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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석과 판석, 첨성대의 천문상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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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정자석과 판석, 첨성대의 천문상수들

[김유경의 '문화산책']<27> 첨성대 ③ 송민구와 박창범의 연구

송민구의 연구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첨성대의 초석과 지대석, 28,29단 정자석은 정4각형이며 몸통인 회전곡면은 원으로 되어 있다. 이로써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의 의미를 지니지만 그 기능도 둥근 몸통은 천체에 나타난 것을, 네모난 초석 지대석 정자석은 지상에서의 관측을 하는 것으로 구분되어 있다. 신라의 수학수준 및 장기간에 걸쳐 측정한 경험에서 그런 형태의 관측대를 생각해 낸 것이다.

▲ 위에서 본 첨성대. 맨 꼭대기 29단 정자석의 네모서리 이음매와 돌 한쪽이 떨어져 나간 모서리, 27단 원형평면 둘레의 돌, 공간 절반을 덮은 판석, 그 아래 26단과 25단의 정자석까지 들여다보인다. ⓒ 이용환, 첨성대별기

초석(혹은 지대석의 밑단 : 현재 초석부분은 땅에 묻힌 상태여서 보이지 않는다)과 지대석은 1971년 박흥수 교수의 실측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16도 편각된 것으로 발표되었는데, 이는 그 대각선 방향이 동지 일출 방향임을 입증해준다(첨성대의 위도가 35도49분49초라 계산할 때 동지 일출 방위는 29도23분24초이다. 다시 말해 자북(磁北)이 15도36분36초면 완전히 일치한다. 16도 편각이라 할 때 23분24초의 차이가 생길 뿐인데 당시의 정밀도로서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값이라고 한다).

또한 첨성대 방위의 정확성은 박흥수 교수의 견해대로 자침(磁針)을 썼으리라 한다. 초석을 구성하는 8개 돌의 의미는 민력(民曆)에 나오는 연신(年神) 방위도를 나타낸 것으로 보았다.

▲ 첨성대 축조방법의 도해 ⓒ 송민구
9.1m 높이에 있는 맨 꼭대기 28-29단의 정자석과 그 아래 27단의 판석은 '첨성대 별기' 제작 때 대형 크레인에서 내려다보고 찍은 사진에 유일하게 전체모습이 드러난다. 이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성스러운 비밀의 장소를 처음 본 것 같았다.

꼭대기 정자석은 네 모서리가 견고하게 고정되도록 28단은 S자형 꺾쇠로 고정시켰다. 웃단인 29단은 돌에 홈을 파서 가로세로 맞물려 정사각형이 일그러지지 않고 절대각을 유지하도록 했다. 28단 꺾쇠를 쓴 홈에는 유황을 끓여 부어 철물을 고정시켰다. 또한 정남에서 동쪽으로 치우쳐(편각되어) 28, 29단의 정자석이 놓인 것이 특이하다.

정자석의 편각은 1963년도 유문룡 실측에서는 12도30분으로 되어있고 1971년 박흥수의 실측에서는 12도59분56초로이다.

"tan‐¹ 41분지9=12도38분이 당초의 각이라고 한다면(1987년의 송민구의 저작에서 이 수치는 12도22분48초로 기록되었다), 이 각도가 지닌 음력 한 달과 시간의 계산 등 신비스러운 천문과의 관계는 실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송민구는 썼다.

이 정자석 두 모서리와 지대석과 초석 두 모서리를 잇는 대각선으로 동지일출선이 지나는데, 지대석과 정자석은 평행하지 않으며(실측복원도에 정자석과 지대석이 평행으로 그려진 것은 오류라고 지적됐다) 방향은 정남북이 아니다. 첨성대의 어느 것도 동서남북을 일관되게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 정자석 아래 27단의 원형공간에는 평평한 직사각형 판석이 절반을 덮게 걸쳐 놓여 있다. 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의 이 판석은 어떤 석재와도 비교가 안 되는 최상 품질의 돌을 엄청나게 공들여 깎아 한 변이 직선을 이루도록 했음을 송민구는 강조했다.

▲ 27단에 놓인 판석의 직선 변에 일치하는 북두칠성 ⓒ 송민구

"27단 판석은 편각된 방위각에 맞춰 별이 남중하는 고도를 관측하기 편하도록 되어 있다. 북두칠성이 27단 판석의 직선 변에 방향이 일치할 때, 즉 12도22분48초의 편각된 선에 일치할 때 다른 별들의 방위각은 어떻게 되는가를 알아보려고 작도한 그림이 3-66이다. 역시 별들의 방위각과 돌들의 크기가 잘 일치한다.

그러므로 27단 돌들의 크기는 북극성을 위시한 별들의 방위각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별과 별 사이의 방위각에 의한 상대적 위치를 알면 한 별을 관측하고 다음 별이 다가오는 시간을 예측할 수 있다."


동시에 편각은 순간을 정남에서 구하기 위하여 시간의 여유를 갖게 하고, 정자석에서 성도를 작성하든가 성도를 깔아놓고 별자리를 잡아올리든가 하는 작업을 용이하게 하는 의미일 것이라고 했다.

