가 아니라 수많은 지역민들이 스스로 조직한 오체투지의 릴레이 일보일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은 싸움의 가치보다 성찰과 형성의 가치가 무엇보다도 더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임을 우리는 다시 한번 철저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형성의 가치, 적녹청 정당정치운동과 공동체운동, 공동체 시민사회운동은 이명박 후보에게 표를 찍었으면서도 이명박 정권 아래 철저하게 소외되고 배반 당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인민들,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자들과 영세 자영업자들의 참담한 절망을 희망으로 다시 전환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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