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선언 이행 의지 표명
올해 공동사설에서 북한이 내세운 통일구호는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통일, 평화번영의 새시대를 열어나가자!"이다. 지난해 2차 남북정상회담과 10.4선언을 높이 평가하고 그 이행에 주력하겠다는 입장 표명이다.
특히 공동사설은 차기 정부가 10.4선언을 이행한다면 남북 협력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피력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민족공동의 번영을 위하여 특색있는 기여를 하여야 한다", "북과 남의 정당, 단체들과 각계각층은 주의주장과 당리당략을 떠나 민족의 대의를 앞에 놓고 굳게 단합하여 겨레의 통일념원을 실현하는데 모든 것을 복종시켜나가야 한다"는 대목에 주목해야 한다.
북한의 이같은 원칙적 방향은 지난해 대남관계자들의 언급을 통해서도 예상됐다.
지난해 12월 초 평양을 방문한 남측의 한 관계자는 "북측 민족화해협의회 관계자들은 6·15공동선언과 2007남북정상선언 이행을 강조하면서 한나라당이 6·15공동선언을 이행하겠다고 나오면 굳이 배제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라고 말했다.
재일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 평양특파원도 "10.4선언에 기초한 북남관계의 발전에 대한 조선(북)의 의지는 확고하다. 남조선에서 정권이 바뀌어도 북남간의 합의가 성실히 이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다"면서 6.15공동선언과 10.4공동선언의 이행을 기대하는 북한 당국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노무현 정부 소극적 태도로 김영남 위원장 방한 무산
그러나 북한의 고위 대남관계자들은 10.4선언 이행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소극적 태도에 실망감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11월 말 '임기 내 4자 종전선언'이 사실상 어려워진 것으로 판단한 노무현 정부는 대북정책에서 소극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대선에서 여권 후보의 패배가 기정사실화된 상황에 따른 부담감도 대북정책 변화에 한 몫을 했다.
이같은 입장 변화를 잘 보여주는 사안이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서울 방문 건이었다. 그 동안 북한에 여러 차례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요청했던 노무현 정부가 막상 북한이 날짜를 잡자고 제안하자 '불가' 입장을 통고한 것이다.
이로 인해 지난해 11월 27일 평양 남북 국방장관회담 첫날 전체회의를 앞두고 남한 측에서 회담장에 걸린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상화를 떼라고 해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했던 북한의 대남관계자들의 입지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지난해 12월 말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추진위원회 제1차 회의를 비롯해 각종 남북간 회의가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차기 회담 일정만을 잡는데 그쳤다.
새 정부 출범 때까지 관망
북한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확정될 때까지 표면적으로 관망 자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말 해외에 나와 있는 북한의 한 관계자는 "북은 10.4선언에서 합의된 일정을 차질 없이 진행해 나가면서 새 정부가 어떤 대북기조를 확정해 들고 나올지를 지켜볼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올해 상반기 남북관계는 물밑접촉을 통해 서로간의 정확한 입장을 살펴보는 탐색전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추진사업, '3통문제'(통행, 통신, 통관) 해결, 개성-평양간 도로·철도 개보수 사업 등이 순연되거나 난관에 봉착할 가능성이 커졌음을 의미한다.
다만 기존에 남한의 기업, 지자체, NGO 등이 북한과 합의 또는 추진하고 있는 사업들에는 큰 영향이 없을 듯하다. 북한은 공동사설에 "북남협력사업은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도모하고 평화와 번영, 통일을 이룩해나가는 숭고한 애국사업이다"라며 "북남 경제협력을 공리공영, 유무상통의 원칙에서 다방면적으로 추진해나가는 것을 장려하여야 한다"고 적시해 남북경협에 기대감을 나타냈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한미동맹의 강화와 엄격한 상호주의 적용, 인권문제 해결과 개혁·개방을 강한 목소리로 요구할 경우이다. 그렇게 될 경우 지난해 형성된 '6자회담과 남북관계의 선순환 구조'가 흔들릴 위험성에 빠지게 될 것이다.
공동사설에서 북한은 "외세에 의존하여서는 어느 때에 가서도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통일에로 나아가는 시대적 흐름에 등을 돌려대고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방해하는 친미사대와 매국배족행위를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고 촉구하고, "북남 관계발전과 통일에 리롭게 법률적, 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할 것을 주장했다.
이외에도 공동사설은 남한에서 한미 합동군사연습 및 미군기지 철폐, 동족을 '주적'으로 삼는 대결관념 해소, 군사적 분쟁 요소 제거 등을 제기했다. 최근 몇 년 간 나온 북한의 공동사설과 비교해 보면 그 어느 때보다 톤이 낮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북한이 주장하는 남북관계의 '근본문제' 해결을 담고 있다. 남북관계가 삐걱거릴 경우 북한은 이같은 '근본문제' 해결을 강하게 들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
'인민생활제일주의' 천명
올해 북한의 신년 공동사설은 "전당, 전군, 전민이 떨쳐나 경제강국건설을 위한 총공격전을 벌려야 한다"는 소제목 하에 경제 분야에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했으며, "오늘 강성대국건설의 주공전선은 경제전선"임을 재확인했다.
