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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는 재미가 전부는 아닌데. 요즘 TV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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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TV는 재미가 전부는 아닌데. 요즘 TV는..."

박인규의 집중인터뷰[10/10] 배우 최불암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아버지상이자 국민배우로 잘 알려진 배우 최불암씨가 최근 40년간의 연기생활과 그에 얽힌 일화를 담은 에세이집을 출간했습니다. 수사반장과 전원일기 등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면서 생긴 갖가지 촬영 에피소드와 정.재계 유명 인사들과 얽힌 재미난 이야기들도 수록돼 있는데요. 특히 그는 그동안 출연한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세상의 이치와 많은 교훈들을 얻었다고 합니다.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배우 최불암씨를 초대해 지난 40년 동안의 연기 인생을 되돌아보고.. 그의 연기철학과 연기를 통해 그가 얻은 삶의 교훈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배우 최불암씨입니다. 최불암씨는 1940년 인천 출생으로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습니다. 1965년 국립극단 단원으로 연기생활을 시작했고 67년 KBS 드라마 <수양대군>에서 김종서 역으로 탤런트 데뷔를 했습니다. 이후 1971년에 시작한 <수사반장>과 1980년에 시작한 <전원일기> 등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면서 국민배우로 인정을 받게 됐고 대종상 남우주연상과 백상연극영화 예술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93년부터 97년까지 제14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현재 <웰컴투코리아> 시민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최불암 :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

박인규 : 국민배우라고 알려지신 유명한 분을 만나니까 제가 좀 떨리는 것 같습니다.

최불암 : 국민배우, 아버지라고 말씀해 주시는데 제가 좀 말 받자와 좀 느낌이 그렇습니다.

박인규 : 저도 사실 알게 모르게 좀 긴장했던 것 같아요. 최근에 책을 내셨어요. '인생은 연극이고 인간은 배우라는 오래된 대사에 관하여'라는 책인데 지난 40년 동안의 연기생활을 정리하는 책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 ⓒ프레시안

최불암 :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생 나이 40이면 불혹이다, 이렇게 보는데 저는 예순 중반을 넘어서서 이제 불혹감을 느끼는지, 말하자면 조금 철이 늦게 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걸 좀 정리해 놓자, 진즉진즉 정리해 놨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고. 연극에 비유하자면 셰익스피어의 킹 리어... 연기를 한다면 60에 가서는 체력이 못 쫓아가서 하기 힘들고, 또 리어왕을 표현하려면 60 전에는 정신세계를 더듬지 못해서 못했다는데. 그래서 제 나이에 불혹이다, 이렇게 느껴보고 그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박인규 : 그 말씀은아직도 연기를 할 게 많다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요

최불암 : 그런데 체력이 못 쫓아가든지 감히 엄두를 못 낸다든지 그런 게 있죠.

박인규 : 이 책의 부제가 '텔레세이'인데, 텔레비전과 에세이를 합친 말 같아요. 왜 이렇게 붙이셨나요?

최불암 : 출판사 편집국장 홍승범씨가 저와 인터뷰를 한 번 했습니다. 제가 얘기 나오는 것이 전부 TV 주변에서 있었던 얘기니까 그 텔레비전 얘기 좀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텔레비전 관계된 얘기.... 이래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아니고 그냥 주변에 있었던, 연기자로 살아오면서 느꼈던 것들을 한 번 정리해보자. 배우라는 게 남의 인생만 연구하는 사람이지 자기 자신의 흔적을 소개한다든지 자신의 얘기를 해보기가 극히 어렵죠. 그래서 그 기회가 된 것 같아서 그래, 내가 굿을 할 테니 만들어 보자. 이래서 이뤄진 겁니다.

박인규 : 제가 초반에 연기 인생 40년이라고 했습니다만 중앙고등학교 2학년부터 연기를 하셨다고 하니까 따지면 50년 넘으셨는데요

최불암 : 연극반에

박인규 : 연극 입문으로 따지면. 40년이든 50년이든 적지 않게 해오신 건데 그동안의 연기를 되돌아보시면 흡족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최불암 : 그럼요. 연기라는 게 세세년년 다릅니다. 생각이 연기를 하는 거지 몸만 가지고 하는 건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 제목처럼 인생은 연극이고 인간은 배우다, 이런 얘기는, 지구의 모든 것은 다 무대다. 그리고 사람은 그 무대 위에서 자기를 조정해가면서 사는 배우일 뿐이다. 그러나 제가 겪어온 40년의 세월은 년년 다 다른 것 같아요. 그런 얘기를 제가 한 적 있습니다. 60 나이에는 사람이 일 년에 한 번 변하고 70에는 한 달에 한 번 변화를 한다. 그 다음 80대쯤 되면 매일 달라지는 거란다. 제 경우는 그것보다는 훨씬 늦지만 이제서 뭔가를 알 듯 한데 육체가 시들어서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죠. 그리고 결국 연기라는 게 움직임이나 생각의 싸움이거든요. 체력 싸움이라 체력을 놓치면 못하는 거죠.

