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도 한국경제가 위기라는 주장이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들었으나 특히 참여정부 들어 한국경제를 놓고 각종 위기론이 난무하고 있다. 최근 나타난 것만 해도 7가지 위기론이 있다. 즉, 일본형 장기불황, 남미형 침체, 제조업 공동화, 평등주의/좌파, 反시장주의, 스태그플레이션, 국가경쟁력 약화. 도대체 한 나라 경제가 이렇게 많은 병을 동시에 앓을 수 있을까? 이런 위기론은 근거 없는 주장인 경우가 많다. 우리 경제의 현상황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보는 것은 올바른 처방을 찾는 데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국민의 불안심리를 부추겨 불경기를 더욱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 미국 MIT의 Noam Chomsky 교수는 한국을 2차대전후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 달성한 몇 안 되는 성공한 나라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는가.
내수불황과 경제의 양극화를 맞아 경기대책은 경기대책대로 마련하되 결국 장기적으로 한국경제의 기초체력을 강화할 개혁을 꾸준히 추진하는 것이 正道라 할 것이다. 현재 한국경제의 어려움은 과거에 비해 저투자-저성장, 그리고 양극화 심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저성장과 양극화는 큰 고민꺼리다. 이 두 현상은 제도적 부조화로 발생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제 과거의 패러다임으로는 더 이상 성장과 분배의 조화가 불가능하므로 뭔가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토론이 진행중이다. 우선 과거 경제 패러다임을 검토해보자. 우리에게는 박정희 모델이라는 제1의 길이 꽤 오래 동안 유효한 모델로 자리 잡고 있었고, 지난 10년전부터 시장만능주의라는 제2의 길이 득세하고 있다. 이들 모델을 하나씩 검토한 뒤 제3의 길을 제시하기로 한다.
1. 제1의 길: 박정희 모델
미국 경제학계에서 떠오르는 별인 폴 크루그만은 동아시아 경제가 소련의 경제모델과 비슷하다고 주장하였지만 사실 경제개발모델로서의 박정희 모델은 스탈린 모델과 유사한 면이 많다. 극우와 극좌로 멀리 떨어진 두 사람 사이의 사상적 거리를 생각해보면 이것은 뜻밖이지만 어쨌든 개발전략으로서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첫째, 투자율을 크게 높였다. 스탈린은 단기간에 소련의 투자율을 거의 30%에 가까이 끌어올렸는데, 이것은 당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높은 수준이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은 실로 비참하였다. 그런데 30%의 투자율이란 기록은 그 뒤 일본, 한국, 대만 등 동아시아에서 깨지게 된다.
둘째, 부국강병정책이다. 스탈린의 부국강병정책은 그 추진과정에서 엄청난 무리와 수백만 인명의 희생이 있었지만 그 후 히틀러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정책 덕분이었다고 견강부회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은 1970년대 이후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였고, 군사력에서도 가공할 수준에 이르렀음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군사비가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보면 소련은 13%, 한국은 6% 정도로서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세계 최고의 저축=투자율에다가 높은 군사비 지출까지 합치고 보면 소련에서나 한국에서나 국민들은 허리끈을 졸라맬 것을 강요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이다. 실제 소련에는 중소기업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으며, 한국도 재벌중심의 경제구조로서 다른 나라에 비해 중소기업이 취약한 특징을 갖고 있다. 대기업 위주의 경제는 과거의 소품종 대량생산, 대량수출에는 유리하나 그 대신 유연성이 떨어져서 지금과 같은 다품종 소량생산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다. 특히 최근 들어 한국경제는 대기업은 훨훨 날고 있으나 중소기업은 날로 어려워지는 극단적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그 출발은 박정희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넷째, 경제의 양적 성장에 성공하였으나 경제의 질적 발전에는 장애가 된다. 두 모델은 유휴상태에 있던 대규모의 유순한 노동력에 높은 저축, 투자를 결합하여 급속한 양적 성장에 성공하였다. 개발초기 단계에서 이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문제는 성장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서 유휴 자원의 투입이 한계에 이르고 난 뒤에 자원의 효율적 사용, 생산성 증대를 어떻게 도모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박정희 모델과 스탈린 모델은 다 같이 그 비민주성, 관료적 경직성의 한계로 인해 경제의 체질 변화에서 벽에 부딪치게 된다. 두 체제는 대규모 자원동원에는 능률적이지만 노동자들의 자발적 참여, 창의성과 협동정신의 발휘, 기술혁신에는 취약한 것이다.
흐루시초프가 UN총회에서 구두를 벗어 연단을 내리치며 미국을 경제적으로 매장해버릴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지만 소련 경제는 1960년대 이후 내리막길을 걷다가 결국 몰락하고 만 것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그 숨 막히던 박정희 시절이 경제는 좋았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이는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대중의 자발적 참여와 창의성을 이끌어내는 민주적 개혁을 하지 않고는 한국경제도 소련의 전철을 밟을지 모른다는 점을 깨닫는다면 박정희 모델에 대한 향수는 버려야 한다.
박정희 모델은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찢어질 듯한 가난을 없앤 공로가 분명히 있으나 그것은 훨씬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고도성장을 통해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은 더 많으니 많은 조직의 독재적 구조, 대립적 노사관계, 재벌의 황제경영, 주입식 교육, 물질 만능주의, 불신사회, 이기적 인간의 대량 배출, 부정부패, 환경 악화, 부동산 투기 만연 등은 박정희 모델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이며 이는 우리 모두가 오래 동안 짊어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다.
이 중에서 특히 부동산 투기 문제는 참여정부 들어 크게 문제가 되어 온 만큼 따로 볼 필요가 있다. 역대 정권의 성적표를 부동산 가격을 기준으로 작성해본다면 어떻게 될까(졸고, 2007 참조)? 부동산 가격의 추세를 국민소득과 비교함으로써 역대 정권의 부동산 성적의 비교가 가능하다. <표 1>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3인의 군사정권에서 부동산 가격의 폭등이 있었던 반면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는 부동산 가격이 상대적으로 크게 안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우연인지는 모르나 앞의 세 정권은 군사정부(혹은 군 출신이 대통령인 정권)이고, 뒤에 오는 세 정권은 문민 정부인데, 이 대비는 아주 특이하고, 연구 대상이 될만하다.
