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의 '평화국가 만들기' 제안에 대해 《창작과비평》 편집위원 유재건 교수가 지난주 이 지면에 비판적 논평을 게재했다. 평화군축센터의 <이제 '평화국가'를 이야기하자>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한 글에서 《창비》가 관심을 기울이는 6·15담론의 한계를 언급하면서 6·15담론이 평화국가담론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과정을 위해서는 남북한이 냉전시대의 안보담론과 안보정책을 넘어서야 하는데, 6·15담론이 주요하게 고려하는 기능주의적 접근만으로는 이 도약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째, 남북한이 공유하고 있는, 특히 북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6·15담론의 강한 민족주의적 정향(定向) 때문이었다.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과정은 동북아적·세계사적 보편성을 담지할 때 실현가능하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남한 시민사회발 평화독트린이라고 할 수 있는 '평화국가 만들기'는, 남한이 안보국가에서 평화국가로 전환함을 통해 한반도 분단체제를 허물고 동아시아 평화네트워크를 구성하며 종국에는 지구적 차원에서 평화국가의 연합을 형성하고자 하는 이론적·실천적 기획이다.
유재건 교수의 비판의 핵심은, 평화국가 만들기가 한반도 평화과정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실현가능한 의제가 아닌 근본주의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유교수는 두 수준에서 평화국가 만들기의 근본주의적 편향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남한의 평화국가화를 축으로 하는 한반도 평화과정의 설계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남한이 바뀐다고 해서 북한을 비롯해 미국과 동아시아국가들이 뒤따라 변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인데, 아마도 잘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부시행정부의 미국을 염두에 둔 생각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평화국가 만들기가 "일반 대중의 감정과 욕구를 도외시하는" 발상이라는 것이다. 매우 놀랍게도 유교수는 평화국가 만들기가 야기할 "일반 대중의 안보불안"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지속적인 화해와 교류를 통해 이루게 되는 남북 국가연합"도 그 과정에서 혹 대중의 안보불안이 발생한다면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과정은 안보불안 없이 진행되는 것일까. 아니지 않는가.
'담론적 실천'으로 평화국가 만들기가 개입하려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6·15담론이 안보담론의 포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안보담론의 전환을 이룰 수 있는 내적 장치를 가져야 한다. 안보담론은, 대량살상무기만큼 때론 대량살상무기보다 위협적이며 결국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하게끔 하고 군비를 증가하도록 하며 전쟁의 불가피성을 정당화하는 '대량설득무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유 교수에게 드리는 질문은, 한반도를 아우르고 있는 안보담론이라는 대량설득무기의 위협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다. 평화국가 만들기는 안보가 어떻게 가능할지가 아니라 평화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를 물으려 한다. 장기지속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1950년 전쟁을 겪으면서 형성된 '안보'를 절대화하는 집합적 무의식과, 안보위협을 만들어내고 그 무의식을 도처에서 끊임없이 재생하는 가시적·비가시적 메커니즘을 해체하는 방도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집합적 무의식 내지 집합적 정체성의 변화는 집합적 실천의 누적과 새로운 프레임의 제시라는 외적 충격을 통해 가능하다. 굳이 패러다임의 변화를 둘러싼 과학철학계의 논쟁을 원용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집합적 실천의 누적만으로 새로운 질서로의 이행이 가능하지 않음을 우리는 한국사회의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평화국가 만들기는 안보담론에서 평화담론으로의 패러다임 변화에 기여하는 한 계기를 만들려는 것이다.
유 교수의 지적처럼 '지금 여기에서 그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당연히 제기될 것이다. 그 조건은 그 어느 때보다 성숙되어 있다. 미국군으로부터 전시작전통제권(작통권)을 환수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예로 들어보자.
초기 작통권 환수논쟁의 구도는 자주 대 동맹이었다. 이 지점에서 6·15담론은 유효했다. 본격적으로 논쟁이 전개되면서 안보담론 생산자 네트워크의 전가의 보도인 안보위협론이 등장했다. 당연히 남북한 군사력 비교가 의제로 떠올랐다. 하지만 미국조차도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이 남한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하자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안보위협이 제기되고 이른바 자주국방에 소요되는 비용이 쟁점이 되고 있다. 이제 우리의 길은 두 갈래다. 작통권 환수를 전제로 안보국가를 강화할 것인가 아니면 평화국가의 초기 모습을 보일 것인가. 적정규모의 군사력을 계산하면서 군축을 실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한미동맹의 민주화 또한 비켜갈 수 없는 의제가 되고 있다.
작통권 환수에 소요되는 비용을 둘러싼 논쟁을 평화국가 만들기를 통해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작금의 최대 논란거리인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와 대량설득무기를 제거할 수 있는 담론과 실천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북한이 안보불안을 염려하여 제한된 자원을 비대칭적 군사력 균형에 투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남한의 평화국가 지향이 절실히 필요하다. 예를 들어 남한의 선(先)군축은 작통권 환수에 드는 비용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북한의 안보불안을 줄일 수 있는 정책적 선택이자, 군비경쟁의 조짐이 보이는 동북아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우리가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대안이다. 더불어 선군축은 한반도 민주주의의 진전과 새로운 발전모델의 형성을 위한 물적 토대를 제공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유일 패권국 미국조차도 평화지향적 국가를 안보국가 내지 전쟁국가로 만들 능력은 없다.
남한의 평화국가 지향이 최악의 경우 미국과 북한, 그리고 동아시아국가들에게 연쇄적인 상호작용을 일으키지 못할 수도 있다. 남한만이 평화국가의 지향을 보이고 주변국가들이 안보국가를 강화하는 경우로, 함께 파멸의 길을 가는 경로다. 그 최악의 길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최소한 주변국들이 평화지향적 안보국가의 형태를 띠게 하기 위해서도, 남한의 평화국가 지향은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평화국가 만들기는, 국가안보에서 공동안보와 협력안보로, 인간안보(human security)에서 지속가능한 평화로 가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안보담론을 생산하는 대량설득무기를 해체하기 위한 담론투쟁은 평화국가 만들기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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