박인규 : 많이 아쉬우시겠네요. 뭔가 알 것 같은데 몸이 못 따라가는 그런 심정

최불암 : 아직은 덜 그렇지만 그럴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 활자로도 남기고 제 자료사진이라든지 비디오를 좀 남겼으면 하는 것이 지금의 생각입니다.

박인규 : 저희가 보통 연기하는 사람들을 배우라고 하는데 요즘 영화배우들은 스타라고 하고 TV에 나오시는 분들은 보통 탤런트라고 하고. 이 책을 보니 최불암 선생님께서는 광대라는 표현이 좋은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최불암 : 외국에서는 연희단패거리, 연희자 이러기도 하고 일본에서는 배우다. 한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람 인'자에 '아닐 비'자, 사람이 아니다. 웃으라면 웃다 보니 그렇게 지칭하고. 우리나라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광대라는 것이 적절한 것 가타요. 광대가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말까지 존재했습니다. 조선조 말에 연산에 의해서 모두 3대까지 없앴다는데 임금님이 그렇게까지 했겠나마는 하여간 존재를 다 없애버렸죠. 광대 소리가 나오기만 해도 국민들은 모두 쉬쉬하고 상당히 무서워했습니다. 요즘 국어사전 보면 넓고 크다, 이렇게 나오는 데도 있고. 걸양이패들, 놀이패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광대패거리, 이렇게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원리를 쫓아가면 대단한 역할자들이에요. 지금의 방송시스템을 광대패거리들이 모인 시스템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얘기가 길어지는데 그런 거고요. 그래서 광대라는 말을 좋아하죠. 광대가 넓고 큰 거니까.

박인규 : 한자 자체가 넓을 광에 큰 대니까.

최불암 : 국민에게 알 권리를 전달해 주고, 모르는 정보를 전달해줌으로써 얻는, 그런 사명을 느끼는 거죠.

박인규 : 이번 책의 부제는 텔레세이로 정하시면서 TV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고 하셨는데 책에도 보면 80년대 이후는 주로 영화 출연을 자제하고 TV에 전념했다...라고 하는 건 TV드라마다 나름대로 맞는달까 매력이 있어서 그러신 겁니까?

▲ ⓒ프레시안

최불암 :
당시에 수사반장이 71년에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19년 8개월인가 해서 끝냈는데, 80년대 들어서 전원일기가 생겼어요. 한 방송국에서 두 개의 프로가 공존할 땝니다. 그러니까 저도 바쁘고, 외부에서 영화가 들어와도 여기 방송국 시간 외에 영화를 할 수 있나 하는 걱정도 됐지만, 사실 그 당시에 TV배우, 영화배우 분류 없이 움직이긴 했지만 영화에서 TV를 많이 들어오기는 어려웠어요. 대사 때문에. 전부 그땐 녹음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반면 열악해졌습니다 환경이. 그래서 우리가 나가서 하는 건 좋은 일이나 TV에서 일하는 사람은 TV에서 밥먹고 사는 거고 또 그쪽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그쪽 분들의 생활의 여유를 갖도록 만들어주는 게 도리가 아닌가, 그래서 선언했죠. 80년도부터. 나는 텔레비전이 충분하니 영화는 그만 두겠다. 말하자면 내 뜻은, 사양하겠다 이런 얘기였죠.