.......................<표 1> 역대 정권의 부동산 성적표
부동산 가격이 가장 폭등한 시기는 박정희 정권이다. 박정희의 집권기인 1963- 79의 16년을 보면 전국의 지가총액이 3.4조에서 329조로 폭등함으로써 무려 100배의 상승을 보였다. 이는 연평균 33%의 상승률에 해당한다. 다시 전두환 정권 7년 동안 전국 땅값 총액은 2배, 노태우 정권 5년 동안 2.3배로 상승하였다. 김영삼, 김대중 정권 동안에는 지가총액이 하락 추세를 보였는데, 이는 해방 50년 만에 처음 보는 새로운 현상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군사정권과 부동산 투기 사이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군부정권의 저돌적 목표달성주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장지상주의, 실적주의가 개발 위주의 정책으로 나타나고, 그 결과 고성장이 실현되지만 그와 더불어 지가 폭등이란 괴물이 쌍둥이처럼 태어났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세 차례의 군부정권 중에서도 특히 박정희 정권은 배(생산소득)보다 배꼽(불로소득)이 2.5배나 될 정도로 거대하여 '거품경제의 온상'이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많은 국민들이 박정희 정권이 경제를 살렸다고 존경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 때의 경제성장은 과연 외견상은 화려하지만 그 시기 거듭된 상상을 초월하는 부동산 광풍을 생각한다면 그 성장은 크게 깎아서 봐야 하고, 그 성장은 미래의 성장을 미리 당겨 쓴 '외상 경제운용'이란 면이 강하다. 민주주의, 인권, 남북관계 등에서 역사를 크게 후퇴시킨 박정희 정권이 그래도 내세우는 게 있다면 경제 하나 뿐인데, 그 경제라는 것도 전국의 땅을 파헤치는 과욕에 의한 거품경제가 그 본질이었다면 그 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보다 냉엄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군부정권과 민주정권의 부동산 성적의 차이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흔히 군부정권은 민주주의를 억압하긴 했으나 경제성장에 성공적이었고, 민주화 세력은 민주주의 신장에는 기여했으나 일단 정권을 잡은 뒤에는 경제성장에 실패했다는 것이 통상의 해석이다. 그러고는 은연중에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느냐?"는 식으로 민주주의를 경시하면서 뭐니뭐니 해도 경제성장이 제일이라는 성장지상주의 사고방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 이 논리의 다음 단계는 민주화 투사들의 국가경영 능력의 부족이란 비방과 역시 정의니 도덕보다는 독재롤 해도 좋으니 경제성장이 최고라는 식의 왜곡된 역사인식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부지불식간에 민주주의 경시, 독재 옹호로 귀착하는 위험천만의 사고방식이다.
2. 제2의 길: 시장만능주의
한국경제에서 박정희 모델, 즉 발전국가, 혹은 개발독재 모델이 종언을 고하고 시장만능주의로 넘어간 시기는 대개 1997년 외환위기로 보는 것이 통설인 것 같다. 장기간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동아시아가 드디어 1997년 미증유의 경제위기에 봉착함으로써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이 위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시장만능주의 관점에서 보면 동아시아 위기는 경제에 대한 지나친 국가 개입 때문에 일어났다고 본다. 즉, 1997년의 경제위기를 아시아 발전국가 모델이 종말을 고하는 단말마의 비명으로 본다. 그 반면 동아시아 모델을 높이 평가하는 수정주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 경제의 내부 근본여건(fundamentals)에는 별 문제가 없고, 이번의 위기는 다만 초국적 투기자본의 농간이나 한국 정부의 실수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경제학자들은 Amsden, Crotty, Feldstein, Sachs, Stiglitz, Wade 등 쟁쟁한 경제학자들이 망라되고 있다.
Wade에 의하면 동아시아 위기는 유동성 부족의 위기이며, 이것은 부분적으로 과도한 금융의 탈규제 때문에 발생했다. 특히 은행과 기업이 정부의 통제 없이 해외차입을 한 것이 원인이라고 해석한다. 1990년대 초 중반까지의 자본자유화는 그 중에서도 가장 무책임한 것이었다. 국내기업들은 그들이 해외에서 절반정도로 싼 이자로 차입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외채는 점점 늘어갔고 그 대부분이 민간 및 단기부채였다. 한국에서는 은행과 기업들에 의한 해외부채가 1990년대 초에는 거의 없다가 1997년 후반에는 1,600억 달러로 증가했다. 결국 경제위기는 동아시아 각국 정부의 정책 실패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OECD, IMF, 서방 정부와 은행, 기업 등의 부추김을 받아 급격하게 금융규제를 해제한 것이 화근이었다. 특히 한국은 OECD 가입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OECD가입의 조건으로 금융시장을 개방한 것이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라고 Wade는 해석한다. Stiglitz 역시 한국이 자본시장을 성급하게 개방한 것이 화근이지, 동아시아 모델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
정부의 급격한 금융 규제완화는 기업들의 해외차입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거나 느슨하게 만들었고 이는 아시아 고부채 모델의 안정조건을 해치는 것이었다. 남미와 서구의 금융시스템과 달리 아시아는 고부채 모델인데,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는 기업의 부채비율(부채/자기자본 비율)이 200%가 넘는다. 이 때, 이윤율을 넘어설 정도의 이자율 상승은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즉, 이자부담액이 부채를 늘리는 작용을 한다. 높은 실질금리 정책은 총수요를 압박하고 또한 이자부담으로 현금흐름을 압박한다. 이것은 기업부문의 채무누적을 가속화하며, 연쇄적인 기업도산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한편 한국의 자료를 가지고 경제위기의 원인을 분석한 연구를 보면 반드시 이들 후자의 견해가 지지되는 것은 아니다. 정운찬은 한국의 위기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고 내부에서 장기간 축적된 문제에서 발생했다고 본다. 실물부문에서는 과잉투자가 지속되어 왔으며, 금융부문에서도 취약하고 형식적인 대부 심사와 금융 감독으로 인해 대량의 부실대출이 누적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국내 경제의 미시적 측면에서의 결함이 경제위기의 근본원인이었다고 본다. 박원암·최공필은 한국의 경제위기에 관한 그들의 실증분석에서 한국의 위기는 단순히 투기자본의 공략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며, 경제의 근본여건(fundamentals)이 이미 악화하여 금융위기의 징후가 나타나고 난 뒤에 비로소 외부 투기자본의 공격이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허약한 경제여건과 외부의 투기적 공격이 합쳐져서 위기가 도래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지만 아무래도 전자에 더 무게가 놓인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아직은 최종 결론이 난 상태는 아니지만 이런 연구결과들은 동아시아 모델 찬양론자들의 견해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결국 동아시아 경제위기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한국 등 동아시아 모델의 성패를 판단하는 데에서, 그리고 이 지역이 미래에도 과거의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를 전망하는 데에서 매우 중요하다.
