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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운동의 발전과 진통

[기획특집] 대한민국 60년, 한반도의 좌표와 미래는? (3)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평화나눔센터가 운영하는 웹사이트 <북한채널>이 '대한민국 60년, 한반도의 좌표와 미래는?'을 주제로 신년 기획연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연재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지난 60년간의 한반도 역사를 재조명하고 특히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정세를 분석·검토하기 위한 것으로 학계·언론계·시민사회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 9명이 참여했다.

<프레시안>은 <북한채널>의 협조를 받아 이 연재를 공동 게재한다. 연재의 순서는 아래와 같다.

⑴ (1월 2일) 남북관계 60년 (김현경: 문화방송 기자)
⑵ (1월 4일) 북한의 변화 노력과 좌절 (정영철: 이화여대 연구교수)


⑶ (1월 7일) 통일운동의 발전과 진통 (정현곤: 민화협 사무처장)
⑷ (1월 9일) 북미관계와 북핵문제: 진통과 변화 (김정환: 한국방송 기자)
⑸ (1월 11일) 대북지원운동의 성과와 과제 (이종무: 평화나눔센터 소장)
⑹ (1월 14일) 한미관계의 변화와 발전 (이근: 서울대 교수)
⑺ (1월 16일) 대북인식의 변화와 남남갈등 (김학성: 충남대 교수)
⑻ (1월 18일) 북한의 대남정책과 통일정책 (정창현: 민족21 편집주간)
⑼ (1월 21일) 2008년 한반도의 좌표와 미래 (김근식: 북한채널 편집위원장) <편집자>

(☞ <북한채널> 바로가기)


'국민의 정부'로부터 시작하고 '참여정부'가 이어온 남북 화해협력 정책이 10년의 성과를 축적하고 이제 한 고비를 넘어가고 있다. 10년의 결산으로 2차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됨으로서 남북관계 역사는 새로운 미래의 씨앗을 예비해 둘 수 있었다. 통일운동으로서는 기쁘고 반가우면서도 다행스런 일이다. 여기서 통일운동이란 주체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남북관계 역사의 다른 이름이다.

통일운동은 분단이라는 우리 역사의 특수성 속에서 배태되었고, 사회개혁 운동의 한 영역을 차지해왔다. 초기에 이 운동은 분단과 전쟁에 대한 책임 공방이 주를 이루었고 은원(恩怨)관계의 성격으로 점철되었지만, 남북의 만남이 시작되면서 점차로 건설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0년에 남북 정상회담에 이르고서는 남북의 실질적 통합이라는 통일문제의 본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통일운동, 전쟁의 포연을 벗고 출발에 서다

통일문제가 정부의 입장에서건 민간의 운동에서건 실질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은 1987년 민주체제 성립 이후부터이다. 그 시기에 이르러 정부는 북방정책에 기초하여 대 공산권 교류를 시작하고, 7.7선언으로 대북교류에서도 문을 열었다. 민간의 경우, 민주화운동 주체들이 통일문제로 이동하면서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1987년 체제 이전 시기까지의 통일운동은 한마디로 전쟁으로부터의 탈출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뿌리는 6.25였다. 1945년 해방정국에서 형성된 분단과 통일의 접점이 전쟁으로 귀결된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전쟁은 우리 민족 전체에 엄청난 고통과 재난을 안겨주었으며, 두고두고 상처로 기억되었다. 당시의 전쟁이 통일 동기에서 출발했다는 점으로 인해, 통일문제는 늘 전쟁을 연상케 했다. 우리는 그 가장 강력한 부정적 현상을 이승만 정권기에 보게 된다. 당시 북진통일론으로 무장한 이승만 경찰국가는 '평화통일'을 당론으로 내세우며 등장한 진보당의 당수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사형시키고 만다.