박인규 : 한우물을 파겠다 TV로. 이번 책에도 나왔지만 수사반장 출연하실 때 당시 대통령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가 전화를 거셔서 담배 좀 그만 피우세요, 그러셨다던데

최불암 : 그게 아주 재밌는 얘깁니다. 1969년도에 '개구리남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뭍에서도 살고 물에서도 살고 이런 양쪽의 생활을 의미한 건데, 공무원이었어요 과장 정도. 사무실에 나가면 부인 이상으로 비서가 참 잘해주죠. 그런데 집에 들어오면 애 낳고 기저귀 걸어놓고 요강 놓고, 식사하라고 하면 상보 제끼면 된장 있으니 끌어 잡수세요. 이러고, 부인도 어쩔 수 없는 거죠 상황이. 이런 이중적 구조 속에서 느낌이 큰 겁니다. 그런데 어디 출장을 가게 되는데 비서를 시켜서 중요한 걸 잊고 왔으니 갖다 달라. 그런데 비서가, 너무 중요하다고 하니까 그땐 비행기가 왕복 밖에 없었어요. 본인이 직접 타고 왔어요. 그걸 전달해 주는데 감동스러운 신이 있었고, 여기까지 왔으니 회라도 먹고 가자, 그래서 데리고 태종대를 나가는데 바람 불고 그러니까 사랑이... 벌써 영상적으로. 그런데 그때 공보처를 통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이게 무슨 일이냐, 나라의 녹을 먹고 국가 일을 보는 사람이 비서와 연애질이나 하고 다녀? 이거 빨리 조사해 봐라 어떻게 전개되나. 사실은 그랬거든요. 그래서 첫 방송, 그리고서는 방향을 바꿔버렸습니다. 녹화를 다시 뜨고 그랬죠. 비상 나서 난리가 났습니다 방송국에. 그게 사실 로맨스 드라마거든요. 그때 출연하고 저는 사랑하는 역할은 마지막이었지 않나.

박인규 : 요즘 같으면 표현의 자유를 관이 침해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텐데 그 당시로서는 TV의 공공성이 중요하다

최불암 : 그게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부분이거든요. 공무원이라는 것이 사랑도 있죠 공무원이라고 사랑 없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게 표현되는데 위정자께서는 걱정이 되는 거죠.

박인규 : 오히려 TV의 공공성에 무게를 뒀다

최불암 :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을 만들어야지 이렇게 부산 태종대 가서 회나 먹고 바람 부는데 둘이 팔목이나 고는 문제가 심각하다. 그때 아마 영향력 때문에 대통령께서 지시하신 것 같아요

박인규 : 육영수 여사께서 담배...

최불암 : 일요일 7시에 아마 그때 서울시에 기사들 택시 모시는 분들이 자동차를 다 안 움직이시고 이럴 때였어요. 그만큼 인기가 높았죠. 아마 청와대에서도 늘 관심있게 보신 것 같아요. 제가 시청을 하고 있는데 저희 집사람이 전화를 받더니 "여보, 청와대 전화야."

박인규 : 그 당시 청와대 전화면

최불암 : 대단했었죠. 그런데 비서실이 아니라 개인 부속실, 내가 부속실이 뭔지를 몰랐어요. 여보세요? 그랬더니 남자가, 조금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조금 있더니 육여사가, "안녕하셨어요? 육영수입니다." 그래서 제가 벌떡 일어났어요. "아이고, 담배를 많이 피우시네." 그러셨어요. 그래서 저는 또 잘났다고 "네, 넉 대를 태웁니다."

박인규 : 항상 넉 대를 피우시게 설정을 하셨군요.

최불암 : 설정을 했죠. 도입부에, 중간에 바쁠 때, 클라이막스 가서 하나, 속상할 때 한 대 태우거든요. 어떤 때는 석 대도 태울 수 있었지만, 그랬더니 담배 태우시는 건 좋으나... 이 양반도 담배 태우실 때 꼭 따라 피워요, 그래요. 속상하니까. 나도 속상할 때 피우는 거니까. 이 양반 피우는 건 괜찮아요. 그러니까 막 웃어요. 옆에 계셨던 것 같아요. 이건 상관없는데 국민이 모두 속상하게 따라 피울 것 같아요, 건강이 좋아질 리가 있겠습니까, 아이고, 좀 줄이세요. 오늘 잘 봤습니다. 이러고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게 그때 은행강도인가 그랬어요. 그만큼 국모가 참 중요하다. 내 영원히 잊질 않아요 그걸. 세상에 그 높은 데서, 담배 좀 자중해라. 모든 국민이 따라 피우니까 영향력이 크다.

박인규 : 실제로 그래서 줄이셨나요? 드라마에서

최불암 : 말 안 들었죠. 좋은 나라 운동본부를 KBS드라마 하면서 끊었습니다.