어쨌든 1997년 위기 이후 우리나라는 일시적으로 IMF의 후견하에 들어 갔고, 거기서 요구하는 소위 워싱턴 합의(The Washington Consensus) 모델, 즉 시장원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받게 되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많은 규제완화를 했고, 특히 부동산 규제 완화는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때마침 미국 유학을 다녀온 많은 경제학자들이 대학, 정부, 언론에 포진하면서 이들이 강조하는 시장 원리를 우리는 거의 매일 신문 지상에서 접할 수 있다. 이런 추세는 참여정부 들어와 더욱 거세졌고, 그들이 참여정부를 가리켜 반시장적이라고 공격하는 것이 다반사가 되었다.
이런 오해는 시장경제를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데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나라든 경제체제는 기본적으로 자원의 배분, 재화·서비스의 생산, 소득의 분배 및 사회의 재생산 등의 기능을 담당하는데, 이 중 시장이 어느 기능을 어떻게, 얼마만큼 담당하고 있느냐는 나라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모든 나라에서 정부와 시장이 역할을 분담하고 있는데, 경제 전체에서 그 둘 사이의 비율, 그리고 몇몇 구체적 영역에서의 역할 분담의 차이는 그 사회의 요구와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그 비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체제를 유지하는 한 시장경제라는 기본적 특징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의료서비스의 많은 부분을 민간기업이 담당하지만, 영국에서는 국가가 거의 전적으로 담당한다. 그럼에도 영국이 反시장경제라는 주장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영미형 자본주의'라는, 즉 영국과 미국을 한데 뭉뚱그려 시장을 중시하는 대표적 국가로 영국을 꼽고 있다.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한 지금 지구상의 어느 곳에도 시장을 완전히 배척하거나 모든 것을 시장에 의존해 해결하는 국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장경제는 일의적으로 정의되지 않으며, 매우 다양한 유형을 갖고 있다. 미국형과 유럽형이 다르고, 일본형이 또 다르다. 유럽형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도 아니어서 북유럽형과 독일 등의 대륙형이 각각 서로 다른 유형의 제도와 경제운용원리를 채택하고 있다. 사회주의에서 전환한 중국, 러시아, 동유럽도 불완전하나마 새로운 형태의 시장경제를 실험하고 있다. 각국은 금융시스템, 산업-금융관계, 정부 개입의 정도, 노사관계, 기술혁신시스템 등에서 역사적 경험이나 사회경제환경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제도를 발전시키고 있지만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본질적 차이가 없다.
흔히 시장경제의 전형으로 언급되는 미국은 ESOP이라는 노동자의 소유참여 제도를 통해 성공한 수많은 기업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초우량기업들에서 노동자가 경영에 적극 참가하니 미국은 시장경제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결국 네덜란드나 스웨덴, 독일 같은 나라들이 채택하고 있는 경제체제는 '非시장경제' 또는 '反시장경제'가 아니라 '사회적' 시장경제 또는 '조정된' 시장경제이고, 미국은 그와 다른 '주주 중심형' 시장경제, 혹은 '자유' 시장경제를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시장경제적 요소, 비시장적 요소가 혼재된 정도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근간이 시장경제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민의 정부가 내세웠던 국정목표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었는데, 참여정부는 이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질서를 구축하려는 시장개혁이나 중소기업을 육성하는 일은 공업화 과정의 부작용으로 왜곡되었던 시장질서를 바로잡는 작업의 일환이다. 오랜 기간 국가주도적 경제운용에 익숙해져 있던 경제주체들의 사고방식이 아직 충분히 바뀌지 않고, 때로는 구시대를 동경하고, 때로는 원칙에 어긋난 국가의 개입과 지원을 바라고 있으나 이제 우리의 경제체제는 확실히 시장경제 원리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한국의 시장경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정부의 역할, 혹은 공공 영역이 협소한 특징이 발견된다. 특히 노동, 복지, 보육, 교육, 보건의료 등 공공서비스 분야는 공공의 영역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월등히 협소하다. 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의 숫자가 전체 취업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한국의 경우 5%인데, 스웨덴은 30%나 된다. 스웨덴은 워낙 사민주의 모델이니 그렇다 치고,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시장모델의 모범으로 간주하고 있는 미국의 예를 보면 이 비율이 15%나 된다. 그러니 한국에서 과도한 시장 의존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취업자의 10% 정도가 다른 나라에 비해 부족하여 공공서비스가 취약하고 불편한 반면 우리나라의 영세 자영업 부문에는 다른 나라에 비해 10% 이상의 과잉인력이 몰려 있다. 이들 자영업자들은 과당 경쟁으로 수익을 올릴 수 없고 겨우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는데, 장기적으로는 이들 과잉인력이 부족한 공공서비스 분야로 이전할 때 우리의 고용구조도 정상적이 될 것이다. 이것은 장기적 인력수급 계획과 철저한 준비를 필요로 한다.
특히 1997년 이후 IMF의 권고에 따라 우리가 급속한 구조조정과 위기 해소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미국형 주주중심 모델을 도입한 게 아닌가 반성할 여지가 있다. 주주중심 모델은 매년 열리는 주주총회에서 기업 가치를 평가하여 실적이 나쁜 경영진은 사정 봐주지 않고 도태시키는 적자생존, 무한경쟁을 특징으로 하는 바 이런 상황에서 경영자들은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를 생각할 여유를 가질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월가의 주주자본주의는 경영자로 하여금 한 해의 이윤에 집착하도록 요구하여 극단적으로 단기적 시야를 갖게 만드는데, 이 점이 독일, 일본 등 소위 관계형 자본주의와는 반대다.
한국 경제가 오래 동안 세계 최고의 투자율을 자랑해온 것도 어떻게 보면 장기적 관점에서 모험 투자를 가능케 한 관계형 자본주의 모델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겠는데, 최근 몇 년간은 그런 모델이 급속히 쇠퇴하면서 그 자리를 영미형 단기 실적주의가 채워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현재의 저투자, 저성장 기조의 일부 원인이 이런 현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우리가 지나친 시장만능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단기 실적주의의 폐단은 기업 뿐 아니라 노동계에서도 발견된다. 노조 지도자들도 자신의 임기 중에 어떤 성과를 내기를 바라며 행동하는데, 그 결과는 임금 인상의 극대화, 고용조정에 대한 극단적 저항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노조가 기업과 상생하며 눈앞의 이익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고용과 임금을 극대화한다는 여유 있는 사고방식을 찾아보기 어렵다.
노사 쌍방이 단기 실적주의의 함정에 빠진 결과는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 쉽다. 각자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으나 그 결과의 합계는 오히려 최악에 가까운 역설적인 결과, 즉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상생의 길(win-win)로 가기 위해서도 우리가 지나친 시장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주의가 요망된다. 특히 노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협약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무성한데, 이런 모델은 좁은 시장만능주의의 틀을 벗어나는 넓은 시야를 요구한다.
