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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우상화의 효시 보천보전투기념탑, 지금 그곳엔…

[압록·두만에서 바라본 북한의 오늘]<10>

지난 8월 초순 한국의 북한전문가들이 8박9일 동안 압록강 서쪽 끝 단동(丹東)에서 두만강 동쪽 끝 방천(防川)까지 북·중 국경 1376.5㎞, 3000리가 넘는 거리를 답사하면서 강 건너 북한 땅의 사정을 보고 듣고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답사는 북한 전문가들이 그 동안 문헌자료와 현장경험을 통해서 축적해온 지식과 눈앞의 현실을 대조하고 검증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답사단의 분석과 평가는 정보와 자료로서 가치가 적지 않습니다. <프레시안>은 답사단의 일원이었던 황재옥 박사가 이번 현장답사에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들을 정리한 글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여섯째 날] 혜산의 보천보전투기념탑, 백두산 북파,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

김일성 우상화의 효시(嚆矢) 보천보전투기념탑

발해 유적 영광탑이 있는 곳은 혜산시를 한 눈에 내려다보기에 좋은 곳이었다. 영광탑이 서있는 산에서 내려다 본 혜산시는 지금까지 접경지역에서 봐 왔던 도시 중 단연 큰 도시였다. 도시가 압록강을 따라 형성되어 있어, 길쭉하면서도 '부메랑(boomerang)'처럼 중간이 살짝 구부러진 모양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영광탑이 있는 산에서 건너다볼 때 눈에 띄는 언덕이 하나 있었다. 그 언덕 위에 보천보전투(普天堡戰鬪)를 기념하는 것으로 보이는 조형물이 높다랗게 솟아 있었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 부대의 항일 보천보전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967년 6월 혜산에 세운 보천보전투 기념탑인 것 같았다. 북한은 일제시대 만주 창바이에 근거를 둔 김일성의 부대가 함경남도 보천보에 있던 일제의 관공서를 습격한 사건을 보천보전투라고 부르고 있다.

▲ 보천보전투기념탑 ⓒ황재옥

북한 정치사에서 1967년 6월은 북한 당국이 '당의 유일사상체계'가 확립되었다고 발표한 시점이다. 즉 그때부터 김일성 우상화 작업이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북한 당국은 김일성 우상화의 근거를 항일혁명투쟁에서 찾았다. 보천보전투는 김일성 우상화 과정에서 내세울 수 있는, 최초의 성공한 항일혁명투쟁이었던 것이다.

북한 당국은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서 1969년부터 각급 기관에 '항일혁명역사연구실'이라는 것을 만들도록 했다. 그러나 정치사상교육이나 정치세뇌에는 연구나 교육보다 정서적 접근이 더 효과적이고 직접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1967년 6월 혜산에 보전보전투기념탑을 세운 것은 북한 정치사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평양시내 만수대 언덕의 김일성 동상도 1972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보천보전투기념탑은 김일성 우상화 작업의 효시(嚆矢)인 셈이다.

북한 당국의 설명에 의하면, 1937년 6월 4일 밤 10시, 창바이에 근거를 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路軍) 제2군 제6사(師) 백두산지구 유격구' 소속 90명의 부대원들이 제6사장(師長)이던 김일성의 지휘 하에 압록강을 건너 혜산진에서 20㎞ 떨어진 보천보에 침투하여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등 일제의 관공서를 습격했다. 현지인 60여명이 합세, 총 150명이 동원된 이 '전투'(습격)에서 일본경찰 7명이 죽고, 여러 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 '전투'를 위해 주력부대는 창바이에서 혜산으로 강을 건너 보천보로 직행했고, 나머지 병력은 일제의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무산 주재소를 습격하는 식으로 작전을 벌였다고 한다. 무산쪽으로 우회한 병력의 지휘관은 최현(崔賢)이었다고 한다. 최현은 김정일 사후 김정은 체제에서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인 최룡해(崔龍海)의 아버지이다.

