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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 디자인, 이대로는 안 된다

[지상현의 Homo designans·15] 작심하고 쓴 苦言

디자인 전공자 100만명...숫자로는 한국이 세계 최강

해마다 한국에서 배출되는 디자인 전공자는 얼마나 될까. 좀 오래된 통계이긴 하지만 한국디자인진흥원의 2002년 집계에 따르면 약 3만 7000명 정도라고 한다. 4년제 대학과 전문대학 대부분에 여러 디자인과가 설치돼 있고 지금도 증원 증과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5년이 지난 지금도 이 숫자보다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는 않았을 것이다.

숫자만 볼 때는 감이 잘 안 오지만 외국의 수치와 비교해보면 그 양을 실감할 수 있다. 인구 약 3억명인 미국에서 매년 배출되는 디자인 전공자가 4만 2000명 정도이고 인구 약 1억 2000만인 일본이 2만 8000명 정도라고 한다. 디자인의 나라로 알려진 이탈리아가 약 2만명(인구 약 5800만) 정도라고 하니 인구나 산업규모를 따져보면 우리나라는 적정인원을 초과해도 한참 초과한 셈이다.

이뿐 아니다. 한국에서 그간 배출된 디자인 전공자를 다 합치면 100만 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전체 인구의 2% 이상이 디자인과를 나온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전국 디자인 대학 교수들의 57% 가량이 디자인학과의 정원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한국디자인진흥원의 디자인 센서스는 밝히고 있다.

하지만 디자인계로 향하는 발길은 계속 늘고만 있다. 가장 최근에 신설된 모대학 시각디자인과는 2007년도 정시입시모집 일주일 전에 4년제 대학인가를 받아 홍보도 제대로 못하고 학생모집을 했다. 하지만 경쟁률은 놀랍게도 12:1에 이르렀다. 요즘은 '디자인' 자만 붙이면 어느 대학이건 지원자 걱정은 필요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바야흐로 디자인계에 골드 러시 시대가 왔다는 느낌이다.

이런 골드 러시는 학교에만 온 것은 아니다. 각 지방자치 단체에서도 디자인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폭증하고 있다. 기업들이야 자체 자금을 쓰니 어련히 유용성을 따져 투자했거니 하면 되지만 지자체의 디자인 투자는 공적자금을 사용하는 만큼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치밀한 검토 없이 '묻지마'식 투자를 하고 있다는 의심을 버릴 수가 없다.

지자체의 '묻지마'식 디자인 투자

지자체마다 앞다투어 심벌마크를 만들고 각종 디자인 공모전과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그 결과 비슷한 심벌마크들이 양산돼 도리어 지역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어림잡아 약 300개 정도의 고만고만한 디자인 공모전이 해마다 열리고 이중 절반은 지자체에서 개최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쁜 프로들은 이런 곳에 출품할 여력도, 관심도 없다. 대신 취업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로 출품하는 학생들이 많아 대학들이 몸살을 앓을 정도다.

공모전의 취지도 '천편일률' 적이다. 대개 '지역 주민들의 디자인에 대한 관심을 높여 지역 디자인 발전의 동력으로 삼겠다'는 막연한 이야기다. 홍보할 시간도 없이 학생을 모집해도 12:1의 경쟁률을 보일 정도인데 무슨 관심을 더 높이겠다는 걸까. '컬러'나 '디자인'이 들어간 각종 페스티벌도 무수히 열리고 있다. 지역 축제야 환영하지만 디자인을 팔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 필자가 근무하는 학과 게시판에 붙은 공모전 포스터들. 11월 7일 현재 40여장이 몇 겹으로 쌓인 채 붙어 있다. 날짜가 지난 것은 제거되므로 동시에 개최되는 공모전이 이날 현재 40여 건이 되는 셈이다.

일일이 자료를 뒤적이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의 디자인에 대한 관심은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다. 필자가 교직에 갓 발을 디뎠을 무렵인 20여년 전 TV에서는 "디자인 혁명시대"라는 기획프로그램을 시리즈로 방송했었다. 그 정도로 당시로서는 새로운 개념이었다는 뜻이다. 또 10년 전쯤 교육 방송에서는 국내의 디자인 전문가들을 초청해 토론회를 갖고 향후 국내 디자인의 미래에 대해 장밋빛 전망을 한 적이 있다.