결국 우리 경제는 지난 40년간 제1의 길=발전국가와 제2의 길=시장만능주의의 어느 한 쪽으로 극단적으로 치달은 느낌을 준다. 박정희 시절 우리 경제가 지나친 관치경제의 폐단을 안고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최근 일부 언론과 학계의 요구는 그 반대 극단으로 가서 지나친 시장만능주의, 시장 맹신주의가 아닌가 걱정스런 면이 있다. 전자가 정치적 독재였다면 후자는 시장의 독재(market despotism)다.
이제 발전국가 모델과 시장주의 모델의 장단점을 골고루 경험한 지금 우리는 두 모델의 한계를 넘어서서 우리 실정에 가장 적합한 모델을 스스로 모색해야 할 임무를 피할 수 없다. 세계 각국은 정부와 시장 사이의 역할 분담에 대해 나름대로 시행착오 끝에 현재 보는 다양한 시장경제 모델에 도달하였다. 우리도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우리의 앞길을 개척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발전국가도 아닌, 그렇다고 과도한 시장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이 될 것이다. 그것을 찾기 위해 세계로 눈을 돌려 보자.
3. 대안을 찾아서: 다양한 자본주의 모델
지금 세계경제를 이루는 주요 정치경제 모델을 <그림 1>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X축은 성장이냐 (재)분배냐 하는 관점에서 오른 쪽으로 갈수록 성장을 중시하는 체제이고, 왼쪽으로 갈수록 (재)분배를 강조하는 체제이다. Y축은 자원배분 방식에서 시장과 정부의 비중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인데, 위로 갈수록 정부의 비중이 크고, 아래로 갈수록 시장의 비중이 큰 체제를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몇 개의 주요 정치경제 모델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우선 좌상귀에 구 사회주의 모델이 존재한다. 이는 일명 스탈린 모델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으로서 시장의 역할이 극단적으로 무시되고, 국민경제가 거의 전적으로 정부의 계획,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체제를 말한다. 이는 과거 소련, 중국, 북한, 쿠바 등을 망라하고 있었고 한때는 고성장을 자랑했으나 그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붕괴하였다. 지금은 대부분의 나라가 체제개혁을 통해 이 영역을 탈출하고 있다. 이동 방향은 우하향, 즉, 시장원리의 도입, 경제 성장, 사회보장의 약화, 빈부격차의 확대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 베트남, 러시아 등은 개혁정책을 통해 고성장을 달성하고 있으나, 빈부격차, 지역격차 확대, 부패 등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유독 북한만은 여전히 이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구체제를 고수하고 있어 저성장,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우상귀에 있는 것이 발전국가 모델, 혹은 박정희 모델, 개발독재 모델이다. 이 모델의 원조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경제를 급속히 공업화 시키는 데 성공한 부국강병 모델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은 에도 시대 쌀 장사, 고리대 등으로 돈을 모은 미쯔이, 미쯔비시 등을 찾아가 제조업 투자를 겁내는 이들에게 투자만 해주면 이런 저런 특혜를 주겠다고 설득하고 다녔다. 이것이 일본의 부패한 관치경제 모델의 출발이다. 이 모델의 변형은 1930-40년대 만주국에서 나타났고, 이 때 일본질소비료, 닛산 자동차 등 신재벌과 군부, 관료의 결탁이 나타났다. 만주국을 경영했던 '2키 3스케'(도조 히데키, 기시 노부스케 등 5인의 주역을 말함)의 산업정책은 고도성장을 가져왔는데, 이 모델이 전후 일본의 부흥을 가져온 소위 '일본주식회사' 모델의 원조다. 만주국에서 군관학교 생도와 일본군 장교로 젊은 시절을 보냈던 박정희가 후일 집권후 한국의 경제성장 모델을 만주국 모델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본, 한국은 물론이고 1930년대 히틀러의 파쇼경제 역시 고도성장을 했으니 이 모델은 단기적으로는 상당한 고성장을 가져옴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모델이 갖는 반민주적, 반민중적, 소외적 성격과 더불어 결정적인 문제는 모델 그 자체의 한계로 인해 오래 갈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 모델로 한때 고성장을 구가했던 나라들이 지금은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역시 탈출이 불가피한 모델이다.
그렇다면 위쪽에 있던 두 개의 모델은 한때 성공적이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으며, 현실적으로 존립가능한 대안은 하단에 있는 세 개의 자본주의 모델이다. 아래쪽으로 내려오지 않고는 생존이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아래쪽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국가 개입을 줄이고, 시장원리를 확대한다는 것이다. 세 개의 길이 기다리고 있다. 맨 오른 쪽이 자유시장경제, 혹은 신자유주의 모델로 불리는 소위 시장만능주의 모델이다. 영국,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미국이 여기에 속한다. 일명 영미형 모델로 불린다. 가운데는 유럽대륙형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이 있다. 일명 조정된 시장경제라고 불리며, 독일, 화란, 벨기에,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이 여기에 속한다. 제일 왼쪽에 있는 것은 역시 사회적 시장경제, 혹은 조정된 시장경제 모델이지만 유럽대륙과는 다소 성격을 달리 하는 북구형 사민주의 모델이 있다.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와 셋째 모델을 합쳐서 사회적 시장경제(혹은 조정된 시장경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유럽대륙과 북구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분리해서 논하는 경우가 많다. 유럽대륙형은 기민당의 철학을 바탕에 두고 있으며,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하는 담합주의(corporatism)로 특징지울 수 있는 반면 북구 사민주의는 보편적 복지, 공공서비스의 脫商品化(decommodification)를 특징으로 한다. 세 모델 사이에 1인당 소득은 거의 같다. 그러나 실제 경제의 운용원리, 성격에서 이 세 모델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표 2> 3자본주의의 주요 경제성과
성장률을 보면 1960-80년 기간에는 유럽이 영미형보다 성장률이 높았으나 1980-2000년에 오면 유럽 대륙의 성장 둔화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는 반면 영미형의 상대적 善戰이 눈에 띈다. 그러나 영미형의 성장률이 떨어지지 않은 것은 주로 아일랜드의 고성장에 힘입은 바 크므로 아일랜드를 제외하면 이 세 모델의 성장률은 큰 차이가 없이 거의 수렴 현상을 보인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수출 비중을 보면 유럽이 영미형에 비해 확실히 높다. 개방경제이니 만큼 수출경쟁력 확보를 중요한 경제정책 목표로 삼고 있으며, 특히 임금 인상 자제를 통한 수출경쟁력 확보에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다. 표에는 없지만 국제수지를 보면 유럽은 대개 국제수지가 흑자인데, 반해 영미형 국가 중에는 국제수지 적자국이 많다.