보천보전투와 관련하여 북한 당국의 설명과는 다른 설명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당시 인구 1300명에 불과한 보천보 주재소에는 경찰이 5명밖에 없었고, 일본인 요리사와 유탄에 맞은 갓난아기가 사망했을 뿐 그 피해가 북한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는 설도 있다. 대대적인 전투라기보다는 일종의 '보급투쟁'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동아일보>와 <경성일보>는 이 사건을 호외로 대서특필하였다. 일제탄압이 극심했던 시기에 일어난 이 사건을 언론매체가 대서특필함으로써 조선인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고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보천보 습격 사건 관련 호외를 두 번이나 발행했던 <동아일보> 기사의 동판이 오늘날 금박까지 씌워져 묘향산에 있는 '국제친선전람관'에 자랑스럽게 진열되어 있다고 한다.

보천보전투 이후 일제 당국은 상당히 당황했다고 한다. 만주에 근거지를 둔 항일빨치산이 최초로 국내 진공작전을 펼친데다, 그 결과가 언론에 크게 보도됨으로써 일제의 체면이 구겨졌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이 작전의 성공 후 커다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보천보전투가 사실 작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일제 치하 총독부가 있는 경성(서울)에서도 크게 다루었다는 것은 당시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혜산은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에 있어 의미 있는 지역이다. 북한 입장에서 김일성 우상화와 항일혁명전통 교육 차원에서 맨 먼저 기념탑을 세울 만한 곳이 혜산이었던 것이다.

보천보전투기념탑을 바라보면서 보천보전투 당시를 상상해보니, 압록강의 강폭이 그리 넓지 않아 건너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쪽 둑에서 건너편 둑까지 넓은 곳이라야 한 150m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보천보전투 기념비가 서있는 언덕쪽은 강폭이 이 보다 더 좁은 것 같았다. 물이 그리 깊지도 않고 물살도 세 보이지 않았다.

장백폭포는 '백색(白色)의 강'이 되고, '소나무 꽃(松花)의 강'으로 되었다가 북태평양으로 흘러 나간다

남파 코스로 백두산에 올라 하늘보다 더 파란 천지를 맘 놓고 보고 내려온 우리는 다시 창바이로 돌아왔다. 창바이에 도착한 어제 오후 혜산시를 한 번 더 훑어 보았고 창바이에 하루 더 묵었다.

창바이에서 2박을 한 우리는 다음날 아침에도 일찍 출발해야 했다. 백두산을 남파 북파로 두 번 올라가기로 했는데, 백두산 북파 코스의 전진기지인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로 가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창바이에서 백두산 아래 첫 마을이라는 얼다오바이허까지는 자동차로 3시간이나 걸린다. 거기서 다시 북파 코스 산문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백두산을 밝은 낮에 한 번 더 보기 위해서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창바이에서 얼다오바이허까지 가는 길은 유일하게 강 건너 북한 지역을 바라보지 않고 중국 내륙으로만 이동하는 경로였다.

▲ 창바이산 안내지도 ⓒ황재옥

천지의 물은 장백폭포(일명 비룡폭포)를 타고 흘러 내려와 쑹화장(松花江)의 상류를 이룬다. 쑹화장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만주벌판을 흘러 내려가 중·러 국경을 이루는 헤이룽장(黑龍江)과 합류한 뒤, 러시아의 니콜라예스크항(港)을 거쳐 오츠크해(海)로 흘러들어 간다. 쑹화장은 한자로는 '소나무 꽃의 강'이란 뜻이지만, 원래 '백색(白色)의 강(江)'이라는 뜻을 가진 만주어 '숭가리'를 한자로 차음(借音: 외래어 발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필자는 우리 백의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의 천지에서 나와 장백폭포를 거쳐 흘러내리는 '백색의 강'이 압록강이나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고 중국의 강인 쑹화장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백두산 천지를 중심으로 볼 때, 동북쪽에 얼다오(二道))와 바이허(白河)라는 두 마을이 있었는데, 두 마을을 하나의 행정단위로 묶으면서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라는 새로운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중국 행정구역상 진(鎭)급이었던 얼다오바이허가 중국인들의 백두산 관광 붐을 타고 최근 '창바이산보호관리구'라는 이름의 특별구가 되었다고 한다. 백두산 관광의 기점이라는 뜻이다. 얼다오바이허는 백두산 등반 코스 중 가장 붐비는 북파 코스의 전진기지이다. 최근에 서파 코스와 남파 코스가 생겼다고 하지만, 이전에는 한국 사람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백두산 관광객들이 얼다오바이허-북파 코스로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내려다보거나, 장백폭포 옆길로 걸어 올라가 천지까지 접근했었다고 한다.