박인규 : 그 당시에, 제가 책을 보니까 60년도인가 통계를 하셨던데 TV가 전국에 한 60만 대. 지금은 한 2천만 대가 넘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어떻습니까, 그 당시 TV의 역할... 요즘과 비교해 봤을 때, 잘 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최불암 : 하여간 편집 없는 생방송 시절이 지나고 80년에 컬러방송이 생기고 2000년부터 HD, 아주 선명한 화면이 수정처럼 맑은 화면이 우리 앞에 나타나고, 젊은 생기가 나죠. 그리고 우리처럼 분장을 하거나 머리에 흰 칠을 하거나 이런 게 용서 못 받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자체제작이 아니라 모두 프로덕션에 맡기거든요. 외주죠. 외주를 못 나가니까 어떤 방송사의 개성이나 정책 이런 것이 구체적으로 표현되기는 어려워요. 그냥 좋은 드라마 해주시오, 그러고 맡겼겠죠. 그런데 대체적으로 좋은 드라마라면 국민이 많이 봅니다. 시청률에 연연하는 걸 바라기도 하고, 또 만드는 입장에서는 여기서 돈 받아서 하니까 많이 보는 걸 만들려니 좀 새콤달콤.

박인규 : 자신의 개성보다는 시청률에 너무 얽매이는 듯한.
선생님 같은 경우는 국민 아버지라는 표현을 들어도 좋을 정도로 아버지상을 가장 잘 표현하신 배우로 알려져 있는데, 정작 최불암 선생님 아버님 되시는 분은 본인이 7살 때 일찍 여의셨어요. 그런 아버님을 일찍 여읜 것이 오히려 아버님을 표현하는 데 영향을 미친 건가요?

▲ ⓒ프레시안

최불암 :
참 훌륭하신 질문입니다. 아마 없는 아버지를 상상해서 내놓는 것이 배우로서는 더 좋은 작업일 것 같아요. 저는 주로 전원일기에서 많은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는데, 이걸 우리 농경사회 대가족 제도가 80년에 완전히 핵가족으로 바뀌죠. 그러면서부터 가부장 위치가 많이 흔들렸어요. 그 전에도 흔들림이 좀 있었지만. 그러면서 전원일기가 거의 23년 동안 그 흔들림을 이렇게 쥐고 있었던 거죠.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내가 아버지 역, 4대를 거느린 가장 역할을 했으니 아버지라는 얘기가 안 나올 수 없죠.

박인규 : 극중에선 가장 훈훈한 아버님 역할, 외유내강 역할을 하셨습니다만 스스로 평하시기에 집안에서 아버님 역할은 어떠세요?

최불암 : 그런데 그게 닮아져요. 드라마에서 늘 책 읽고 그 아버지가 돼서 움직이고. 저는 분장실에서 화장 다 하고 의상 다 입고 거울을 봅니다. 최불암, 자네는 여기서 쉬고 있게. 나는 김회장이 돼서 스튜디오 들어가서 하루 종일, 어떤 때는 20시간 이상 거기서 생활해야 되니까. 그럴 때 보면 저도 물론 표현되겠지만 그 인물이 닮아옵니다. 내가 또 그런 냄새를 풍기면 작가가 그 뜻을 버리지 않고 써주면. 그러니까 반반씩이라고 봐도 되죠. 사생활도 TV로 보고 앉아있으면, 우리 집사람이 꼭 김회장이 앉아있는 것 같다더만요. 모든 사고방식도 김회장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박인규 : 최불암 선생님은 집안에다가 아버지의 자리라고 해서 아무도 범접하지 말아라....
지금도 그게 아직 보존이 잘 되고 있습니까?

최불암 : 그렇죠. 애들이 결혼해서 나가기도 하고, 이제 그런 염려는 그렇게 없지만 대학 들어가는데 효과는 봤죠. 아버지 자리라고 딱 축을 세워놓고, 여기 아버지 자리니까 이 근처에 왔다갔다 하지 마라. 애들이 TV 있는 쪽에 모두 몰리는데, 문 조금 열어놓고 보니까 네 가지를 동시에 해요. 연필을 돌리든가 펜 돌리고, 라디오 듣죠. 그 다음 발을 흔들어요 음악 들으니까, 발장난 치죠. 그리고 눈으로는 책을 보는 게 아니라 열린 눈구멍으로 TV를 보고. 네 가지를 동시에 해서 우리 아이 보고 너 이래가지고 공부가 되냐 했더니, 요즘 암기식, 외워서 시험만 잘 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래. 그 자리를 막느라고, TV 앞에 여긴 내 자리다. 방향을 전부 바꾸고 아버지 자리를 찾으니까, TV좀 볼 수 없게... 대학은 가까스로 들어갔어요.

