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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산실 인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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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삼국유사의 산실 인각사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49ㆍ끝>

인각사는 그 자리잡은 곳의 한적함이며 아담한 규모가, 유명짜한 큰절들과는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 인각사를 처음 가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럴 듯한 절이, 그럴 만한 곳에 있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애개 겨우...' 하면서 인각사의 자그마한 규모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은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인각사가 외진 곳의 평지, 도로변에 나지막하게 앉아 있어 전혀 도드라지는 면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찾는 사람들이 적은지 모른다. 내 경우, 인각사를 처음 찾아갔을 때에 절이 아담하고 조용했던 점이 제일 눈에 띄었고 그 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었다.

그렇다고 인각사에 눈요기 거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절이 앉아 있는 곳의 경치가 얌전하다고 할 수 있다. 차량 통행이 드문드문한 포장도로 옆으로 물 맑은 내가 굽어 흐르고, 내 건너편으로 학소대라는 아담한 절벽까지 있어 풍광이 제법 그윽한 데다, 화산 쪽에서 야금야금 뻗어내려온 야산 자락이 넓고 순하다. 그래서인지 앞뒤로 거느린 너른 마당하며, 평지에 앉아 있는 몇 채 안 되는 인각사의 전각들도 여유롭게 느껴진다. 산골임에도 보는 이의 마음이 트이는 그런 곳이라고 할 수 있다.
▲ 인각사 보각국사 부도. ⓒ김대식

이렇게, '작고 아담하다'고 말할 수 있는 절의 역사적 무게는 그러나 대단하다. 그 무게는 전적으로 인각사가 '『삼국유사』의 산실'이라는 데에 기인한다. 『삼국유사』. 두 말 할 필요없는 우리 민족 최고의 고전이다. 그 『삼국유사』라는 책이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 전 이곳 인각사에서 일연 스님에 의해 쓰여졌던 것이다.

기록이나 발굴결과에 따르면 인각사는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쓰기 훨씬 전, 8세기 중엽 내지 9세기 중엽에 이미 창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만 창건 이후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자세치 못한 따름인데, 인각사가 고려 충렬왕 때에 일연 스님의 하안소로 정해져 일연 스님이 주석하게 되고 구산문도회가 두 번이나 열림으로써 유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연 스님이 작고한 후, 인각사는 다시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져 외롭게 명맥을 이어오다가 최근 들어 다시 부산한 세월을 맞이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전각들이 중수되고, 절터에 대한 발굴이 계속되고, 무엇보다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간행을 기리는 일연 기념 학술제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일연 스님 입적 이후의 무심했던 세월과 그리고 인각사가 겪어온 고난을 생각하면 그지없이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나는 인각사를 기회만 되면 들르는 편이다. 서울에서 경주를 오가는 길에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할 때가 많은데 여주에서 충주를 거쳐 문경 쯤 오게 되면 어느 길로 갈지 노선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고속도로를 그대로 달려 대구로 해서 경주로 가는 길이 가장 빠르지만 재미는 없다. 그래서 딱히 들를 데가 없으면 대개, 문경 새재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안동 쪽으로 방향을 잡곤 한다. 문경에서 안동 가는 34번 국도가 비교적 한가하고, 가다가 마음내키면 회룡포라든가, 하회마을 또는 병산서원 중에서 하나를 골라잡고는 쉴 참 내어 구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안동을 지나게 되면 자연스레 군위를 거치게 되고, 군위에 접어들어서는 으례 인각사를 들르게 되는 것이다. 대개는 그렇게 나 혼자서 잠깐 들렀다가 가는 것이지만, 심심치 않게 인각사를 안 가보았다는 동행이 있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반드시 인각사로 안내하여 구경을 시켜 준다. 그렇다고 내가 인각사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연전에 인각사 주지 상인 스님과 수인사 겸해서 차 한 잔 같이 한 적이 있을 뿐, 거기 분들을 안다고 말할 처지도 못된다.