한편 통일운동은 오직 민주화운동의 영향 속에서 그 싹을 키웠다. 통일운동에서 초기 민간주체 형성으로 이해되는 1961년의 남북교류운동도 60년 4월 혁명의 후광에 다름 아니다. 1972년 남북당국이 합의한 7.4공동성명도 민주화 없이 이루어진 탓에 독재체제 강화로 귀결되었다. 1988년 민간 차원에서 남북교류운동의 물결이 새롭게 생성되었을 때, 그것은 87년 6월 항쟁이 만들어 놓은 민주체제의 연장이다.
▲ 1989년 임수경 방북 ⓒ연합뉴스

민간 통일운동은 1988년에 비로소 유의미한 세력으로 형성되었다. 민간통일운동은 초기에 '북한 바로알기운동'을 시작했지만, 이 운동은 1996년에 '북한 수해 지원'운동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구체적인 이해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을 통해 북은 '위협적인 존재'에서 '도와주어야 할 어려운 동포'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한편, 민간통일운동은 북과의 관계 형성을 놓고 정부와 경쟁했다. 1989년 재야운동단체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고문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북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난 것이 그 시작이다. 문익환 목사는 북 조국평화통일위원장 허담과 협의하여 4.2공동성명을 만들어낸다. 이 성명에서 남북은 경제, 사회문화 분야와 정치·군사 문제의 동시적 추진을 합의하는데, 이는 2000년 6.15남북공동성명에서 재현된다. 정부의 '창구단일화'에 맞선 민간통일운동의 '자주교류운동'은 대학생 임수경의 방북과 1990년 민간에 의한 범민족대회 소집으로 절정에 달하게 되고, 이러한 경쟁구도는 1991년 남북 총리급 회담에서 '남북사이의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대한 합의서'가 채택되면서 변화된다.

대북화해협력 정책 10년과 통일운동

▶ 대북 화해협력 정책의 네 가지 의미


1998년 '국민의 정부'에 의해 대북 화해협력 정책이 마련되고, 2000년에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것은 통일운동의 관점에서는 대략 네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통일운동이 남북 사이의 실질적인 재통합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반 영역의 교류와 통합을 위한 주체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게 된다.

두 번째는 통일운동이 비로소 한반도적 관점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한반도적 관점이란 두 가지 의미이다. 통일문제의 주체가 남과 북이라는 의미에서의 당사자 문제와 더불어, 북이 또한 통일운동의 한 영역으로 포착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는 통일문제에 대한 이해에서 북의 인식과 동기, 능력이 주요 구성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남한 내부에서도 통일운동의 주체가 민간과 당국의 공동주체로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공동주체형성은 상호 통합력이 통일운동의 발전을 살피는 기준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네 번째는, 그럼에도 이러한 변화가 우리의 통일문제를 옥죄어 온 외적 관계를 변화시킬 만큼의 민족역량으로 형성될 것인가 하는 점에서 하나의 시험무대가 되리라는 것이다.

▶ 통일운동의 대중화와 남북관계의 성장

화해협력 정책은 무엇보다도 교류의 확대로 표현된다. 국민의 정부는 기존 정부가 취했던 창구단일화를 해소하고 교류 주체의 자율적 성장을 기대하였다. 2000년 정상회담을 통해 북이 호응해 오면서 정책 조응력은 증폭되었다. 교류를 이끈 선두주자는 문화예술과 방송분야였다. 이들은 강력한 매체를 무기로 정부를 견인하였고 남북관계 변화들을 널리 알렸다.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을 대북지원과 교환하면서 정책 효과를 증폭시켰고, 기업과 더불어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남북 철도, 도로 연결이라는 3대 경협 사업에 자리를 잡았다.

시민사회 진영은 2000년 10월 북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행사 참관을 시작으로 각계각층의 민족공동행사를 진행하게 된다. 민족공동행사의 경우, 이 공간은 90년대 내내 정부의 창구단일화와 민간의 자주교류 사이에 선 대결점 이었지만 2001년 들어 해소되었다. 남북 당국은 남북 각각의 민간에서 제기한 6.15민족통일대토론회를 승인했다. 그러나 민족공동행사는 2001년 8.15평양대회에서 상호간 사회적, 문화적 차이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남북, 남남 사이의 갈등을 격화시키기도 했다.