박인규 : 특히 IMF위기 시대를 지나면서 아버지의 위상이 흔들린다, 아버지가 설 자리가 없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최불암 선생님 보시기엔 어때요?

최불암 : 진실로 아버지 자리가 없어진 건 아니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아버지가 집안을 지키는 것보다... 안방에서 큰소리만 쳐도 놀라고 심부름 시키고 권위적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같이 노력하는 시대죠 사실. 아버지도 애들과 타협해야 되고 또 애들은 엄마와 타협하더라도 아버지를 거쳐가야 되고. 모든 게 전체적으로 윤리적으로 도는데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자리가 무너지면 집안이 다 무너지는 거예요 결국. 남자 편에 앉았습니다.

박인규 : 아버지의 자리가 분명 있긴 있으되 예전에는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끌어갔지만, 지금부터는 가족과 말하자면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하는 게 중요하다.

최불암 : 그렇습니다.

박인규 : 제가 좀 다른, 개인적인 질문도 드려 보겠는데... 제일 궁금했던 게, 본명이 최영한씨잖아요. 예명이 불암. 저쪽 태능 쪽에 있는 불암산에서 따오신 건가, 어떻게 지으신 겁니까?

최불암 : 집안 내력이라 듣기 그러시겠습니다만, 저희 아버지가 35에 작고하셨어요. 저를 하나 낳으시고, 무녀독남이죠. 그렇게 놓고 귀한 자식으로 여기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우리 큰아버지께서 걱정을 많이 하신 것 같아요. 이놈이 하나 남았는데 잘 돼야지. 그런데 이름을 해석해 보시니까 생명이 짧은 것 같아요. 우리 어머니한테 와서 그러시더래요. 우리 큰아버지가, 얘기 최영한이 이름을 가지면 제 아버지보다 더 생명이 짧다.

박인규 : 30대에 요절할 수 있다,

최불암 : 그렇죠. 그 전에... 그래서 깜짝 놀라서, 그래서 내가 이름을 지어왔다. '부처 불'자에 '바위 암'자를 써서 그 이름을 되도록 불러줘라. 본인도 그 이름을 익혀가게 만들어라. 그러니 중학교 들어가고 나서 불암이라고 지었으니, 얼마나 이름이 크고, 어울리지 않죠. 놔두고 있다가 대학 들어가서, 무슨 프로그램 만드는데 무대 하는 분과 나하고 이름이 똑같다고 해요. 그러면서 이게 편집이 잘못됐는데 당신이 정말 최영한이냐, 그래서 그때 얼핏 생각에 아 이건 불암으로 부르는 게 좋겠다 해서, 제 이름은 최불암으로 바꿔 주십시오. 그러면서 최불암이 됐는데 연극하고 최불암하고는 맞은 것 같아요.

박인규 : 그러네요.

최불암 : 금방 기억들을 해주시더라구요.

박인규 : 예명으로 지으신 게 아닌데 예명이 됐군요 결과적으로

최불암 : 그렇습니다.

박인규 : 90년대 중반에 14대 국회의원으로, 그때 연세가 50대 중반이셨으니까 가장 어떻게 보면 원숙하실 때였는데... 일종의 외도를 하셨는데 정치를 하셨던 느낌은 어떠셨어요?

최불암 : 아주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국정 전반을 조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또 저로선 상당히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나라 생각, 나라 걱정을 할 수 있다는 게, 어느 순간 그냥 끝나버리고 말았는데요. 그 일이 혼자서는 힘든 일이고 당 자체에서도 어필되면 성관 없지만 내 고집을 이겨서 통과시켜서 법을 만들기가 제 자신으로서는, 내 능력으로는 어렵다는 걸 느꼈고. 그것보다는 우선 TV가 더 중요하다. TV는 전 국민이 한 순간에 보고, 그 영향력이 라디오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죠. 그래서 국회의원을 따르는 것보다는, 그 사람은 법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텔레비전을 놓고 또는 라디오를 놓고 연극을 놓고 이런 엔터테이너 계통... 이런 걸 잘 조정할 수 있는 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아쉬움을 가지고 끝났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육에 무슨 연극 한다 뭐 한다 이러면 흉보고 말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모든 학부모들이 이해하시고...

박인규 : 그 말씀은 지금이라도 그런 연극 하시는 분들을 진흥시키기 위한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있으신 거군요.

