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CC(사용자제작컨텐츠)가 유력 정치인 몇 명을 '날린' 지난해 미국 중간선거가 그 레퍼런스였다. 당시 공화당 조지 앨런 상원의원은 인도계 청년을 '원숭이'라고 비하하는 동영상이 '유튜브'에 오르면서 인종차별주의자로 전락, 정치 신인에게 자리를 내줬다. 몬테나 주의 콘래드 번스 공화당 상원의원 역시 육류가공단체가 주최한 농장법안 공청회에서 10초 정도 졸았던 장면이 '번스의 낮잠'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으로 퍼지면서 지역 여론이 악화돼 역전패를 당했다.
그러나 대선이 닷새 앞으로 다가온 14일 현재, 온라인은 썰렁하다. 대형 포탈들은 일찌감치 대선 섹션을 만들어 '대선특수'에 대비했지만 섹션을 찾는 누리꾼은 전체 방문자의 1% 미만이다. 각종 포탈에서 만들어 놓은 동영상 게시판은 'UCC세상'이 아닌 'CCC(캠프제작컨텐츠)천지'가 돼 버렸다.
제대로 된 온라인 담론도 찾아보기 힘들다. 2002년 온라인에서 시작된 '노풍'은 랜선을 타고 확산됐지만 석 달 전 잠시 온라인을 달궜던 '문국현 열풍'은 실제 지지율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촛불집회, 희망돼지저금통 등 인터넷에서 나온 제안이 선거 과정에서 현실화된 사례도 전무하다. 2002년 대선을 통해 나름의 의제설정 기능을 인정받았던 인터넷 매체 역시 기존 언론이 주도하는 담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처럼 온라인 내 여론, 흔히 말하는 '넷심(NET+心)'의 파워가 5년 전에 비해 퇴조한 데 대한 전문가들의 진단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다 노무현 때문"이다.
'재미없는 선거'에 온라인도 저조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10% 남짓으로 추락하던 2006년 중반부터 온라인 기사에는 주제와 상관없이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라는 댓글달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앞뒤를 따질 것도 없이 모든 문제를 '노무현 탓'으로 돌릴 정도로 악화된 여론은 '회고적 투표'의 경향을 강화시켰고,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정치적 파괴력을 입증한 '정권 심판론'은 한나라당에 압승을 안긴 후에도 그 위세를 잃지 않았다.
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 송경재 박사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너무 커서 사소한 변수들이 다 죽어버린 선거가 됐다"고 평가했다. '정권 교체론'의 당위가 다른 이슈들을 잠식했고 당연히 누리꾼들이 토론을 벌이고 여론을 형성할 만한 여지가 좁아졌다는 설명이었다.
송 박사는 또 "세금포탈, BBK 등 이명박 후보의 비리 의혹을 두고 누리꾼들 사이에 비판여론이 형성됐지만 '정권 심판론'의 높은 벽을 넘지는 못했다"며 "선거가 국민 개개인이 의사를 표현하는 축제가 돼야 하는데 네거티브 성격이 강하게 전개되면서 '참견하고자 하는 욕구'를 꺾은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진보의 안방'으로 여겨졌던 온라인에 보수 성향 폴리티즌(정치 관련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네티즌)이 가세하면서 일방적인 쏠림현상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누리꾼들의 정치적 파워가 약화된 것처럼 보인다는 진단도 나왔다.
경희사이버대 민경배 교수는 "온라인 장에서도 정파 간 세력 균형이 생기다 보니 특정 정파 몰아주기 경향이 약화됐다"며 "누리꾼들은 진보성향이라는 공식이 깨지면서 오프라인과 다름없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신문>과 인터넷정치연구회가 지난 6월부터 11월까지 인터넷 트래픽 조사기관 <랭키닷컴>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사이트 수와 접속빈도, 토론 및 댓글 수에서 보수와 진보 진영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2년 선거 당시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는 댓글은 '알바글'로 매도당했지만 이번 선거에선 이명박 후보를 지지한다고 해서 누리꾼의 정체성을 의심받는 일은 없다. 오히려 여권 지지자들이나 문국현 후보 지지자들이 '노빠' 혹은 '문빠' 등의 별칭으로 희화화될 정도로 전세가 역전됐다. 누리꾼 성향의 균질성이 깨진 만큼 집단적 정치력을 발휘하기에도 어려워 진 것이다.