이 세 모델의 가장 큰 차이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소득분배이고 다른 하나는 고용 증가에 있다. 소득분배를 보면 북구가 가장 평등하고, 유럽대륙이 그 다음이며, 영미형 국가는 상대적으로 불평등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유럽은 소득분배 뿐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차별과 불평등이 적고 사회연대를 기본 원리로 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의 별명이 '사회적 유럽'이다. 그에 비해 미국의 별명은 '일자리 기계'다. 일자리 창출에서는 유럽보다 훨씬 우수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유럽과 영미형을 구별하는 두 번째 특징이다. 즉, 고용증가 속도에서 유럽보다 영미형이 훨씬 빠르다는 점, 즉, 일자리 창출에서는 영미형이 유럽에 비해 우월하다는 점이다. 이 차이는 보통 유럽 각국이 지나치게 고용을 보호하는 데서 고용주들이 채용을 꺼리는 등,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발생하는 반면, 영미형 국가, 특히 미국에서는 손쉽게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기 때문에 채용이 쉽다는 것으로 보통 설명되고 있다.
고용 문제를 좀 더 깊이 분석해보기로 하자. <표 3>에는 3자본주의 모델의 실업률이 시기별로 나타나 있다. 이 표에 의하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와는 달리 실업률에서 영미형과 유럽형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핀란드와 독일이 여전히 높은 실업에 시달리고 있으나 이 표에 나와 있는 나라들은 대개 최근 들어 실업률이 크게 하락하였다. 우리가 유럽 하면 높은 실업률을 연상하는 것은 이 표에는 없는 스페인, 프랑스 등의 나라 때문이다.
최근에 와서는 3모델 사이에 실업률 차이는 거의 없다. 미국은 클린턴 이후 일자리가 많이 늘어나서 실업문제가 거의 해소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표에서 보듯이 미국 실업률은 5% 대로서 거의 자연실업률 수준이다. 그러나 미국의 성인남자 중 100만명 이상이 감옥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미국 성인 남자의 실업률은 2% 포인트 정도 상향조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의 실업률은 그리 자랑할만한 수준이 못된다.
.......................<표 3> 3자본주의의 실험률(1980-2003)
미국이 자랑할만한 게 있다면 그것은 실업률 수준이 아니고, 고용의 증가율이다. 위의 <표 2>에 나와 있듯이 1990-2002년 사이 연평균 일자리 증가율을 보면 영미형 국가(1.7%)가 유럽대륙(0.8%) 혹은 북구(0.1%)를 크게 앞지르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는 고용의 보호 수준을 보면 유럽이 영미형 국가보다 높다는 점이다. 이것 때문에 유럽 고용주들은 신규 채용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용보호가 높아서 반드시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용보호로 인해 유럽 노동자들의 근속연수가 영미형 국가보다 길고, 그 점에서 숙련형성에서 더 유리하다는 점이 있다. 영미형 국가는 노동자가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에서 오래 일할 수 있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기업특수적 숙련에 관심이 없고 숙련형성에 투자하지 않는 반면 유럽 노동자들은 장기 근속 보장이 있기 때문에 기업특수적 기능을 습득하려는 인센티브가 있다. 이 점은 생산성 향상에서 중요한 차이를 가져온다.
유럽과 영미형 사이에 고용 증가 속도의 차이를 가져오는 두 번째 요인으로는 유럽의 임금 분배가 영미형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곧 저숙련 노동자들의 임금이 유럽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이고, 이것이 신규 채용을 저해하는 측면이 있다. 그 대신 일자리의 질을 본다면 미국 쪽은 저임금의 서비스 직종 일이 많이 생기는데, 이것은 다시 임금 및 소득분배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바람직하지 못한 면이 있다.
임금 협상제도에서 유럽형, 북구형과 영미형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유럽, 특히 북구는 임금협상이 중앙집중형으로 되어 있는 반면 영미형은 분산형으로 되어 있다. Mancur Olson은 임금협상이 분산적으로 이루어질수록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통해 얻는 이익이 크므로 임금인상이 높아지고, 반대로 임금협상이 중앙집중적으로 이루어질수록 노조 측에서 임금인상으로 인한 이득이 적기 때문에 임금인상을 자제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하였다(Olson, 1982). 실제로 유럽은 대체로 산업별 교섭을 하며, 어떤 나라는 중앙집중식으로 교섭하는 나라도 있다. 스웨덴은 한때 중앙집중식 교섭으로 유명했으나 기업측에서 강하게 반발하는 바람에 지금은 보다 분산되어 거의 독일식에 가까운 산업별 교섭을 하고 있다.
유럽, 북구에서 임금협상에서 분권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역시 지역별, 산업별, 심지어 기업별로 교섭을 하는 미국에 비하면 훨씬 집중적 교섭을 하고 있다. 그 결과 임금 인상 자제라는, 수출주도형 국가로서는 대단히 소중한 결과를 얻고 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 무역수지 흑자를 누리고 있는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그 반면 영미형 국가에서는 임금 교섭이 분권화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자로서는 국민경제 전체를 생각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임금인상을 자제하려는 노력도 적다.
<표 4>를 보면 각국의 노조 조직률과 단체협약 적용비율이 나와 있다. 세계적으로 노조 조직률은 하락한다고 흔히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자본주의 유형에 따라 많이 다르다. 북구에서는 노조 조직률이 놓을 뿐 아니라 하락하지 않고 있다. 특히 크게 하락한 곳은 영미형 국가다. 유럽대륙은 조직률이 하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유럽의 노조는 여전히 강력한데, 그 이유는 단체협약 적용률이 여전히 매우 높기 때문이다. 영미형 국가 중에는 호주만 예외적으로 이 비율이 높고 나머지는 유럽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낮다. 특히 미국은 노조가 크게 쇠퇴하고 있고, 이것이 미국의 양극화 심화의 큰 이유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노조는 그 자체 임금평준화 효과가 있는데, 노조가 약화하는 바람에 이런 견제력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노조 조직률 13%에 가까운 것이 우리나라의 조직률 11%다. 두 나라는 노조가 약하고, 국민의 지지를 별로 못 받고 있다는 점이 비슷하다.
