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 두 나라의 '보통국가화'의 중심에 '일본인 납치문제'가 있다. 이는 일본정부에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주권 유린 행위로 대북관계에 있어 일본 여론의 핵이 되고 있다. 북한은 납치 문제는 이미 해결됐으며 일제의 종군 위안부 동원 등 인권유린 문제부터 반성하라고 주장한다.
일본인 납치문제는 미국의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와 직결된다. 일본의 거듭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테러지원국 해제는 내년 1월 중순에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는 지난 15일 미 의회에서 하원 외교위원회 랜토스 위원장과 공화당 간사를 만나 북한 핵 불능화와 핵 시설 신고에 맞춰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려는 행정부의 입장을 설명하고 의회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러한 미국의 입장은 미일정상회담에서도 확인됐다. 지난 16일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4월만 하더라도 아베 신조 당시 총리와의 회담에서 납치문제에 대해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 "북한의 테러지원국가 지정 해제에 있어선 납치문제를 고려할 것"이라고 약속 했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납치문제를 테러지원국 해제와 연관시키겠다는 어떤 언급이 없었다. 일본 언론은 충격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북일관계, 퍼즐 맞추기
미국은 지난 4월 발표한 '2006 국가별 테러보고서'에서 "북한은 1970년 항공기 납치사건과 관련된 일본 적군파 요원 4명을 계속 보호"하고 있고, "일본 정부는 2002년 이후 일본으로 귀환한 5명의 납북자 등 북한 정부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12명의 일본인의 운명에 대한 설명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고 밝혀 북한 테러지원국 지정에 일본인 납치문제가 포함되어 있음을 명시 한다.
부시 대통령은 '2.13 합의' 발표 다음날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에게 전화, 납치문제와 관련돼 일본은 고립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약했으며, 이미 미 상·하원은 2005년 7월 납치문제와 관련한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바 있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그 변화는 미국의 전략적 변환에서 비롯됐다. 2007년 2.13 합의로 북핵 논의는 북미가 협의하고 6자가 추인하는 구도로 재편됐다. 부시 행정부는 공식적으로는 북한 핵 프로그램의 폐기(dismantlement)를 정책목표로 삼고 있지만 2.13 합의에서 드러났듯 폐기로 가는 길을 몇 단계로 구분하는 '점진적 접근법'을 채택했다.
미국은 북미관계 정상화가 인권, 미사일 및 대량살상무기(WMD) 문제 해결에 달려 있다는 기존 입장에서 탈피해 관계 개선을 핵폐기 진전 여부와 연계시키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런 전환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납치문제에 대한 강경입장을 지지하는 일본내 여론은 상대적으로 온건유화노선을 견지하고 싶어하는 후쿠다 내각을 국내외적으로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민의 66%가 대북 압력 노선을 선호(<마이니치신문> 조사)하고 있는 현실에서 일본 정부가 전임 아베 정권의 강경 기조에서 벗어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미 국민적 관심사가 되어버린 납치문제는 신임 총리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소신껏 처리할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북한 테러지원국 해제와 미국의 선택
그렇다면 미 의회와 정부는 전통적 우방인 일본의 견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절차적 측면을 보자.
미 수출관리법 6(j)(4)항은 대통령이 하원 외교위원회, 상원 금융위원회 및 외교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하기 전까지는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라있는 국가들을 삭제하지 못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북한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되기 위해서는, 미 대통령이 1) 북한이 지난 6개월간 국제테러 행위를 지원하지 않았으며, 2) 미래에도 국제테러행위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제공했음을 보증해야 한다. 미 의회 또한 대통령의 조치를 발효시키거나, 이를 저지하기 위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결국, 북한이 미래에 테러행위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명백한 보장을 할 경우에도 미 의회의 신뢰여부가 관건인 것이다.(Larry Niksch & Raphael Perl, "North Korea: Terrorism List Removal?", 2007.4.6)
이제 미 행정부는 북한이 납치된 일본인들을 계속 억류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테러 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미국은 연례 테러보고서에서 납치를 테러행위로 규정해 왔으며, 특히 카터 및 레이건 행정부 시절 이란과 레바논이 피랍 미국인들을 장기간 억류하는 동안 테러행위가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 사례가 있다.(Larry Niksch & Raphael Perl, "North Korea: Terrorism List Removal?", 2007.4.6)
지난 15일 일본의 여야 의원 6명과 일본인 납치자 가족들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하려는 미국 정부의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미 의회와 국무부를 방문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지 말 것을 요청한바 있다. 과연 법치국가 미국은 어떤 판단을 통해 대북정책의 전환을 합리화시킬 수 있을지 주목된다.
북한과 일본, '보통국가'로의 길
납치문제 해결은 북한의 최소한의 조치를 필요로 하며,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는 북한의 핵폐기 이행과, 납치문제에 대한 일본의 양해를 필요로 한다. 북한과 일본은 실상은 공통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상대방이 원하는 조치를 병행해야만 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먼저 북한은 6자회담 2단계 조치 합의에 따라 현존 핵시설 불능화 조치를 연내 이행해야 한다. 미국은 6자회담 2단계 조치에 있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기 위한 과정을 개시하고 또 북한에 대한 대적성국 교역법 적용을 종료시키기 위한 과정'을 '북한의 조치들과 병렬적으로' 완수할 것을 합의했다.
북한은 또한 일본인 납치문제에 있어 적군파 요도호 납치범과 일본 정부의 대화를 중개하는 등 최소한의 양보를 제공함으로써 고립되어 가는 후쿠다 내각이 북일관계 정상화에 나설 수 있는 정치적 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일본은 북일관계 정상화의 지연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첫째, 북일관계 정상화가 지연될 경우 북미 양자 협의가 축을 이루고 있는 북핵문제 해결의 역내 협상 틀인 6자회담에서 일본의 발언권은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다.
둘째, 미국과 일본이 꿈꾸는 '동아시아 전략', 중국 봉쇄를 위한 북한체제의 위험 관리 혹은 연대화에 차질이 생긴다. 미국은 2007년 2월 발표한 '미일동맹: 2020년까지의 대 아시아전략'(2차 아미티지 보고서, U.S.-Japan Alliance: Getting Asia Right Through 2020)을 통해 중국의 대양해군 구축을 경계하고 미일동맹 강화를 통해 중국을 견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미일동맹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셋째, 일본의 전후 처리는 북일수교로 완성될 것이라는 후쿠다 총리의 말에 유의해야 한다. 필자는 그 견해에 동의한다. 일본이 북일수교에 나서지 않는 한 아시아의 지도력은 의심받을 것이며, 아울러 숙원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도 무망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본다면, 북한과 일본은 진정한 '보통국가'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주변 국가들과 협력해야 한다. 6자회담 참가국은 북한과 일본의 관계 정상화 일본의 안보 및 납치 문제 해결과 북한의 테러지원국 해제에 효과적임을 설득해야 한다.
특히 북일관계 정상화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인 한국은 북일관계 진전을 위한 북한과 일본의 전향적 노력을 적극 주문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남북대화, 한일대화를 통해 북일관계 정상화에 선순환의 역할을 부여받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북한과 일본을 쳐다만 보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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