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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스 "김정일이 부시를 이겼다"

[분석] "북한이 이겼고,원하는 것을 얻었다"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로 미국 내 최고의 한반도 전문가로 꼽히는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역사학과 교수가 2007 남북정상회담을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거둔 외교적 승리로 평가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커밍스 교수는 '김정일, 부시와 맞서 이기다. 새로운 국면 맞은 남북관계(
Kim Jong Il confronts Bush- and wins. A New Page in North-South Korean Relations)'라는 글에서 "북한이 이겼고, 원하는 것을 얻었다"면서 "1990년대부터 북한이 핵프로그램과 원조를 맞바꾸고,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하자는 제안에 대해 미국은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비웃었지만 결국 그렇게 됐다"고 썼다.

커밍스 교수는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 진짜 이유도 부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일의 관계가 예기치 않게 좋아졌기 때문이라고 보았으며, 그 배경 분석에 초점을 맞췄다. 아직 그 배경에 의문이 남아있지만, 비핵화를 위한 2.13 합의가 이뤄진 것에서 관계개선은 분명하게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부시와 김정일의 관계가 급격히 좋아진 배경에 대해 커밍스 교수는 흥미로운 분석을 제시했다.

우선 그는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미국 등 국제사회가 인식하게 된 1992년 이후 15년간이나 모호한 입장을 취하다가 지난해 10월 확실한 소득도 없이, 핵실험을 단행한 것은 중국을 더욱 의식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미사일 발사에 대해 중국이 대북 석유수출을 중단하자 이러한 조치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대응이었다는 것이다.

그 후 클린턴 행정부가 이뤄놓은 북미합의를 모두 깨버리며 직접 대화를 거부해온 부시가 돌연 북한과 협상을 하기로 결정한 것도 설명하기 쉽지는 않지만, 커밍스 교수는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부시가 기대했던 공화당의 장기 지배체제가 무너지면서, 부시가 최악의 레임덕에 빠진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물론 이런 설명이 완전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것을 인정한 커밍스 교수는 다시 추가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북한이 핵실험으로 향후 2년간 제재를 견디고 난 뒤 미국의 차기 대통령과 협상하려는 전략을 가졌다는 것이다.

커밍스 교수는 또한 이 무렵 부시 행정부에서는 북한보다 이란이 더 큰 위협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분석했다. 북한과 협상이 타결되면 이란의 핵프로그램도 협상으로 폐기하도록 하는 압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본 것이다. 부시가 이란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면, 북한은 중립적인 관계가 되거나, 아예 현안에서 빠져야 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급격히 '과거로 회귀'한 부시 대통령에 대해 커밍스 교수는 "미국의 역대 어느 정부도 이런 결과를 얻기까지 이처럼 오래 걸린 적은 없다"고 꼬집었다.


다음은 19일 미국의 노틸러스연구소 온라인 정책포럼에 게재된 기고문의 주요 내용이다.
▲ 2007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남북 정상이 만났다.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산업국으로 북한에 대해 분명히 이 만남에서 얻을 이득이 있다. 김정일을 인정하는 것은 북한을 개방하기 위해 치러야할 작은 비용이다. 이번 정상회담에는 정치적 이득도 있다. 지지율이 낮은 노무현 대통령은 연말 대선에서 여권 후보가 승리할 기회를 강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2.13 합의는 부시와 김정일의 관계 회복의 증거

하지만 남북 정상이 만난 진짜 이유는 전혀 예기치 않게 부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일의 관계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아직 그 배경에 의문이 남아있지만, 비핵화를 위한 2.13 합의가 이뤄진 것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2.13 합의는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상이 베이징과 베를린에서 잇따라 만나 가진 비밀협상 끝에 나왔다.

하지만 그 합의 내용은 부시가 2000년 취임하기 전에 달성되거나 협의되던 것이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의 중 · 장거리 미사일도 대가를 주고 포기시키려고 했다. 2000년에 타결 직전까지 갔으나, 부시는 취임 후 이를 취소시킴으로써 북한은 현재 가공할 미사일 능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부시 대통령이나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북한에 대한 대응 방안을 둘러싼 내부 논란을 어떻게 차단했는지는 설명하기 힘들다. 어쨋든 2005년 9월19일 미국과 북한은 6자회담에서 비핵화에 대한 원칙에 합의했다(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포함됐다). 그러나 불과 3일 뒤 미 재무부는 방코델타아시아와의 불법 거래 혐의를 내세워 북한에 제재조치를 취했다. 당시 증거도 불충분했으며, 9.19 합의를 깨려는 의도였다는 것이 지금은 명백해졌다.