.......................<표 4> 3자본주의의 힘금협상 제도(1980-2000)
각국별 임금교섭 제도의 차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한국은 수출주도형 국가이면서 매년 임금교섭이 분산적으로 기업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게다가 전투적, 대립적 노사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매년 큰 폭의 임금인상이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고, 또 교섭과정 자체도 길고 험난하여 협상비용도 큰 편이다. 임금교섭 수준을 중앙집중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산업별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 바람직한데, 문제는 사용자측이 이를 반대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산업별 교섭을 하게 되면 노동자들이 지금보다 더 과격한 요구를 할 것으로 보고 극구 반대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퇴양난의 모습이다. 세계에서 기업별 노조를 가진 나라는 일본, 한국 정도인데, 일본은 협조적 노사관계를 갖고 있으니 기업별 교섭을 해도 별 문제가 없으나 우리는 대립적 노사관계를 갖고 있어서 임금교섭에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다. 과거 독재 시절 노조를 무력화시키는 데 기업별 노조가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이런 특이한 제도를 도입했으나 민주화 이후에는 오히려 이 제도가 우리나라 경쟁력을 저해하는 족쇄가 되고 있는 것이다. 제도의 부조화가 문제다.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제도의 부조화는 또 있다. 박정희 모델은 노조, 농민에 대한 가혹한 탄압으로 저임금, 저곡가를 바탕으로 수출주도형 전략을 추구하였다. 이 시기는 정치적 독재와 경제적 독재가 양립하던 시기다. 이것은 바람직한 모델은 아니지만 제도 자체는 내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1987년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제도의 조화는 깨졌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성립하고 있으나 경제민주주의는 성립하지 못하고 있는 데서 오는 부조화가 존재한다. 노조 탄압, 농민 탄압이 없어지니 과격 시위, 과도한 임금 인상이 끊이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처럼 수출을 해서 먹고 사는 나라에서 이것은 지속가능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이 부조화를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치적 독재로 후퇴하는 길인데, 역사는 불가역이라 뒤로 돌아가는 법은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가는 길 밖에 없고, 그것은 경제적 민주주의를 신장하는 방법이다. 경제 민주주의의 신장을 통해 노동자, 농민들이 보다 성숙한 자세를 갖고, 임금인상이나 과격 시위를 자제하도록 해야 한다. 경제민주주의는 어떻게 달성가능한가? 그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데, 거시적으로는 사회적 대화 모델을 도입하는 것이고, 미시적으로는 조직의 민주화이다.
사회적 대화 모델의 위력은 이미 1982년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Wassenaar Accord)와 1987년 이래 아일랜드의 사회협약으로 증명되고 있다. 네덜란드는 이 협약을 통해 저성장, 고실업, 재정적자 누적 등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일약 고성장, 고고용으로 국면을 전환하였다. '和蘭病'(The Dutch Disease) 환자가 '화란의 기적'(The Dutch Miracle)을 일으켰다. 아일랜드는 1987년 이후 매 3년마다 새로운 사회협약을 맺고 있는데, 이를 통해 임금 인상의 자제, 생산성 향상, 외국 자본의 대량 유입, 고성장을 실현하고 있다. 아일랜드는 과거 오래 동안 영국 식민지로 있었던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이지만 사회협약을 통해 면모를 일신하였고, 영국보다 앞서 1인당 소득 3만불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것을 기념하여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는 Dublin Spire라고 하는 뾰죽한 기념탑이 자랑스럽게 서 있다.
조직의 민주화란 무엇인가? 기업을 예로 들어 보자. 기업의 민주화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소유를 민주화하는 것으로서 대표적인 방법이 종업원지주제이다. 미국의 ESOP(Employee Stock Ownership Plan)이 1만개 이상의 기업에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이 기업들은 생산성, 이윤, 노동자 사기, 기업 성장 등에서 확실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소위 고성과기업(High Performance Business Organizations) 중에는 ESOP를 채택한 기업이 많다. 종업원지주제는 영국과 미국에서 크게 성공하고 있다. 그 반면 유럽 대륙의 기업에서는 소유보다는 의사결정에서의 민주화에 주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공동결정제도(Mit-bestimmung)다. 공동결정제도는 기업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와 감사회에 노동자 대표가 앉아서 의사결정에 노동자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독일의 회사는 이사회 위에 감사회라는 2중 조직이 되어 있는데, 감사회에 노동자 대표가 1/3 내지 1/2 참석해서 노동자의 권익을 대표한다. 노동자 대표가 1/2이라도 의장은 항상 주주측에서 맡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종국에는 주주측의 의견이 관철된다. 중요한 것은 이 기구를 통해 노사가 끊임없이 대화, 의논해서 결론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이사회에도 노동이사가 참석해서 노동자를 대변한다. 또한 낮은 수준의 의사결정기구로 직장평의회(Works Councils)가 기업마다 있어서 노동자 대표들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경영자들과 대화, 협의한다. 이사회, 감사회에 노동자 대표가 자본측과 거의 동수로 앉는 것은 독일이 유일하고, 스웨덴이 부분적으로 공동결정제도를 도입, 운영하고 있지만 직장평의회는 거의 모든 유럽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소유의 민주화를 목적으로 하는 종업원지주제를 경제민주주의, 의사결정 참가를 목적으로 하는 공동결정제도나 직장평의회를 산업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체로 영미형 국가는 경제민주주의 쪽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유럽 국가들은 산업민주주의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그림 2>와 같다. 한국은 우리사주제도가 있어서 경제민주주의 방면으로는 약간의 진전을 보이고 있으나 아직 갈 길이 멀고, 산업민주주의 쪽으로는 이제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다. 경제의 민주화가 있어야 비로소 노조도 과격 투쟁을 지양하고, 보다 합리적으로 기업의 성장을 생각하고, 임금 인상을 자제하는 등 기업경영에 협조적 자세로 바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정치의 민주화와 경제의 민주화가 양립하면서 서로 제도적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지금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비민주주의의 부조화가 심하고, 거기서 오는 갈등 비용이 너무나 크다. 경제의 민주화를 통한 제도의 조화가 다음 단계인데, 우리는 그 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4. 성장과 분배: 상극 혹은 동행?
선진국에서는 시장소득(세금 및 이전지출 이전 소득)의 불평등이 상당히 크지만 정부의 개입을 통해 가처분소득(세금 및 이전지출 이후 소득)에서는 불평등이 크게 완화되어 나타난다. <표 5>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정부의 개입을 통한 소득 재분배효과는 모든 나라에서 크게 나타나지만 특히 북구(32.9%)가 유럽대륙(25.7%)이나 영미형(22.6%)보다 크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 이런 재분배효과가 아주 미미하여 5%에도 미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복지제도가 미비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만큼 한국은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먼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파들은 복지가 성장을 해친다고 아우성이다. 참여정부가 분배에 치중한 나머지 저성장을 가져왔다는 주장이 지난 4년 동안 보수언론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참여정부는 분배에 충분히 주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분배가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는 주장 자체가 옳지 않다.
