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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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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298>

이류(二流)의 삶도 좋은 것이니...

40대 초반의 남자가 찾아와 한탄을 늘어놓았다.

"왜 이처럼 인생길이 꼬이고 어려운 것일까요?"
"저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말해주었다.

"물론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도 다 그렇지요. 남에 비해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있었을 뿐이지요."

그 분은 상고를 졸업하고 공기업에 입사했었다. 직장을 다니다 보니 대졸자와의 학력차별을 느끼게 되었고, 그 결과 스물 아홉에 직장을 나와 더 나은 길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갈수록 인생길이 더 고단해졌고, 얼마 전에는 다니던 벤처 기업이 급여를 계속 체불하자 실망한 나머지 그만 두고 말았다. 스스로도 그 회사가 '가장납입'을 했던 회사임을 알았지만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었다는 것이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라 사주를 인용하진 못하겠고, 다만 그 분은 용신(用神)이 불의 기운이었는데, 1996년 병자(丙子)년 임진(壬辰)월, 물의 기운이 불을 상극(相剋)하는 달에 그만 혈기에 치우쳐서 사표를 내고 말았던 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그것도 지금껏 살아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단 한 번의 실수.

무수히 경험한 바이지만 한 번 실수를 하면 그것으로부터 삶을 돌이키는 데 기본이 12년이고 그로부터 일어서는데 다시 6년 , 그리하여 18년의 삶을 보내게 된다는 것을.

그 분의 경우 1996년에 실수했으니 2008년이 되어야 길을 찾기 시작하고 2014년이 되어야만 그간의 세월을 보상할 수 있는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이다.

물론 그 때가 되어 더욱 야무지고 튼튼한 삶을 살게 된다면 당연히 더 큰 보람이 있으리라. 하지만 어떻게 보면 지난 세월이 아쉽다는 생각을 과연 지울 수 있겠는가.

이런 딱한 분이 찾아오면 사주팔자를 펼쳐놓고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무슨 말을 해주어야 위로가 되고 힘이 될 것인지를 말이다. 위로를 위한 위로가 아니라, 앞으로 어떤 희망적인 길이 있을 것인지를 찾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참 이상한 것이 첫 손님이 딱한 사정이면 하루 종일 딱한 사정에 처한 분들만 찾아오신다. 저녁이 되면 지쳐서 머리가 멍해진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대부분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친구가 있었다. 종합상사에서 한 해에 10억 달러를 수출하고 있는 유능한 사람이었다. 술자리에서 자신이 얼마를 수출하고 있고 따라서 회사에 얼마를 기여하고 있는데 자신의 급여는 너무 약소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친구로서 비아냥거리고 비웃어 주었다. "자네가 그 자리를 떠나 개인으로서 아이템을 정해서 수출한다면 얼마나 할 것 같은데? 첫 해에 백만 달러를 하면 내가 백 만 원을 내겠네."라고 말이다.

집단의 능력은 개인의 능력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막강하다.

노동자들이 연대(solidarity)를 외치는 것 역시 집단의 힘을 알기에 그런 것이고, 기업의 카르텔이나 담합을 법으로 규제하는 것 또한 집단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직에 있으면서 판매를 하는 것과 개인 사업의 입장에서 판매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같은 을(乙)의 입장이라도 회사가 뒷받침해주는 판매사원은 회사의 신용을 파는 것이고, 개인 사업자가 판매를 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파는 것이다.

이 간단한 이치를 너무 편하게 지내다보면 잊어버리게 되나 보다.

대기업이나 공기업에서 잘 지내다 보면 스스로의 능력에 비해 보수가 적다고 느낀 나머지 능력 발휘를 위해 개인 사업으로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착각임을 금방 알게 된다.

차별이 있느니 파벌이 있느니, 혁신과는 거리가 있느니 하며 조직을 떠나면 차별이 있고 파벌이 있고 구태의연했던 그 조직이 얼마나 막강한 힘을 지녔는지를 오래 지나지 않아도 알게 된다.

조직을 떠난 개인의 능력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미력하고 왜소하다. 직장에 있으면 근로조건 같은 개념을 따지고 개선할 것을 요구하게 되지만, 사업을 해보면 24시간이 근로시간이 된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기업주의 횡포를 정당화하자는 말이 아니다. 기업주의 횡포가 있다면 그 역시 조직의 힘, 연대의 힘으로 맞서야 할 것이다.

다만 혼자가 되었을 때의 자신의 능력에 대해 과신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학력 차별이나 기타 부당한 대우, 또는 스스로 기여도에 비추어 낮은 보수 등에 불만을 품고 섣불리 더 나은 길을 찾아 나서기보다는 있던 직장에서 성실히 일하면서 발전해가야 한다는 얘기이다.

글의 앞머리에서 했던 얘기 역시 단 한 번의 실수, 다른 사람에 비해 전혀 모자랄 것이 없지만 공기업을 떠났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실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는 얘기이지만, 산다는 것은 좀 비겁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공기업을 떠나 고생하는 분의 경우, 고졸로서 차별을 받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공기업에서 얌전히 지내기만 했다면 지금쯤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윤택하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불만은 술자리에서 가까운 친구에게 풀고 말이다.

순간의 젊은 혈기로 이렇게 사느니 나가서 더 발전적인 삶을 살아보자고 사표를 내고 나왔겠지만 공기업에서 근무한다는 자체가 실은 혜택 받았음을 느끼게 될 때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가 비겁할 필요가 있다고 말할 때의 비겁함이란 반드시 도덕적으로 반칙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온 세상이 모두들 일류(一流)가 되고 가진 자가 되고 누리는 자가 되기 위해 저 난리법석이지만, 스스로에 대해 이류(二流)의 삶, 좀 덜 가진 삶, 좀 덜 누리는 삶을 살아도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용인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스스로 그리 잘 나지 않았음을 용인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용서하는 마음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젊은이가 큰 꿈을 품고 더 힘찬 야망을 품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라고 여긴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지나치게 무기력하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사회의 소년들에게 해줄 얘기이고, 오늘날처럼 저마다 최고가 되려고 도덕도 규칙도 없이 무한 경쟁하는 우리 사회라면 "소년들이여, 큰 야망보다는 알차게 사는 것이 좋단다."라고 말해주어도 되는 것이 아닐까.

고(故) 오규원 시인의 "시(詩)는 패배이니 승리는 오해 말라"던 통렬한 구절이 필자에게는 이렇게 들려온다.

"기꺼이 이류(二流)이니 일류(一流), 잘난 체 말라."

(전화:02-534-7250, E-mail :1tgkim@hanmail.net)
김태규의 명리학 카페 : cafe.daum.net/8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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