최불암 : 그렇습니다. 지금 있었으면 많은 교육과제를 고치고 문화적 코드를 넣어서 모든 것이 문화적 행정문화적 정치, 이렇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떠나서 아쉬움이 좀 있습니다.

박인규 : 누군가가 또 이룰 수 있겠죠. 최근에 웰컴투코리아라는 시민단체를 운영하고 계신데요, 어떤 데입니까?

최불암 : 한국에 어서 오십시오. 한국에 오시는 걸 환영하는 거죠. 우리 자원이 많다고 하지만 그래도 외국 관광자원이 그냥 떨어지는 돈이거든요. 거의 자료도 없이 조금만 잘 해놓으면 아주 돈벌이가 좋은 겁니다. 나라로서는. 그런데 요즘 보면 1억 불이니 10조원이 외국으로 나가고 그러거든요.

박인규 : 60억 달러라고 들었습니다 여행적자가

최불암 : 그러니 이걸 우리나라로 끌어들이지는 못하고 전부 내다 버리는 형편인데, 좋으니까 나가시는 거거든요. 우리도 좀 좋게 해서 지방도 좀 편하게 가고 손님맞이 운동을 하는 겁니다. 2000년도부터 활동을 시작했는데 1998년에 시작했습니다.

박인규 : 오래 하셨군요. 10년 되셨네요.
그렇게 여러 가지 사회운동을 하시는 건 좋겠습니다만 최불암씨 팬들 중에서는 다시 드라마에서 못 보는 거 아닌가 걱정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듣기로 최근에 '식객'이라는 드라마를 촬영하고 계신다고요.

최불암 : 네. 촬영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언제쯤 볼 수 있습니까?

최불암 : 식객이라는 게 아직은 결정 안 됐습니다. 내년도로 넘어가야 되는데, 사전제작이니까요. 그렇게 준비하고 있고요. 저는 이번에 식객을 하는 게, 당분간 쉬려고 했습니다. 뭐 워낙 오라는 데도 없지만. 그런데 우리, 말하자면 한류가 조금 시들해졌죠. 이래서 뭔가 한류가 또 한 번 바람이 불 수 있도록 우리 음식, 김치나 발효음식, 저장음식, 이런 것들을 잘해서 정말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지혜를 세계 각국에 알리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한 번 한류화시키고 지금 웰빙 음식이라고 해서 우리 음식에 상당히 관심들을 갖고 있거든요. 그런 쪽으로 좀 개안이 되도록 드라마도 식객이라는 걸 가지고 한 번 서민이 먹는 음식들을.... 요즘 일본 사람들이 와서 제일 좋아하는 게 뭐냐고 하면 감자탕이래요. 그 다음 순대국 이런 거. 서민음식이 좀 활기를 가지고 외국에 전달되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박인규 : 허영만씨의 만화를 주제로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최불암씨 역할은 최고의 요리사 역할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최불암 : 저는 대령숙수라고요, 옛날에 임금님 모시면서, 주방장이죠 당시에. 임금님에게 진상하는 음식 전문가입니다. 그 당시에 선조들이 했던 후계자료. 지금은 큰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는 대령숙수입니다.

박인규 : 앞으로도 연기와 함께 여러 가지 사회활동을 해주시기 바라고요, 못다 하신 말씀 있으시면 청취자들에게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최불암 : 저는 아직 텔레비전에 있고 그러는데 이것이 텔레비전이라는 게 굉장히 민감합니다. 영향력이 크단 말씀이죠. 그래서 우리 후배들이나 뭐나, 안방에 들어갈 때 거짓이나 정말 위선이나 가식 없이 진정한 손님으로 안방 출입을 하고, 재미만... TV 재미없으면 안 본다고 생각하지만 재미없어도 보게 돼 있는 겁니다. 매체형이 그러니까 좀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는, 정말 노인네 같은 얘긴데, 내일의 청소년들, 내일을 책임질 사람들한테 무엇을 남겨주느냐 이런 뜻에서 안방을 접근했으면 좋겠고요. 또 달콤하고 새콤한 얘기들은 방송에서 안 해도 다른 곳에서 논의될 수 있는 소재들이니까....

박인규 : 알겠습니다. 요즘 사실 아버님으로 살기도 힘든데, 앞으로도 계속 아버님의 좋은 모습 보여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최불암 : 고맙습니다.

박인규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배우 최불암씨와 함께했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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