.......................<표 5> 3자본주의의 소득재분배 효과 비교
참여정부가 분배에 주력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분배에 충분히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이처럼 불황이 오래 가고, 서민들의 고통이 크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진단일 것이다. 실제로 선진국에서는 불경기가 계속되면 각종 사회보장 지출이 자동적으로 증가하여 경기회복을 앞당기는 역할은 하는데 - 이를 경제의 자동안정장치(automatic stabilizers)라고 부른다 - 우리나라는 복지국가가 아니므로 그런 기능이 미약하다. 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40년간 成長至上主義가 지배해온 나라다. 겨우 복지의 기초를 마련한 게 '국민의 정부'의 업적이고, 그것도 1998년 경제위기를 맞아 미증유의 대량실업과 경제 양극화가 사회적 위기 수준에 도달하면서 가능하였다. 정부 예산 중 복지예산의 증가 속도가 평균보다 빠르다는 점을 들어 참여정부가 분배에 주력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국민연금 등의 수혜자의 자연 증가에 기인하는 것이 주된 원인이며, 정부의 적극적 의지에 의한 복지 지출의 증가는 그다지 크지 않다. 실제로 후자로 인한 복지지출의 증가율은 전체 예산의 평균 증가율보다 높지 않으므로 참여정부가 분배, 복지에 치중해왔다고 하는 세간의 평가는 성립하기 어렵고, 따라서 분배주의 운운하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숫자를 보자. 한국의 복지지출은 늘었다고 하지만 아직 GDP 대비 10%에 미달인데, 선진국이 1만불 소득 수준일 때 이 값이 평균 15%였다는 점과 비교하면 한국의 복지지출은 크게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사회예산이 경제예산보다 적은 아주 희귀한 예에 속한다. 오죽하면 OECD 사무총장 Donald Johnston은 우리나라에 올 때마다 제발 한국은 사회안전망을 갖추라고 역설하겠는가? 참고로 말하자면 Johnston은 복지계 출신 인사가 아니고 캐나다 재무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둘째로 분배가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는 이야기는 신물이 날 정도로 많이 들어 왔지만 실은 이론적, 실증적 근거가 없다. 근거 없는 주장이 국민을 오래 동안 오도해 왔다. 진실은 무엇인가? 한때 경제학 교과서에서 분배와 성장은 상충하는 것처럼 가르칠 때가 있었다. 분배가 불평등할수록 저축, 투자가 높고, 성장이 빠르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정설이 아니고, 실증연구를 통해 그 타당성이 뒷받침된 적이 없다. 오히려 최근 10년간 이 문제를 다룬 수많은 실증 연구는 압도적으로 그 반대의 사실이 진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즉, 분배가 잘 된 나라일수록 성장이 빠르다는 것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참여정부가 분배에 치중하여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거의 맹목적으로 비난하고 있는데, 이는 그것과 반대되는 최근 연구를 접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실토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19세기 말 경제학자 Alfred Marshall은 경제학도가 지녀야 할 태도로서 '차가운 두뇌와 따뜻한 심장'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따뜻한 두뇌와 차가운 심장을 가진 경제학자들이 꽤나 많아서 걱정이다.
경제학에는 다양한 이론들이 있으며, 분배와 성장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반드시 상충론만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세계은행에서 나온 보고서(Chenery et al, 1974)는 저개발국의 빈곤과 불평등이 성장을 저해한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성장과 재분배의 동시 달성이 가능하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특히 토지, 인적 자본, 신용에의 접근성 등 생산적 자산을 빈민들에게 유리하게 재분배하는 정책을 씀으로써 성장과 재분배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책의 제목도 '재분배와 성장의 동시달성'이었다. 이런 새로운 주장이 충분히 검증되지 못한 채 1980년대에 들어와 신자유주의, 워싱턴 합의가 나타나면서 성장지상주의가 경제학의 판세를 주도한 것은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다.
그리하여 경제학계에서 분배와 성장의 관계가 다시 조명을 받게 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이 시기에 분배와 성장을 보는 새로운 관점이 출현하였다. 이 견해는 불평등이 성장에 유해하다고 보는 점에서 새로운 관점이다. 이 새로운 관점은 세 개의 이론적 기둥 위에 서 있다. 첫째는 조세-재분배 경로다(Alesina and Rodrik, 1994). 어떤 나라가 소득분배가 불평등할수록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정부에 대해 소득재분배 정책을 위해서 세금을 많이 거둘 것을 요구하게 된다. 이는 공공선택이론에서 나오는 중위투표자 모델(median voter model)로 쉽게 설명된다. 과도한 세금, 과도한 재분배는 성장을 저해한다는 것이 이 이론이 함축하는 바이다.
둘째는 사회적, 정치적 불안정과 관련이 있다. 어떤 나라의 소득분배가 지나치게 불평등하면 사회적, 정치적 불안정이 클 것이고, 그런 나라에서는 투자가 활발히 일어날 수가 없고, 그 결과 성장은 저해된다(Alesina and Perotti, 1996). 사회적 불안정은 직접적으로 기업가들로 하여금 투자를 꺼리게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빈부격차가 심한 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범죄의 예방을 위해 과도한 비용을 지출하도록 만들어 간접적으로 투자를 저해하게 되는데, 어느 경로이든 결국 지나친 불평등이 성장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셋째, 신용시장이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지나친 불평등은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교육투자를 위한 융자를 어렵게 만들고, 결국 빈민들의 교육투자를 낮춤으로써 경제성장을 저해하게 된다(Persson and Tabellini, 1994: Birdsall and Londono, 1997). 가난한 집의 애들은 비록 똑똑하더라도 학자금 마련이 어렵고, 따라서 적정 수준 이하의 인적자본 투자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사회투자국가'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이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의 중요성인데, 이를 위해서도 평등한 분배가 필요한 것이다.
최근 10여년 간 나온 많은 실증적 분석은 대체로 분배와 성장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지지해주고 있다. 그러나 아직 만장일치라고 할 수는 없고, 게 중에는 새로운 관점을 부정하는 연구(Forbes, 2000)도 있어서 좀 더 결과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이 문제를 보자면 지금까지 소위 복지국가의 '위기' 혹은 '소멸'에 대해서 수도 없이 많은 연구가 쏟아져 나왔지만 복지국가는 건재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복지국가의 위기를 주로 강조하고 있지만 오히려 복지국가의 긍정적 효과를 밝히는 연구도 많이 있고, 지금까지 복지국가가 성장을 저해한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Pfaller, 1990: Atkinson, 1999: Wilensky, 2002: Lindert, 2004: Pontusson, 2005).
예를 들어 Atkinson(1999)은 복지국가가 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10개의 연구를 검토하였는데, 이 중 4개 연구는 +효과, 4개 연구는 -효과, 2개의 연구는 효과 不明의 결과를 얻었다고 하면서 복지국가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반박하였다. LIndert(2004)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지국가일수록 경제성장이 더 빠르다는 것을 역사적 증거를 들어 주장하고 있다. Pontusson(2005)는 복지국가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닌가 하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즉, 복지국가는 1960, 70년대까지는 성장에 +의 영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1980, 90년대에 오면서 +효과가 사라졌는데(그렇다고 -는 아님), 그 이유로서 주로 고령화로 인해 복지지출의 주요 내용이 노인에 대한 지출이 증가하면서 경제성장에는 유리한 효과를 갖기 어렵게 된 점을 들고 있다.