북파 코스로 올라가면 장백폭포가 흘러내리는 것을 밑에서 올려다 볼 수 있게 된다. 장백폭포를 바라보고 왼쪽으로 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지점인 천문봉까지 승합차가 운행되고 있었다. 장백폭포 오른쪽으로는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 천지까지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차를 타고 가면서 미리 백두산 등반코스를 선택하였다. 차를 타고 천문봉으로 올라가서 천지를 내려다 보는 그룹과 계단을 걸어서 천지까지 가는 그룹으로 나누었다. 이전에 차로 천문봉까지 가서 천지를 본 적이 있는 분들은 대부분 힘은 좀 들더라도 걸어서 천지까지 가보자고 나섰다. 수 년 전에 북·중 국경을 답사할 때 천문봉쪽에서 천지를 내려다 본적이 있고, 어제도 천지를 내려다 본적이 있기 때문에 필자도 걸어서 천지로 가는 코스를 택했다.

▲ 북파 산문 ⓒ황재옥

우리가 탄 버스가 드디어 백두산 북파 코스가 시작되는 산문에 도착하였다. 입구부터 많은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작년에 이곳을 다녀간 한 분은 백두산 입구가 1년 만에 너무 바뀌었다고 했다. 이전의 산문에서 좀 더 산 방향으로 들어간 장소에 1년 만에 새로운 산문 건물이 들어섰다. 3층 정도의 주차빌딩까지 조성되어 있었다. 중국인이 가장 많았고, 서양인들도 있었다. 1992년 8월초 이곳을 다녀간 분은 "그 때는 한국 사람밖에 없었던 것 같고 입구도 초라했었는데, 상전벽해가 되었다"고 했다.

북파 코스도 남파코스처럼 관리소 측에서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일단 장백폭포 아래까지 간 뒤, 거기서 다시 승합차를 타든지 걸어가든지 해야 했다. 관광객들이 남파 코스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대형버스와 승합차들이 2-3분 간격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관광객들이 많아 대형버스 임에도 불구하고 서서 갈 정도였다. 산문 입구, 버스 안, 등산길 모두가 장백폭포와 천지, 백두산을 보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천지 가까이 가보지 못하고...

장백폭포가 보이는 등산로 초입에서 우리 일행은 대형버스에서 내렸다. 거기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기존의 온천장이나 숙박시설 대신 새로운 건물들을 짓고 있었다. 대형버스 종점은 한 마디로 도떼기시장 같았다. 올라가는 길은 나무 계단으로 꾸며져 있어 걷기에는 좋았지만, 관광객들이 너무 많다 보니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올라가고 내려와야 할 정도였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관광객이 이렇게도 많은 것이 신기했다. 장백산이 중국인에게 인기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천문봉 쪽으로 올라가기로 한 그룹과 헤어진 우리 그룹에게 문제가 생겼다. 계단을 걸어 천지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도착하니 중국 공안이 서있었고 통행금지를 뜻하는 '禁止進入(금지진입)' 팻말이 있는 것이었다. 걸어서 천지까지 못 올라간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 산 정상을 바라보니 장백폭포 오른쪽, 천지로 올라가는 길이 붕괴되어 돌 더미들이 흘러내린 흔적이 있었다. 2년 전 백두산에 큰 비가 내리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설명을 공안으로부터 들었다.

