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참석한 공식 환영식,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의 면담에 등장한 북측 권부의 면면은 일단 긍정적이다. 2000년 정상회담에 비해 수적으로 두 배가 많았을 뿐더러 '내용적으로도' 예사롭지 않다.
'제로섬 도박판' 아니라 '윈윈' 예고?
군부에서는 김일철 인민무력부장(남측의 국방장관), 김정각 인민무력부 부부장, 북측의 최고 권력기구인 국방위원회 리명수 대장 등이 눈에 띄었다. 최고 실세인 조명록 인민군 총정치국장 겸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와병 때문에 못 나온 걸 감안하면 군 최고 수뇌부들이 사실상 다 나온 것이다.
김일철 부장의 경우 노무현-김영남 면담에 참석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가 막판에 포함되어 더욱 눈길을 끌었다.
경제 분야에서는 북측 경제의 사령관인 김영일 내각 총리를 비롯해, 로두철 내각 부총리, 김용삼 철도상, 라동휘 육해운상, 최창식 보건상, 이경식 농업상 등 실무 책임자들까지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이처럼 군부와 경제 분야의 실세들이 총출동한 것은 남측이 제기할 '평화와 경제' 문제에 대해 북측도 적극 응할 용의가 있음을 시사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작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육로 방북을 꺼려했던 북측이 노 대통령의 육로 방북을 받아들인 것부터가 이미 평화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오겠다는 신호였다"고 말했다. 정창현 국민대 겸임교수도 "북측은 평화체제나 경제 특구 제안을 받아들일 의향이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북측의 태도가 정녕 그러하다면 3일 벌어질 두 '도박사들'의 승부는 '제로섬'이 아니라 '윈윈'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북측에게 통일은 명분이자 실리"
하지만 그렇게 쉽게 끝난다면 남북회담이 아니다. 정상급이건 실무자급이건 남북회담에는 언제나 걸림돌과 신경전이 있기 마련이다.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예사롭지 않은 발언은 그 신호탄이었다.
김영남 위원장은 첫날 저녁 환영만찬에서 "이제 우리 앞에는 북남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조국통일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가야 할 성스러운 과제가 남아있다"며 "이 절박한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오늘의 시대에 사는 우리 민족 성원 모두의 숭고한 사명"이라고 말했다.
덕담 수준의 만찬사를 두고 정상회담에 임하는 북한의 전략을 논한다는 건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평화와 경제에 앞서 통일을 먼저 얘기하는 것은 전략 여부를 떠나 남북관계를 대하는 북측의 기본적인 접근방법이자 논리구성 체계다.
남측은 평화와 경제를 토대로 통일로 간다고 보는 반면, 북측은 통일 문제에 진전이 있으면 평화와 경제가 따라온다고 본다.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다. 북측은 통일을 명분이자 실리로 본다. 2000년 정상회담에서도 김정일 위원장의 문제제기로 두 정상간 대화의 절반 이상이 통일에 관한 것이었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요컨대, 북측은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통일 문제를 적극 제기한다는 것이다. 남측이 제기할 평화와 경제 문제를 마냥 저버리지 않겠지만, 통일 문제를 '협의 패키지'에 포함시킬 것이라는 전망은 끊임없이 나온다.
정창현 교수는 "북측은 일관되게 '조국통일의 새 국면'을 여는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얘기할 것"이라며 "남측에서 그걸 받아줄 경우에 북도 평화와 경제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철 숭실대 교수도 "남에서 자꾸 실용적으로 접근하니까 북도 통일 문제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을 거라고 보지만,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라며 "그러면 회담이 삐걱거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 교수는 "경제는 남측의 도움을 받고, 평화도 남측이 양보하거나 미국과 타협해야 하는 측면이 있어서 자기네 주민들에게 별로 할 말이 없다"며 "그러나 통일만은 주민들에게 끝까지 명분을 지킬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적극 제기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반론도 만만찮다. 김연철 교수는 "북측은 최근 들어 통일 문제에 대해 '낮은 단계 연방제'로 나아갔고, 나아가 남측의 '화해협력 우선' 기조까지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다"며 통일 문제를 적극 제기할 가능성을 낮게 봤다.
김 교수는 대신 "북이 핵포기를 했을 때 재래식 군비 문제가 남고, 그 문제에서는 남측과 경쟁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평화 문제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며 "서해상 평화정착 문제에 대한 남북의 차이를 얼마나 줄여갈지가 이번 회담의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외교안보 분야의 고위 당국자였던 인사들은 통일 문제의 의제화 가능성에 대해 서로 약간씩 다른 전망을 내놓는다. 그러나 그런 의견 차이는 통일 문제에 평화 문제를 포함시켜 보는 시각과, 6.15공동선언 2항에 나온 통일방안의 문제로만 한정해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조선중앙텔레비전>의 기록영화 두 편
어찌됐건 북측이 통일 문제를 강력히 제기할 공산은 여전히 있어 보인다. <조선중앙텔레비전>이 2일 정상회담에 관한 상보를 전한 후 '우리민족끼리'와 '민족대단결'을 주제로 한 기록영화 두 편을 잇달아 상영한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전문가도 있었다.
그 경우 회담의 성패는 북측이 통일 문제를 어떤 내용으로 얼마나 강하게 제기할지, 또 남측이 어떻게 대응할지에 달려있다.
통일 문제의 의제화 가능성을 강조하는 전문가들도 이 점에서는 의견이 다소 갈린다.
정창현 교수는 "북측이 남북장관급회담을 뛰어 넘어 외교와 군사 문제를 포괄적으로 협의할 수 있는 기구 형태를 만들자는 제안을 할 수 있다"면서 "그에 대해 남측도 대응을 준비해 갔을 것이므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정 교수는 이어 "새로운 기구를 만들 경우 남측 여론이 수용하지 못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장관급회담을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더 많은 수의 각료들이 만나는 협의기구를 만들었다고 하면 남측 여론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가 평화와 경제 문제에 집중한 나머지, 그리고 통일 문제에 관해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은 까닭에, 북측이 강하게 나온다면 회담이 난항에 빠질 것이라는 전문가도 있다.
하지만 난항이 있다고 해서 합의문 한 장 나오지 않고 회담이 깨질 것이라는 전망은 그리 많지 않다. 통일 문제에 관한 북측의 명분(그리고 실리)을 살리는 동시에 남측의 부담감을 덜 수 있는 균형점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같은 전망이 맞다면, 북측은 통일 문제에 관한 자신들의 입장을 강하게 얘기해 남측을 곤란케 한 후, 남측이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이해한다면서 그 정도 수준에서 적절한 결론을 내리는 방식을 택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남북회담의 일반적인 패턴이기도 하다. 3일 벌어질 치열한 공방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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