저명한 북한 전문가 레온 시갈은 "2.13합의로 부시는 다시 북한을 화해의 길에 확고히 올려놓았다"고 주장했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도 낙관적었다. 그는 지난 8월 "올해 말에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핵프로그램을 폐기할 것이라는 선언이 나오고, 내년에 모든 시설이 완전 해체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라이스 장관이 조만간 평양을 방문할 가능성을 시사했고, 워싱턴 정가에서는 부시와 김정일의 정상회담 가능성이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어떤 미국의 어느 역대 정부도 이런 결과를 얻기까지 이처럼 오래 걸린 적은 없다.

2.13 합의가 나오기 전까지 부시는 미 행정부 사상 가장 강경한 대북정책을 구사했다. 2002년 10월 부시는 제임스 켈리 당시 국무부 차관보를 평양에 보내 북한이 플루토늄에 이어 고농축우라늄(HEU)를 사용하는 핵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고 추궁했다. 부시는 소중한 1994년 협정을 폐기했다. 이에 북한은 NPT(핵확산방지조약)을 탈퇴한 뒤 플루토늄 연료봉 재처리에 돌입해 숫자 미상의 플루토늄을 제조했다.

2002~2003년 체니 진영, 북한 폭격 주장

2002~2003년 미국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북한의 이러한 도발적 행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 내부 갈등이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이란의 HEU 시설를 둘러싸고 빚어진 현재의 위기처럼 일부 관료들(특히 체니의 측근들)은 북한을 폭격할 것을 주장했다. 다른 관료들은 그렇게 하면 또 다른 한국 전쟁이 촉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시는 북한이 아니라 이란을 상대로 한 전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래서 부시 행정부는 한국의 햇볕정책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국 정부에 불만을 전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1994년 협정은 고농축우라늄(HEU)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파키스탄의 핵물리학자 압둘 카디르 칸 박사와 거래한 사실을 숨겼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클린턴 행정부는 2000년 당시 부시의 정권인수팀에게 그 점에 대해 언급했다. HEU는 습득하기 어려운 기술이 요구되며, 폭탄 제조까지는 몇년 동안 실험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1994년 협정과 미사일 협상은 플루토늄 폭탄과 핵탄두를 장착할 미사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면밀한 검증 끝에 이뤄진 것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2000~2002년까지 클린턴이 제공한 정보를 검토하다가 켈리를 북한에 보냈다. 하지만 1990년대 미국의 협상가들이 깨달은 게 있다면, 북한이 걱정할 만한 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켈리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의 북한 방문은 시기적으로 부적절한 도발이었다. 부시가 '악의 축'에 대해 선제공격을 하겠다는 독트린을 천명한 2002년 9월 직후에 켈리의 방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몇개월 뒤 이라크를 침공했다. 북한은 사담이 핵무기를 가겼다면 미국이 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곧바로 북한은 핵억지력에 대해 선전할 다양한 경로를 찾았다.

북한의 HEU에 대한 미국의 정보 수준은 사담 후세인의 WMD에 대한 수준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북한은 수천개의 알루미늄 튜브를 구입했지만, 원심분리를 위한 고속의 가속기에 사용될 정도로 견고한 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이걸 가지고 2002년 미국의 분석가들은 대단한 생산 능력이 있는 것처럼 몰아갔던 것이다. 그 후 미국은 HEU 핵무기 프로그램에 필요한 대규모의 조달행위가 있었는지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북한이 지난해 10월 터뜨린 폭탄은 HEU가 아니라 플루토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부시가 초래한 폭탄이지, 클린턴이 초래한 폭탄이 아니다. 북한이 왜 핵무기 실험을 하기로 결정했는지는 설명하기 쉽지 않다. 국제사회가 북한이 원자폭탄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목표를 딜성한 지 15년만이 지난 시점이었다. 1992년 미국의 CIA는 북한이 1~2개의 폭탄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했으며, 줄곧 북한에 핵무기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왔다.

북한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입지를 강화해 왔다. 이스라엘처럼 아무런 실험도 하지 않고, 공식발표도 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나라들도 핵보유에 나서도록 자극하지도 않으면서 억지력을 발휘한 것이다.

확실한 소득도 없이 북한이 모호한 입장을 포기한 이유는 무엇인가? 핵실험은 중국을 더욱 의식한 것일 수 있다. 중국은 지난해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실험에 대해 그해 9월 대북 석유수출을 중단했다. 북한은 그런 조치로 겁을 먹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핵실험을 한 것일 수 있다. 북한은 핵실험 이후 6자 회담 복귀에 응했을 뿐이다.