이런 노력들 덕분인지 지금 디자인대학 지원자는 넘쳐나고 지자체의 투자가 폭증하는 등 양적으로 디자인은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것이 디자인계의 호황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질적 수준?...10년 전이나 10년 후나

디자인계 내부의 대부분의 인사들은 "지금 같은 식이라면 10년 전과 지금이 다르지 않듯 10년 쯤 뒤에도 국내 디자인계의 상황과 수준은 별반 나아져 있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물론 삼성이나 엘지와 같은 스타급 기업들 덕분에 지난해 우리의 디자인 경쟁력 지수는 세계 14위(헬싱키 디자인 연구소)를 기록했다. 사회 전반의 국제화 수준이 높아지면서 디자인계도 해외 기관이나 단체들과 교류를 늘려 와중에 해외의 무슨 상을 받았다는 식의 뉴스 정도는 생산해내겠지만, 이 정도가 전부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비관적 전망을 하는 이유는 디자인 발전을 위해 사용돼야 할 사회의 에너지가 엉뚱한 곳에 소비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디자인계는 산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예컨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디자인회사들은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시각이나 제품 디자인 분야의 기업 가운데 연 매출액이 15억을 넘는 곳은 시각디자인이 7%, 제품디자인이 3% 정도에 불과하다. 연 매출액 15억이면 동네의 좀 크다하는 대중음식점 수준이다.

이처럼 상황이 열악한 이유 중 하나는 디자인회사들이 디자인 요율을 제대로 산정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 모델 제작비, 인쇄비, 종이값 등을 절약해 약간의 이득을 챙기는 편법을 쓰기도 하겠지만 한계가 있다. '디자인료를 제대로 받기 위한 방안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온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디자이너의 힘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painful!"...실전 경험 없는 디자인 교육

연간 3만 7000명의 졸업생이 나와도 산업체에서는 구인난을 호소한다. 대학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교육에서는 교수들의 실무 경험이 무척 중요하다. 외국 대학들의 경우 디자인학과는 교수 채용에서 실무경력을 중시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디자인으로 1원 한 푼 벌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졸업 후 곧장 교수로 채용되고 이들이 정부 기관에 자문을 한다. 이런 사람들은 산업체와의 연결통로가 없어 세상의 흐름에 둔감하고 산업체의 요구를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기 쉽다.

대학의 교과목도 마찬가지다. 이름만 보면 꽤 다양한 것 같지만 거의 같은 내용들이고 콘텐트도 빈약한 경우가 많다. 교수는 "이런 거 한번 생각해봐"하고 과제를 던져주고 순수미술 가르치듯 한 사람씩 불러 막연하게 "더 해보지"하는 것이 전부다. 고도의 지적 작업인 디자인을 고단한 노동의 세계로 만드는 과목도 어느 대학이나 한두 개는 꼭 있다. 필자가 예전에 근무하던 대학을 방문한 영국 뉴 캐슬대학의 교수들이 우리 학생들의 작품을 보고 'painful!' 하고 독백하던 장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세계 디자인계의 흐름에도 둔감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가르치는 내용도 비슷하다. 학점인심을 쓰고 MT나 가며 적당히 학생들과 놀아주는 포퓰리즘도 만연해 있다.

전경련에서 조사한 <디자인 교육 특성화를 위한 산업계 의견조사/2001>와 한국 디자인 진흥원의 <2002년 디자인 센서스>를 보면 우리나라 기업들은 자사 디자이너들의 기획능력 부족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고 있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이를 거의 가르치지 않을 뿐더러 가르칠 교수도 매우 적다.

기획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다른 부서와 제대로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고 재작업이 많아지는 등 생산성이 낮아진다. 디자이너들이 직장인으로서 수명이 짧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유럽 일렉트로닉스社처럼 디자이너가 CEO가 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유럽이나 일본의 상황을 부러워하려면 그 만큼 제대로 준비된 디자이너를 대학에서 배출해야 한다.