민족공동행사는 2002년 8.15에 남북교류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북 대표단의 서울 답방이 성사되고, 2003년 8.15 2차 평양대회가 무난히 끝나면서 서울과 평양을 오고가는 유일한 민간행사로 정착되었다. 민족공동행사가 남북관계 성장에 기여한 가장 유력한 지표는 2005년에 나타난다. 그 해에 평양에서 6.15공동선언발표 다섯 돌 기념 통일대축전을 개최하여 남북 당국 간 관계를 매개, 제2의 6.15시대라는 남북 밀월관계를 구축하는 데 일조한 것이다.

남북공동행사의 틀 내에서 부문, 단체별 교류도 활성화되었다. 우선 노동, 농민, 여성, 청년 등 계층분야이다. 민주노총, 한국노총, 조선 직총 등 남북의 노동계는 2001년부터 노동절을 남북공동기념행사로 정착시켰고, 2007년의 경우는 북의 노동계 대표를 창원으로 불러 들였다. 아직 산업현장에서 형성되는 생활, 기술, 문화 등으로 소재가 확산되지는 못하고 있지만 교류는 정착단계로 나가있다. 남북농민단체들은 매년 봄 모내기용 비닐과 비료를 북에 지원하면서 비교적 쉽고 빠르게 교류에 접근했다.

2001년부터 2박 3일 일정에 500여명이 참여하는 남북농민합동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청년학생의 경우, 북의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이 참여하는 만큼 다른 부문보다 정치 의제가 강한 편이다. 2002년부터 연례적 공동행사가 진행되고 역사유적 탐방과 같은 쉬운 소재로 접근하려고 노력하지만 아직 학생 대중 행사로까지 확산되지는 못하고 있다. 여성계의 경우도 여연, 여협, 종교여성 등 여성계 전체가 망라되는 넓이로 대중화의 기초가 튼튼한 편이다. 여성계의 주요 소재는 평화문제이다. 그리고 만남의 형식도 금강산 여성대회(2002), 평양 여성연단(2005), 평양 남북여성대표자 회의(2006) 등으로 정형화되어 간다. 영유아, 산모 건강, 유아교육 등 복지 분야로의 의제 확대를 기대한다.

다음은 문인, 교사, 언론인, 학계 등 전문분야 교류이다. 한국작가회의, 한국문인협회, 조선작가동맹 등 남북문인 교류의 경우는 2005년 백두산 통일문학의 밤 이후 공동기구 구성으로 앞서 나가있는 상태다. 6.15통일문학상과 협회 기관지 '통일문학' 발행을 결정하였다. 한국교총과 전교조, 그리고 북의 교육문화직업동맹 등 교육계도 2003년 평양 방문 이후로 교류를 시작했다. 6.15공동수업과 같은 교육프로그램을 시범적으로 시도해보기도 한다.

언론인 교류는 2006년에야 시작되었다. 남북언론인 토론회가 그해 11월에 금강산에서 개최되면서 부분적으로나마 독자적인 교류가 시작되었다. 학계의 경우는 역사와 언어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남북역사학계는 2001년 2월부터 '일제 조선강점의 불법성'을 주제로 첫 행사를 개최한 이래 고구려 등 고대사에서 깊이 접목하였다. 언어학계의 경우는 남북언어사전 편찬에 합의, 사전의 이름을 겨레말로 하여 공동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외에도 체육과 문화예술 공연, 종교계 교류와 북의 문화재 복원 사업, 방송, 출판 등 분야에서 속속 교류 주체들이 형성되고 사업영역들도 확장되어 갔다.