▲ 장백폭포 ⓒ황재옥

한 번 더 천지를 보고자 했던 필자를 포함한 '천지파' 일행은 너무 아쉬워 다른 방법이 없을까 궁리를 했다. 일행 중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분이 공안에게 사정을 해보기로 하고 공안에게 말을 붙였다. 공안과 대화를 나눈 후 일행에게 전달하기를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공안이 뒷돈을 적지 않게 요구한다"고 했다. 한 사람 당 중국 돈 500위안 씩, 총 3000위안을 주면 옆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주고 눈감아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사람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간에 뒷돈 거래가 가능한가 보다. 일행 중 한 분이 "사회주의 사람들이 돈맛을 알기 시작하면, 자본주의보다 뇌물이나 뒷돈을 더 챙기는 법이다"라고 하면서, 일단 '팍' 깎아보자고 제안했다.

그 분은 일행 중 가장 학자(學者)적인 풍모를 지닌 분인데 요구한 액수의 3분의 1로 '팍' 깎아보자고 했다. 가장 학자적인 풍모를 지닌 분의 파격적인 거래에 우리 일동은 모두 "와!"하고 한바탕 웃었다. 흥정은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3000위안을 1000위안으로 깎았으니, 중국 공안도 체면이 있지, 성사될 리가 만무했다. 한 번 더 천지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흥정이 실패한 뒤 다시 그 쪽을 올려다보니 안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적으로도 무리한 편이었고, 올라갈 때는 무너져 내린 돌 더미를 조심조심 딛고 올라간다 하더라도 내려올 때 발을 잘못 디디기라도 한다면 대형사고도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욕심이 앞서다 큰 일 날 뻔하였다.

천지까지 가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천문봉파' 일행이 내려 올 시간보다 일찍 대형버스 승차지점까지 내려와 그 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천지를 가까이서 못 볼 줄 알았더라면 천문봉 쪽으로라도 올라가서 천지를 한 번 더 보는 게 나을 뻔 했다는 후회의 목소리도 나왔다. 천지로 가는 계단 길이 2년 전에 폐쇄되었다고 하는데 그걸 사전에 확인도 안 해보고 무작정 올라가려고 했던 것을 후회했다. '천문봉파' 일행이 도착하자 우리는 다시 사람으로 가득 찬 대형버스를 타고 입구로 내려왔다.

백두산 아래 첫 마을 얼다오바이허

우리는 다시 얼다오바이허로 내려와 예약된 호텔로 갔다. 백두산 관광 붐을 타고 덩달아 도시 지위가 올라가고 발달된 곳이 얼다오바이허였다. 예전에는 한산한 도시였던 것 같은 데, 방값은 다른 지역에 비해 결코 싸지 않았다. 반면 시설은 많이 부족했다. 배정 받은 방으로 올라가니 물이 나오지 않았다. 프론트 직원은 미안한 기색없이 2-3시간 뒤 나온다고 하였다. 방에는 에어콘 시설도 없었다. 백두산 밑이니 시원해서 에어컨을 달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기록적인 폭염으로 서울에 있는 가족들이 걱정되었는데,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내 그리 덥지 않았다. 차 밖에서도 부채를 사용하지 않았으니 덥다고 할 수 없었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상대적으로 일찍 호텔에 도착했기 때문에 저녁 시간이 여유로웠다. 호텔근처 샤브샤브 식당은 깨끗하고 음식 맛도 좋았다. 얼다오바이허가 '창바이산보호관리구'라는 특별구로서 관광산업에 열을 올리고 있음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관광객을 위해 새로이 조성된 식당가, 그리고 새로 짓고 있는 많은 건물들을 보면서 앞으로 이 지역은 관광산업으로 더욱 발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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