형편 없는 디자인 인프라

디자인을 위한 인프라도 형편없다. 지난해 헬싱키디자인연구소 조사에서 디자인 경쟁력 세계 1위를 차지한 일본만 해도 다양한 감성과학 연구소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디자이너들의 생산성과 창의력을 높여주는 첨단 시스템, 디자인 방법론 등을 제공한다. 스포츠 강국들이 스포츠 과학에서도 강국이듯 디자인 강국들은 감성 과학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외국의 디자이너들은 이런 지원을 받아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우리나라에는 이런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는 디자이너들이 태반이다.
▲ 패션디자인으로 유명한 일본 문화대학 부설 문화 형태기능 연구소와 의(衣)환경연구소

▲ 스탠포드 대학의 디자인 리서치 센터 전경

각국의 유행을 추적하고 분석하여 디자이너들에게 세계의 유행흐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디자인 유행예측센터도 매우 부실하다. 그나마 제대로 작동하는 곳은 홍익대에 있는 IDTC(International Design Trend Center) 한 곳 정도에 불과하다. 이제 걸음마 단계인 광주, 부산, 대구의 디자인 거점센터도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올 한해의 사업내용만을 본다면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지역 디자인의 발전을 도모할 인프라 구축보다는 과시성 이벤트와 쇼룸을 치장하는 데 각기 100억원 가까운 예산을 허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 홍대 국제 디자인유행예측센터(IDTC) 내부 전경과 유행 디자인 샘플들

앞서도 말했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 디자인에 공적인 자금이 투여되는 가장 대표적인 곳은 지자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지자체들의 투자는 디자인의 발전보다는 디자인의 정치적 이용에 치중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가령 지자체에서 디자인 전문가들을 불러 벌이는 각종 포럼에서는 거리 환경개선 사업과 같은 환경디자인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며칠 전에도 모 지자체에서 개최한 디자인 포럼에 친한 교수가 참가했는데 모두 거리 환경문제만 이야기하길래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의 디자인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자고 했더니 '왕따'시키는 분위기가 역력하더란다.

디자인이 지자체 장의 표 얻기 수단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거리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지자체 장의 치적으로 남지만 지역 산업의 디자인 경쟁력을 높이는 문제는 장기간의 노력이 필요하고 누구의 성과인지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표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 디자인계 인사들은 지자체장들에게 노골적으로 이렇게 얘기하고 다닌다고 한다.

"강물을 맑게 해 물고기가 살게 하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누가 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강가에 콘크리트 축대를 쌓고 색을 칠하면 표로 연결된다"고...

그 동안 정부의 투자가 부족했다고 느끼는 디자이너들 가운데는 이런 식으로 디자인의 파이를 키워 놓는 것을 환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양이 커지면 질적 발전도 뒤따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다. 그 말도 옳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상황은 디자인의 양이 커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 쪽이 병적으로 비대해지고 있을 뿐이다. 디자인에 대한 최근의 관심은 언젠가 식을 수밖에 없다. 이 관심이 뜨거울 때 제대로 활용해 장기적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쇠는 뜨거울 때 두드리라'고 하지 않던가.

첫 회에 이야기 한 바 있지만 '세계의 디자인 공장'이 되겠다며 강한 디자인 육성 정책을 폈던 대처 수상은 자신이 직접 주재하는 영국 내 주요 기업인과 디자이너들의 만남의 장을 만들고 디자인 발전을 위한 정책 아이디어를 발굴해냈다. 과시성 이벤트나 눈에 보이는 거리환경에만 집중하는 우리와는 달랐다.

표를 의식해 기획된 각종 거리 환경물과 과시성 이벤트의 기획서에는 "디자인을 중심으로 지역 문화를 컨텐츠화 하겠다", "지역의 아이덴티티를 명확히 해 지역의 인지도를 높이겠다" "지역민의 디자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디자인 산업의 동력으로 삼겠다"는 등 판에 박은 문구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막연한 계획으로 디자인이 발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작 필요한 것은 선거가 끝나면 함께 사라질 '묻지마' 식 과시성 투자가 아니라 비록 작더라도 꾸준히 이어질 관심이고 장기적 안목에서 지속적 발전을 이어갈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다. 먼 훗날 "사회의 에너지가 디자인에 몰리던 골드러시의 시절에 선배들은 그 황금을 모두 어디에 허비했느냐"는 후배들의 비난을 듣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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