시민사회 진영의 남북관계 수준은 다양하지만 남북 공동기구를 구성하는 흐름으로 접근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각계각층 교류의 통합체로 2005년에 결성된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와, 동일한 이름의 북측위원회의 존재, 그리고 공동의 기구로서 6.15민족공동위원회를 구성해 두고 있다. 이 관계망에서 6.15와 8.15공동행사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틀은 통일운동에서 중요한 네크워크 중심이 형성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음으로는 분야별 공동기구로 2006년에 남북의 작가들이 결성한 6.15민족문학인협회, 2004년에 남북의 역사학자들이 만든 남북역사학자협의회, 2005년에 남북의 언어학자들이 만든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위원회가 있다. 이러한 경향은 향후 전문분야별로는 남북 사이에 공동기구를 구성하게 될 것임을 예측하게 한다. 남과 북의 공동기구는 남북연합단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민간형 기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2005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8.15대축전 장면 ⓒ연합뉴스

화해협력정책은 참여 정부 후반기에 이르러 평화문제에서의 성과를 기초로 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킴으로서 연속적 의미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철도와 도로 개통, 서해안 공단, 금강산 육로관광, 이산가족 문제, 사회문화체육교류 등 1차 정상회담에서의 5대 약속은 이행되었고, 공동어로수역, 제2경제특구와 해주항 활용을 포함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 등 그간 북 군사당국의 비협조로 정체되어 있었던 것들은 2차 회담에서 풀렸다. 정부는 2차 정상회담을 이끌어 냄으로서 제몫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2차 정상회담의 성사는 북 당국의 역할에도 긍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늦은 선택의 책임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북은 화해협력 정책 10년의 과정에서도 경제성장 등 통일의 조건 구비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미국에 의한 압박 등 외부적 요인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상쇄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핵심은 만성적 저성장이 개혁을 더디게 하고 경쟁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남북의 성장속도 차이와 맞물려, 북의 변화에 대해 많은 이들이 그 속도가 너무나 더딘 것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북은 체제 유지의 틀 속에 머무르고 만 것이며, 이는 북의 당국이나 민간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 민족화해운동 10년 소결

화해협력 정책이 적용된 기간의 남북 관계는 통일문제를 민족 재통합 문제로 논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나아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비로소 평화공존으로 이동 중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정치가 선도한 경제, 인도주의, 사회문화, 군사 등 교류 및 협력의 증대와 관계망의 결과가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미국 중심의 패권구도가 전 세계적으로 작동하는 가운데서 한반도가 평화체제 구축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은 민족화해운동의 가장 큰 결실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남북은 평화와 경제, 환경과 문화라는 코드에서 최소한이나마 미래의 구상을 맞추어 낼 수 있게 되었다. 바로 2차 정상회담이 그 수준에 도달하게 해 주었다. 그러므로 민족화해운동은 현 단계에서는 2차 정상회담의 수준까지 모든 관계망을 끌어 올리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일 것이다. 남북관계를 이루는 모든 관계망에서 2차 정상회담이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데 대해서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해협력정책의 계승과 통일운동의 과제

화해협력 정책 10년의 결과 남북의 관계망은 매우 넓고 다양하게 포진해 있다. 2차 정상회담으로 남북의 당국 관계는 정상회담, 총리급회담, 부총리 급 경제회담, 장관급의 국방,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사회문화협력 등으로 그 형식이 강화되었다. 남북 민간관계는 일부에서의 공동기구 구성 속에서, 다양한 관계의 상시적 협의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 관계이다. 그런데 이 같은 관계들은 형식에 비해 내용은 상대적으로 얇은 편이다. 서로 간에 완전히 등 돌리지 않는다 해도 사건 하나에 따라 틀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그 가장 위험한 순간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경험이 추억된다.

