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서핑하다 보면 가끔 수학도들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블로그에서 피보나치의 수열이나 황금비를 이용해 사물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분석하는 글들을 만나게 된다. 어려운 기하학이야기를 쉽게 풀어쓴 센스가 돋보이는 이런 글들 가운데 최근에 본 것에는 미모의 여자 연예인의 얼굴까지 황금비를 이용해 설득력 있게 분석해놓은 것도 눈에 띄었다.
예술가들의 관심을 끈 기학학적 비율은 황금비 이외에도 티티앙의 비, 보티첼리의 1/7 비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가운데 황금비가 수학적 의미가 가장 크고 정교해 예로부터 미적 스타일을 개발하는 데 즐겨 사용돼 왔다. 예컨대 파리의 노틀담 대성당의 전면은 아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황금비의 반복에 의해 디자인되어 있다. 이런 사례는 고대 그리스의 신전 건축에서부터 현대 건축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다.
건축물뿐 아니라 현대의 가구, 자동차, 포스터 디자인 등에서도 황금비가 지켜진 아름다운 디자인들이 많다. 특히 언젠가 언급한 적이 있는 바우하우스 디자이너들의 작품에서 황금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래에서 보는 유명한 미즈 반데로이의 의자나 폭스바겐 자동차도 노틀담 성당과 마찬가지로 황금비의 반복을 통해 형태가 전개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황금비는 그렇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일까? 몇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힐데브란트 등이 이야기하는 "체계화된 복잡함(ordered complexity)"이다. 체계화된 복잡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황금비가 주는 아름다움은 황금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황금비가 형태에 어떤 질서를 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형태에 질서감을 주는 것이라면 굳이 황금비가 아닌 그 무엇이어도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체계화된 복잡함이란 무엇일까?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환경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바람에 실려 오는 수많은 냄새와 소리들, 나뭇잎의 움직임이나 낯선 형태 등의 정보를 토대로 먹이감이나 포식자가 어디에 있는지, 자기네 무리는 어디에 있으며 비슷하게 생긴 무리 속에서 어미나 형제가 누구인지를 알아낸다. 이런 정보는 많을수록 좋다. 그래야 더 정확하고 신속하게 판단할 수 있고 생존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구잡이로 수집된 정보들은 어떤 방식으로건 체계적으로 분류돼야 쓸모가 있다. 예컨대 수많은 냄새들을 가족의 냄새, 해가 없는 다른 동물의 냄새, 위험한 포식자의 냄새 등으로 분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냄새를 예로 들었지만 시각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무 둥치와 잎이 빽빽이 들어찬 환경 속에서 안전한 길과 도피처, 먹잇감과 포식자의 존재를 알려주는 여러 시각적 징후들을 분류해야 한다. 만약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킹 코브라를 넝쿨로 분류하게 되면 그 개체의 생존은 무척 위태로울 것이다.
미적 원리
쉽게 말해 우리는 생존을 위해 가급적 많은 정보를 수집하려는 습성과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려는 습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런 습성을 갖고 있는 덕분에 복잡하면서도 이미 체계화돼 있는 환경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예컨대 아래 그림과 같은 풍경을 보면 우리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끄는 것은 중앙 하단에 있는 마을의 모습이다. 상단에 있는 숲 만큼이나 복잡하지만 마을의 모습에서는 숲에서 보기 어려운 어떤 질서를 읽을 수 있다. '체계화된 복잡함'이 있다는 말이다.
체계화된 복잡함을 갖고 있는 대상들은 생존에 필요한 중요한 정보를 많이 내포했을 가능성이 큰 것들이다. 그러니 그런 대상에 시선이 우선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런 대상들 가운데 체계화된 질서에서 정교함이나 규칙성 등이 두드러질 때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방문객들이 탄성을 자아내는 영국 엑시터 대성당의 인테리어디자인은 체계화된 복잡함이 주는 아름다움의 전형적 사례 가운데 하나다. 물론 이 대성당의 인테리어에서도 황금비를 찾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질서 그 자체다. 우측 그림을 보면 흰 선으로 표시해놓은 아치 형태가 여러 단위로 반복되고 있어 복잡한 기둥과 창문으로 가득한 인테리어에 질서감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힐데브란트처럼 체계화된 복잡함이라는 정교한 개념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많은 철학자들이 아름다움의 한 가지 근원으로 다양성과 통일감의 함수관계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예컨대 라이프니츠는 "최대의 다양성 속에서 최대의 질서가 있을 때 완벽함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쉽게 말해 변화무쌍한 것처럼 보이는 날씨 속에는 4계절이라는 질서가 숨어 있고 이 4계절을 통해 지구와 태양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듯,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와 색채의 구성이 잘 조직화되어 있다면 우리는 아름다움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힐데브란트의 주장과 맥이 통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느끼는 미술품이나 디자인의 아름다움이 모두 이 한 가지 원리에서 나온다고 볼 수는 없다. 인간의 마음이란 항상 움직이고 각양각색이어서 아름다움의 원리도 한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체계화된 복잡함이 유일한 미적 원리는 아닐지라도 매우 중요한 원리인 것은 분명하다. 서구의 미술계와 디자인계에서는 이 원리에 대한 천착이 있었다. 바로 모더니즘이 그것이다.
구체적인 스토리나 대상을 일체 배제하고 형태와 색채, 구도만으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미적 구성 원리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시기를 통해 서구에서는 미적 원리에 대한 기초를 단단히 세웠다. 대학에서는 이를 가르쳤고 화랑을 찾은 대중들의 미적 교양은 높아졌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도 바우하우스 관련 서적이 수십 권이나 저술될 정도로 모더니즘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하다.
'영감'에만 의존하는 한국 디자인
안타깝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부분이 상당히 부족해보인다. 전반적으로 우리 디자이너들의 미적 기초는 약해보이는데, 그 원인 가운데 하나가 체계화된 복잡함과 같은 미적 원리를 습득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반대로 우리 디자인계는 영감이란 것을 중시한다. 그런데 그 영감이란 것이 새로운 미적 원리에 대한 것이 아니고 이것을 건너 뛴, '당장의 디자인에서 풀어야 할 문제에 대한 반짝하는 아이디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적 기초가 부족하다 보니 응용력이 약하다. 디자인할 대상이 바뀌거나 소속회사를 바꾸면 상당기간 헤매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바로 기초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미적 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치는 듯 한 포스트모던 디자인들도 좋은 것들을 추려놓고 보면 나름의 원리를 갖고 있는 게 대부분이다. 다만 그 원리가 과거의 모더니즘 디자인에 비해 더 복잡해지고 중층적이어서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모더니즘 디자인의 형식주의에 대한 식상함을 극복하기 위해 미적 원리를 더 중층적으로 적용해 형식주의를 깊숙이 숨긴 것이 포스트모던 디자인의 한 가지 특징인 것이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베컴 스타일을 보자. 격식을 파괴한 듯 전통적인 검정 슈트에 바랜 청바지를 입고 있지만 이는 저채도의 청색 옆에 검정색을 배치해 청색을 실제보다 더 밝고 맑게 보이는 전통적인 배색원리의 하나다.
그러므로 미적 원리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 심미적 기초를 다지는 길이며 디자인 현장에서의 응용력과 실무능력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어떤 디자인 능력은 배우는 나이가 어릴수록 유리한 것도 있다. 그러나 미적 원리는 그렇지 않다. 지금부터라도 좋은 디자인들을 보면 숨어 있는 미적 원리를 분석해보고 기억하려는 태도만 가지면 되는 일이다. 그런 태도가 우리 디자인계의 저력을 키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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