특히 처음으로 '인민생활제일주의'를 내세우며 "올해를 인민생활향상에서 실질적인 전환이 일어나는 보람찬 해, 기쁨의 해로 되게 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건설을 실현하는 기본원칙으로는 △우리 경제구조의 특성을 살리면서 인민경제를 기술적으로 개건해나가는 원칙 △최대한의 실리를 보장하면서 인민들이 실질적인 덕을 보게 하는 원칙 △내부의 원천과 가능성을 남김없이 동원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면서 대외경제관계를 발전시키는 원칙 등 3가지를 내세웠다.
사회주의경제 운영을 시대적 흐름에 맞게 개선, 개선하고, 실리주의를 지향하며, 대외개방을 확대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지난해 11월 30일 북한은 15년 만에 전국지식인대회를 열고 김일성 주석 탄생 100주년인 2012년까지를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기한'으로 설정했고, 이번 신년 공동사설에서도 이를 다시 환기시켰다.
북한의 이러한 구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외부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조건, 즉 북미관계와 남북관계 발전이 필수적이다. 북한이 2000년대에 들어와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를 병행 발전시킨다'는 전략을 일관되게 추진해 온 것도 이같은 상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매우 불완전한 초보적인 상태의 공존관계'에 머무르고 있는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확고한 평화공존관계'고 전환시켜 나가려는 구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2007남북정상선언에서 '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의 원칙'에 기초해 서해평화지대 설치를 수용하고 개성공단의 3통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선 것도 이 같은 포석이 깔려 있다.
'6자회담과 남북관계 선순환' 기조 유지 중요
따라서 올해 남북관계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태도, 북미관계와 6자회담이 어느 정도 선순환구조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까지의 반응을 볼 때 북한은 한나라당이 북핵 폐기와 상호주의를 촉구하는 것에 개의치 않겠지만 북한의 개혁개방을 강하게 촉구하거나 최고지도자에 대해 거론한다면 강경입장으로 돌아설 수 있다. 이명박 당선자가 당선 직후 언급한 것처럼 한미동맹, 더 나아가 한미일동맹을 강화해 대북 압박정책을 펼 경우 북한은 '남북·북미관계 병행 발전 노선'에서 북미관계에 주력하는 통미봉남 정책으로 돌아설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명박 당선자 측과 북한간의 첫 비공식 접촉이 있었고, 그 결과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북미관계가 순항한다면 남북관계는 급격히 나빠지지는 않을 듯하다. 이와 관련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남쪽의 정권교체로 북한이 남북관계를 주도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며 "결국 새 정부에서 어떻게 해 나가는지가 북한의 태도를 결정짓는 결정적 변수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남쪽의 새 정부가 남북관계에서 북한에 대해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형국임 셈이다. 그만큼 남북관계를 평화적이고 협력적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새 정부의 부담도 클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10.4선언으로 마련된 남북대화의 기본틀을 유지하면서 한강 하구에 남북경협단지를 조성하는 '나들섬 계획' 등을 결합하는 방식을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서해안 특구 등 일부 합의사항은 미뤄지거나 폐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올해 남북관계의 또 다른 변수인 북미관계도 올해 상반기까지는 순항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여전히 6자회담의 10.3합의를 이행해 빠른 시간 내 미국의 경제제재를 해소시키고 4자 정상회담 통해 북미관계를 완전 정상화하겠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대북 중유 제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연내 북핵시설의 불능화가 완료되지 못했고, 2단계 북핵불능화 단계의 핵심사안인 추출된 플루토늄의 양과 모든 핵 프로그램의 신고 등이 지연되고 있지만 북미간 대화기조는 아직까지 흔들리지 않고 있다. '행동 대 행동'원칙에 따라 북미관계가 진행될 경우 상반기에 4개국 정상회담을 통한 종전선언의 가능성도 남아 있다.
2002년 2차 북핵문제가 불거졌을 때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6자회담과 남북관계의 선순환'을 통해 한반도비핵화를 추구했고,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북한도 이같은 틀에서 지난해 6자회담과 남북정상회담의 합의사항 이행을 강조하고 있다.
새로 출범할 이명박 정부가 이미 표방한 대로 남북경협의 방식, 남북대화의 의제 순서 등에 대한 조정이 불가피하더라도 이같은 기본축만은 유지하는 지혜가 절실한 것 같다. 지난 수년간 정착된 남북대화의 기본틀을 허물기는 쉽지만, 한번 중단된 남북대화를 다시 복원하는데는 유무형의 값비싼 대가를 치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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