하나는 한미관계에서 대북 압박 구상이 드러날 때이다. 이 문제는 주로 한미정상회담을 전후하여 나타났다. 2001년 봄에 그러했고, 2003년 초에 또한 그러했다. 이 시기에 북은 남북관계를 일정 기간 단절시켰다. 다른 하나는 남북관계에서 자극적 요소가 발생하는 경우이다. 2004년에 베트남에 상주하던 탈북자 입국이 그러했고, 2006년에는 북 미사일 발사에 따른 대북지원 불가로 인해 남북은 상호 냉랭했다. 일이 잘 진행이 되다가도 순간 틀어져 버릴 수도 있는 이러한 관계의 깊이가 남북교류를 일컬어 '단절과 재개의 반복 속에서 경향적으로 상승해 온 남북관계'라 명명하게 했다. 새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가장 경계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위험요소는 여전히 많은 데 비해 이를 상쇄할 2007년의 상승요소는 계승 점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007년의 상승요소라 할 때 그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2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계승 문제다. 지금도 새 정부 관련 인사들은 2차 정상회담의 합의 사항 이행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내 놓고 있지만 이는 성급하고도 가벼운 처사이다. 지금 남북 정부 간 관계는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충분히 진지하게 북과 협의하면서 정부 부처나 민간 전문가, 의회와 더불어 논의를 전개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국민들은 대북정책 변경 전체까지를 새 정부에 맡기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북이 모든 협상에 힘을 들여 임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신뢰가 깨어졌을 때 그 책임 소재가 쟁점이 될 소지가 충분히 있어 보인다. 2007년의 상승요소 중 다른 하나는 북미관계이다. 현재 이 위험요소는 안전지대로 들어가 있지만 역시 세밀하게 관리하지 않는다면 위험해 질 소지가 다분하다. 북핵문제는 미국과 중국 등과 더불어 매우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해결의 문턱에까지 와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기분에 따라 목소리를 내서 상황관리에 혼선을 초래하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

이렇게 제기하는 논점들은 새 정부 들어 통일운동이 낼 초기 목소리들 중 하나이다. 이는 화해협력 정책 시기의 정부-민간 공동 주체 관계가 일단 분리되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제 정부를 견제하면서 비판하는 시민사회의 위상 속에 민간 통일운동이 위치하게 된 셈이다. 민간통일운동은 다른 측면에서 남북교류의 제반 영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대북 화해협력이라는 일관된 자기 목표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세 가지 측면이다.

하나는 교류 영역의 확장과 교류 주체의 증가이다. 새로운 영역은 창출해야 하고 기존 영역은 심화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남북역사공동 복원 사업을 들 수 있다. 이 분야는 활발한 분야로 지원을 늘려 가면 더욱 활성화될 여지가 있는 분야이다. 신규분야로는 문화산업이 있을 수 있다. 소프트웨어 분야의 경우 북도 관심이 높아 상호 접근성이 크다.

두 번째는 대북교류협력 네트워크를 심화시키는 것이다. 계층별, 전문 분야별, 사업별 교류 주체들 사이의 관계망 구축을 통해 화해협력의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제안은 민간교류의 자기반성에 기초한 것이므로 의식적 노력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세 번째는 남북관계의 신뢰 증대이다. 남북관계 하는 사람들이 미움이 더 크다는 말이 있듯이 남북의 사업자간 관계에서 피곤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북을 옥죄는 여러 상황에 북의 관계자들이 짓눌려 있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인 만큼 남쪽에서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할 일이다.

민간 통일운동은 평화운동과도 접목해 가야 한다. 평화문제는 남북관계에서 가장 규정력이 큼에도 미국과 북이 관계되어 있어 일정 거리를 두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정부의 평화관리 능력은 과거보다 취약할 것이 분명한 만큼 이 영역에 대한 민간통일운동의 세력화는 필수이다. 이미 평화운동을 해 온 단체들이야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통일운동에 관계한 민간운동 체 전반에 평화 문제를 다루는 기관들을 설립할 필요가 커졌다.

민간 통일운동은 국민과의 소통에 적극 나서야 한다. 그간 남북교류가 확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은 여전히 '너희들끼리'의 잔치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는 남북관계의 문제를 여전히 이벤트 식으로 접근하는 데서 생겨나는 한계이다. 북의 처지 상 이벤트는 제한될 수밖에 없고 이 공간은 여전히 좁은 것이다. 여기서는 생활화의 발상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 교육받은 이들이 생활영역의 구석구석에서 주민과 함께 살아가는 운동을 만들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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