그럼에도 동행없이 나 혼자일 경우에는, 저녁 무렵 또는 밤 늦게라도 대개 인각사는 들러보는 편이다. 어둔 녘에 인각사에 들러 혼자서 새삼스레 절을 돌아본 적도 여러 번이다. 언젠가는 저녁 늦은 시각에 혼자 차를 몰고 내려가면서 인각사를 들러야지 작정했다가 군위 읍을 빠져나와서, 멀찌감치 화산(華山) 위에 걸린 달과 문득 마주친 적이 있었다. 화산은 인각사를 품고 있는 산이다. 그때 화산 위에 높다라니 떠 있는 달 모습에 차를 멈추고는 한참 동안 달만 바라보았었다. 그리고는 '인각사, 잘 있겠지' 하고 그냥 차를 몰아 갑령고개를 넘어 경주를 향해 밤길을 달렸던 적도 있다.
▲ 인각사 보각국사비 뒷면. ⓒ김대식

인각사에 남아 있는 유적 중에 일연 스님과 관계되는 것은 팔각원당형의 보각국사탑, 즉 일연 스님의 부도와 그리고 보각국사비가 있다. 부도탑은 여러 차례 쓰러뜨려졌지만 그때마다 다시 세워져 원래의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인각사 국사전 뒤 모퉁이의 비각 속에 있는 보각국사비의 모습은 처참할 지경으로 깨어지고 떨어져나가고 하여 원래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비(碑)'라기보다는, 무언가가 깨어진 파편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나마 그 파편의 앞면에서는 전혀 글자를 읽을 수 없고, 뒷면에만 몇 글자가 남아 있어 간신히 읽힐 뿐이다.

이 비가 이토록 처참한 모습이 된 것은 비에 새겨졌던 글자 때문이었다. 일연 스님이 입적한 후 비를 세우면서 중국의 명필 왕희지의 글자를 집자(集字)해서 비문에 썼던 것이 화근이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임진왜란 때에 쳐들어왔던 왜군이 왕희지의 필적을 알아보고 쓰러뜨려 탁본을 하고는 비 자체를 일본에 실어가려고 시도했다가 중간에 버리고 갔다는 일화도 있다. 그렇게 비문 글자가 왕희지의 글씨라는 사실이 일찌감치부터 알려졌던 덕에 너도나도 비문을 탁본한다고 덤벼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보니 비석 관리 맡은 사람들이 닥달을 당하기 일쑤였고 마침내는 탁본 등쌀을 이기지 못한 관리인들이 비석을 깨뜨렸다는 얘기가 전한다. 일연 스님을 위한다고 했던 일이 도리어 비석에 화(禍)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다행한 것은 보각국사비가 그렇게 깨어져 거의 없어지다시피한 와중에도 양기(陽記)와 뒷면의 음기(陰記)가 각각 탁본으로 전해 내려와서 비문 전체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를 근거로 최근에는 보각국사비가 복원되어 세워지기도 했다.
▲ 인각사 일연시비. ⓒ김대식

* 연재를 마치며

나는 지난 10년 여 동안 혼자서 『삼국유사』를 읽고 그 현장을 찾아보는 일종의 순례를 해오면서, 말하자면 순례기를 써 왔다. 지난 3년 동안 이곳 <프레시안>을 통해서 발표된 것은 그 순례기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중간 점검 삼아 그 순례를 잠시 쉬면서 순례기 또한 잠시 쉬고자 한다.

『삼국유사』에 관해서는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 책 한 권이 "조선 상대를 혼자 담당하는 문헌"이라든가, "문학적 상상력과 영감(靈感)의 원천"이라든가 하는 선학들의 평가가 있고 보면 『삼국유사』는 참으로, 차근차근 음미하며 두고두고 캐내어야 할 보배로운 고전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 나로서는 『삼국유사』를 읽는다든가, 그 현장을 찾는 일은 그만둘 수 없는, 일상의 작업이 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가 될지 모르겠지만, 머지않아 다시 『삼국유사』의 현장에 대한 순례가 재개될 것이다. 그때 다시 뵙게 되기를 희망한다. 지금까지 『현장에서 읽는 삼국유사』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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