부시가 북한과 협상을 하기로 결정한 것도 설명하기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부시가 기대했던 공화당의 장기 지배체제가 무너지면서, 부시는 최악의 레임덕 상황에 빠졌다. 그의 핵심 지지세력이 국내외에서 사라졌다. 대부분의 네오콘(폴 울포위츠, 존 볼튼)도 떠나고, 영국에서는 토니 블레어, 그리고 일본에서는 아베 신조도 물러났다.

북한, 2003~2004년 미국 공격 가능성 두려워해

하지만 이런 설명이 완전한 설득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2003~2004년 북한은 미국이 공격할 것을 정말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군은 전세계에 널리 전개돼 한반도에는 몇 개의 전투여단을 보낼 여력만 있었다(현재 전쟁계획에서도 승리를 보장하려면 50만 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적시하고 있다).

북한의 전략은 핵보유국을 자처하고 나서, 향후 2년간 제재를 견디고 난 뒤 미국의 차기 대통령과 협상할 것을 기대한 것이다.크리스토퍼 힐이 전권을 부여받고 평양과 협상에 나설 즈음 미국 정부 내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다. 가장 유력한 해석은 백악관이 이란 이 더 큰 위협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북한과 협상이 타결되면 이란의 핵프로그램도 협상으로 폐기하도록 하는 압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본 것이다. 부시가 이란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면, 북한은 중립적인 관계가 되거나, 아예 현안에서 빠져야 했다.
▲ 북한과 직접대화를 거부하던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핵실험 이후 급격히 '과거로의 회귀'를 결정했다. ⓒ로이터=뉴시스

최근 몇년 사이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상당히 악화되었다. 부시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전통적인 관례를 마구 무시하는 한편, 북한과의 관계도 위험한 상황으로 몰고 갔다. 급격한 '과거로의 회귀'는 아마도 이러한 훼손된 관계를 복원하기 시작할 것이다.

부시 이전만 해도 미국에 압도적으로 호의적이었던 한국의 여론은 현재 분열돼 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에 호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응답자가 43%이며, 20대에서는 22%만이 호감을 가진 편이었다.

'부시 독트린'은 한국이 원하지 않는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절박한 위험을 던져주었다. '부시 독트린'이 공표된 직후 노무현 대통령의 한 측근은 부시 행정부 관료들에게 "미국이 한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을 공격하면, 한미동맹은 파기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지도자들, 부시 독트린 발표에 경악

한국의 지도자들은 한국과 긴밀한 협의를 거치지 않거나, 한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을 받으려고 했다. 노무현 정부는 이러한 보장을 얻지 못했다. 북한은 서울 북쪽 산악지대에 배치한 1만 여개의 대포를 동원해 몇시간에 서울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이 부시 독트린으로 인해 얼마나 놀랐을 것인지 상상할 수 있다.

상황이 이처럼 심각하기 때문에 신뢰 회복을 위한 확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이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북한에 대해 공격하려면 한국의 동의를 얻겠다는 보장을 하고, 대만 분쟁이 일어날 경우 한국을 전장으로 끌어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또한 시대착오적인 한국의 미군 주둔 병력을 축소해야 한다.

이러한 조치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한국과 중국, 러시아는 미국이 북한과 관계를 정상화할 것을 촉구해 왔다.

북한은 이겼고, 원하는 것을 얻었다. 1990년대부터 북한이 핵프로그램과 원조를 맞바꾸고,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하자는 제안에 대해 미국은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비웃었지만 결국 그렇게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 1990년대 성공적 외교 펼쳐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0년대 말 북한이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면 핵프로그램과 미사일을 포기할 것이라고 클린턴을 설득하는 성공적인 외교를 펼쳤다. 그는 미국도 소득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북미관계가 정상화된다면 북한이 주한미군에 대해 반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김정일이 미국에 못지 않게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도 두려워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1945년 이후 동북아시아에 미국이 구축한 국제질서에 북한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국은 친구나 동맹국은 아닐지라도 적이 하나 없어지고, 중국과 부활하는 러시아에 대해서 균형을 맞춰주는 중립적인 북한을 얻게 되며, 일본을 견제하는 역할도 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북한은 냉전 시대에 미국이 러시아와 중국에 대항했던 것처럼, 미국과 중국를 대립시켜 이득을 얻으려는 기대를 갖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구상이 부시에게 먹혀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21세기 미국의 동북아 전략으로는 논리적이다.

우여곡절 끝에 부시와 '악마' 김정일이 피스메이커로 나란히 자리매김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좋은 일이다. 아예 일어나지 않는 것보다는 늦더라도 그렇게 되면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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