복지국가를 둘러싼 온갖 논쟁도 선진국에서나 타당한 것이고, 한국처럼 소득수준에 비해 복지지출이 턱없이 낮은 나라에는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일부 복지국가의 경우에는 조세를 통한 재분배와 관대한 복지제도가 과도한 측면이 있고, 따라서 실패를 교정하기 위해서 복지국가를 수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감세와 작은 정부를 향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정부에도 똑 같은 것을 요구한다면 이보다 더 불합리한 주장도 없을 것이다. 방금 보았듯이 유럽에서도 1960-70년대에는 복지국가가 경제성장에 +효과를 가졌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한국의 현재 복지 수준이 유럽의 1960-70년대 수준에 불과하다면 한국에서 복지지출의 확충은 성장에 +효과를 가질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국은 소득수준에 비해 너무 낮은 복지제도를 갖고 있다. 한국에 대해서 소위 복지병이나 영국병을 걱정한다면 이거야말로 杞憂다. 비유하자면 이제 막 등산을 시작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너무 높이 산에 올라갔다가 高山病을 만나서 하산하는 걸 보고, "아! 이게 요즘 대세로구나, 우리도 내려가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5. 제3의 길은 가능한가?
1980년대 이래 요란한 시장주의 반혁명에도 불구하고, 영미형 모델이 확실한 우위를 차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혁명의 기수는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이었다. 한국에서는 대처 총리가 대단한 영웅으로 추앙받는데, 정작 그의 집권기 성장률을 보면 그 전후 시기에 비해 높은 것이 아니다. 레이건 대통령도 설익은 공급측의 경제학을 채택했지만 남긴 것은 거대한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의 쌍둥이 적자였다. 영미형 시장주의 모델은 여러 가지 가능한 시장경제 모델 중 하나일 뿐이고, 그것이 다른 모델에 비해 우월하다는 증거는 없다(Hall and Soskice, 2001: Amable, 2003).
오히려 <표 6>이 보여주듯이 지난 10-20년간의 경제 종합 성적표를 보면 영미형 시장모델과 대척점에 서 있는 북구 모델이 오히려 우수한 성적을 보이고 있음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북구 모델은 영미형 모델과 비교할 때 효율성, 성장에서 비슷한 성적으로 올리면서도 분배의 평등, 사회적 통합성에서는 훨씬 나은 성과를 보이고 있어서 영미형 모델을 능가하고 있다. 북구는 소득분배가 평등하고, 빈곤이 훨씬 적으며, 범죄도 훨씬 적다. 최근 발표된 각국 국민의 삶의 만족도 조사에서도 북구 여러 나라가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들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라는 것을 보여준다.
.......................<표 6> 자본주의의 3대 모델
국내에서도 몇 년전에 여론조사한 바에 의하면 가장 살고 싶은 나라는 북구형 사민주의인 것으로 나타난 적이 있다. 이래저래 북구형 사민주의는 우리의 이상향이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실현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이르면 많은 사람들이 회의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규모를 이야기한다. 한국의 인구가 4800만이나 되니까 인구 500 - 1천만의 소국인 북구는 우리에게 참고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경제규모가 우리의 17배나 되는 미국은 추앙하면서 왜 북구는 우리의 모델로 삼으려 하지 않는가?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정치 스펙트럼이 너무 보수적이어서 노동조합도 약하고, 진보정당도 약하고 해서 북구형 모델은 실현불가능하다고 한다. 그 말은 맞다. 그 대신 우리에게는 강력하고 건강한 시민단체들이 있다. 사회협약의 당사자로 노사와 더불어 시민단체가 들어오면 상당한 균형추 노릇과 추진력을 기대할 수 있다.
스웨덴은 100년전에 이미 노총(LO), 경총(SAF)을 만들고, 사민당이 탄생했으며, 1938년에 이미 노사가 대타협하는 살츠요바덴(Saltsobaden) 협약을 맺는데 성공했는데, 우리는 이 나라의 1세기 전 수준만 못하다는 말인가? 이는 지나친 패배주의가 아닌지. 안 된다고 생각하면 매사가 안 되는 법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人必自侮然後人侮之"라 했는데, 우리가 스스로를 경멸하니 남도 우리를 경멸하는 것이다.
이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경제는 지금 제1의 길인 관치경제는 그 수명을 다 하였으며, 제2의 길인 시장만능주의는 지금 왕성한 기세로 뻗어나가고 있으나 미래에 지속가능한 모델이 되기는 어렵다. 이 모델 역시 제1의 길이 그러했듯이 자체의 문제점이 누적되어 존립이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이 올 것으로 본다. 제3의 길로 우리가 선택할만한 길은 북구형 사민주의가 남는다. 이 모델은 이미 여러 나라에서 장기간 검증되어 유일하게 존립 가능하며,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대안적 모델임이 증명되었다.
이 모델로 가는 방법으로 정치 민주화와 제도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경제의 민주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거시적으로는 사회적 대타협, 미시적으로는 조직의 민주화를 제시하였다. 또 하나 필요한 것이 성장과 분배를 조화시킬 복지국가의 발전이다. 복지국가는 우리나라에서 마치 성장의 방해물 정도로 인식되고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 단계의 초보적 복지 수준에서는 얼마든지 복지와 성장을 조화시킬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끝으로 한국의 열악한 공공서비스 - 교육, 의료, 복지.... - 현실을 볼 때, 올바른 방향은 "官治는 줄이되 公共은 늘인다"는 쪽이라고 생각한다. 과도한 관치도 과도한 시장도 우리의 방향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오랜 관치의 타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만능주의의 유혹을 아울러 경계하면서 우리 실정에 가장 적합한 시장경제 모델을 찾아 나가야 한다. 이 일은 앞서간 다른 나라의 경험에서 참고할 수는 있으나 결코 전적으로 의존할 수는 없으며, 우리의 독창적 노력에 따라 우리 스스로의 제3의 길을 열어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최근 한미FTA가 체결되었는데, 이 협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 경제의 미래 행로를 영미형으로 제한해버린다는 점이다. 다른 모델을 택하고 싶어도 투자자-국가 제소라는 무서운 장치가 들어와 있어서 우리 경제의 장래 운신의 폭은 극도로 제한될 것이다. 영미형은 시장경제의 하나의 모델일 뿐이고, 가장 이상적인 모델도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장래 운명이 거기에 얽매여야 하나. 하나의 통상협정에 의해 우리나라의 운명이 결정 난다는 사실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제3의 길을 가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 경제보다 훨씬 인간적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정치적 독재 30년, 시장독재 10년의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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