단순 의견 개진도 반복되면 선거법 위반?
전반적으로 '재미없는 선거'가 누리꾼들의 의욕저하로 이어졌다면 2002년에 비해 제약이 심해진 선거법은 그나마 의견 개진이 가능한 범위에도 또 다른 울타리를 만들었다.
현행 선거법 93조 1항은 '선거일 전 180일부터 후보를 지지·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의 인쇄물 등을 배부·살포·상영·게시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위반으로 100만 원 이상의 벌금을 받으면 5년 이상 공직 진출에 불이익을 받게 된다.
이미 각종 포탈과 시민단체 사이트 선거관련 게시판에는 어떤 경우가 선거법 93조 1항 위반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문의나 경찰서에서 수사협조 요청이 왔다며 대처법을 묻는 질문들이 줄을 잇고 있다.
선거법 피해 제보를 받고 있는 대선시민연대의 이지현 간사는 "선거법 93조의 경우 적용의 범위가 넓고 모호하다 보니 지금까지 선거법으로 입건된 경우만 1300여 건에 달한다"며 "2002년 당시 입건이 57건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제한과 제약이 얼마나 엄격해졌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선연대에 들어온 제보 중에서는 BBK 수사와 관련된 <한겨레>와 <오마이뉴스> 기사를 <조선닷컴> 자유게시판에 올렸다는 이유로 수사요청을 받은 경우도 있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이 굵은 글씨 처리를 한 것이 '특정 후보를 반대하는 의사표현'에 해당한다는 이유였다.
이 간사는 "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한 UCC 운영 기준에 의하면 단순 의견 개진의 경우에도 여러 번 반복할 경우 선거에 영향을 미칠 의도가 있는 것으로 간주토록 하고 있다"며 "그 여러 번이 두 번일지, 백 번일지는 엿장수 마음"이라고 했다.
이에 송경재 박사는 "선거법 93조는 미국처럼 안정적인 선거가 이뤄지는 국가에서나 가능한 법을 우리 시스템에 무리하게 적용한 것"이라며 "대선 후보들은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온갖 정치적 발언을 다 할 수 있는데 시민들에게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이라고 비판했다.
송 박사는 최근 논란이 된 '박영선 동영상', '김경준 모친 동영상' 등이 선거법을 피해 유튜브 등 해외 사이트를 통해 공유되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누리꾼들이 약화된 것이 아니라 제도적 장벽이 극복하기 힘들 정도로 높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무조건적인 '정권 심판론'에 이슈를 잠식당하고 '언로'마저 막혀버린 누리꾼들은 2007년 선거의 최대 피해자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누렸던 파워를 5년 만에 오프라인에 찬탈 당한 셈이기 때문이다.
온라인 文風이 微風에 그친 까닭 문국현 후보 캠프 관계자들은 언론사가 발표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올 때마다 "밑바닥 분위기와 다르다"는 불만을 토로한다. 이들이 말하는 '밑바닥 분위기'란 주로 온라인 여론을 말한다. 실제로 문 후보의 홈페이지, 포탈 게시판, 일부 인터넷 매체 댓글 등에서 드러나는 반응만 두고 보자면 문 후보 지지세는 이명박 후보가 부럽지 않다. 주요 게시판이 문 후보를 지지하는 글들로 '도배'되는 상황이다 보니 캠프 관계자들이 6~7% 선에 그치는 실제 지지율을 믿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부는 '문풍'은 선거 막판까지 손에 잡히는 파괴력으로 발전하지는 못하는 모습이다. 이에 대해 민경배 교수는 "문 후보에 대한 누리꾼들의 감성적 접근은 많은데 비해 문 후보가 누리꾼들에게 직접 다가가 스킨십을 하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문 후보 측이 온라인을 '문풍'의 진원으로 정했다면 그들과 함께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노력이 병행됐어야 했다는 지적이었다. 송경재 박사는 "문국현 지지자들의 성향 자체가 '노사모'와는 달랐기 때문에 '노풍'과 같은 바람을 기대한 자체가 무리였다"고 말했다. 노무현 후보의 지지자들은 운동 경험이 있는 386 세대가 주축을 이뤘다면 문국현 후보의 지지자들은 대부분 평범한 누리꾼들이었고 이들의 호감이 열정적인 선거운동으로 이어지기는 어려웠다는 분석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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