"또한 장치를 고정시키기에 알맞은 여유 등 복합된 기능을 지니고 있으며, 지대석이 정남에서 동으로 16도 편각된데 따른 자침의 이용과 함께 경이의 눈으로 바라다볼 수밖에 없다"고 그는 썼다(1981년 유복모, 강인준, 양인태의 실측에서는 지대석이 18.92도 동으로 편각된 것으로 나온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논문마다 정자석과 지대석 등의 실측 각도가 조금씩 다르게 제시된다. 부등침하 혹은 장비의 문제 등이 그 원인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내가 건축가이니 판석으로 쓴 돌이 보통돌이 아니란 걸 알아볼 수 있죠. 맨 꼭대기에서 비바람을 맞아도 더 맞았을 텐데 다듬은 면만 봐도 이 판석은 차원이 다른 돌입니다. 이 돌의 한 변이 나타내는 직선과 12도22분48초의 각은 뭔가를 얘기하는 것으로 1350년 지난 지금도 자로 그은 듯한 직선입니다. 석가탑 다보탑보다 더한 정확성을 구사해 거기 위치시킨 정자석과 판석은 아무 의미 없이 놓인 것이 아닙니다."

송민구는 2009년 작고 직전의 '첨성대별기'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었다(지금 복원된 첨성대는 이 판석이 좌우가 바뀐 채 건축되었다고 한다).

25, 26단의 정자석 또한 형태나 구조나 돌의 두께를 보아 구조재가 아니라 방위각을 측정할 때 척도로써 이용하려고 한 것이다.

▲ 2012년의 첨성대 동남향. 맨 위의 정자석 모서리로 동지일출선이 지나가고 회전곡면을 이룬 몸통부 아래쪽 6단의 돌은 각 단마다 동지 이후 춘분에 이르는 6개 절기 기간의 날수와 같다. ⓒ 이순희

첨성대 몸통의 회전곡면을 이루는 364개 돌들은 크기가 지극히 불규칙하여 어떤 상징성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천문과의 관계에서만 그 규칙성이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돌의 크기 하나하나가 별의 방위각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첨성대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또 더할 나위 없는 구조물이 된다. 이미 알려진 별들의 상대적 위치가 회전곡면에 360개의 돌의 크기로서 그 방위각이 나타나 있어 그것을 관측하는 중에 다른 천체현상을 알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가능성은 충분하다. 석조로 구축된 일종의 성도(星圖)가 우리나라 신라에서 647년에 만들어진 것이 된다"고 송민구는 말했다.

첨성대는 천문관측의 기준이 되는 점의 집합체이며, 이것으로 평년, 윤년, 시보, 24절기, 28수 별자리 관측, 12직, 일월년백, 神방위 등 모든 것을 정할 수 있다. 위치로 보아 종교의식의 장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본다. 별자리의 변화를 보고 길흉을 점치는 것도 중요한 업무의 하나였다.

첨성대는 현대인이 쓰고 있는 민력의 모든 것을 유도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첨성대는 소규모의 관측으로 한정되어 있고 어떤 관측기구를 썼는지도 알 수 없다. 첨성대 관련기록이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여러 정황을 추측케 한다.

첨성대 축조는 1년이면 완공되는 소규모 크기지만, 645년이 년백오황입중(年白五黃入中)의 해이며 평년이므로 이 해를 기준으로 회전곡면 모선에 24절기의 시점을 정하여 둔다. 다음 해인 646년은 윤년이므로 24절기의 시점을 기준으로 할 때 일자의 변동이 생긴다. 현대와 같이 정확한 시간측정이 어려웠으므로 24절기의 시간까지 정확하게 구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647년에 첨성대가 축조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변화가 파악된 연후에 완공이 되고 정식으로 쓰게 되었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첨성대 건축은 어느 때라도 실증할 수 있는 명쾌한 논리와 구조를 담고 천문관측을 위한 구조물로 지극히 정교하게 짜여진 형태"라는 것이다.

숭실대 건축과 이상진 교수는 "7세기의 천재 건축가가 첨성대를 지었다면, 오늘의 천재인 송민구는 그것을 분석해냈다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첨성대를 건축기호학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 연구가 나오게 된 것이죠"라고 했다.

그는 수학과 미술에 정통했고 외국어자료를 읽기 위해 영어와 불어를 독학했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어려운 고등수학 문제를 푸는 게 휴식을 취하는 것이기도 했다.

2009년에는 천문학자 박창범(고등과학원)의 발표가 있었다. 첨성대가 가리키는 방위, 건축에 보이는 천문의 숫자들, 그 역할 등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첨성대 방위가 정남북에 정렬되지 않아 천문대가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가 됐지만 이는 그 방위가 가지고 있는 천문학적 의미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갖게 된 오해이다. 정자석 모서리를 동지 일출 방향에 의도적으로 맞추었다면, 첨성대는 천변관측과 함께 일 년의 시작을 알아내는 목적으로도 사용되었음을 뜻한다. 정자부에 올라가 있는 관측자에게 정자석은 가장 유용한 방위 지표가 될 것이다. 그동안의 연구에서 이 정자석이 동남동 30도 가까운 동지일출 방향임을 유일하게 주목한 것은 송민구이다."

"관측대의 구조가 동지를 알아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은 첨성대 몸통부 하부 6단이 동지에서 춘분까지 각 절기의 날 수와 맞는다는 사실과도 연결이 된다. 몸통부의 아래쪽 여섯 층을 이루고 있는 돌 수는 각각 16, 15, 15, 16, 16, 15개이다. 이는 동지-소한, 소한-대한, 대한-입춘, 입춘-우수, 우수-경칩, 경칩-춘분 사이의 날수와 맞다."

"몸통부는 27층으로 구성돼 달의 주기(27.3일)에 맞추었다. 몸통을 쌓은 돌은 1년의 날수를, 또 몸통부 중간에 있는 창은 위아래를 각각 12층으로 하여 12달과 24절기를 상징하였고, 기단석에도 12개 석재를 사용하였다"


첨성대 역할에 대한 박창범의 의견 또한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에 전해오는 신라의, 그리고 백제와 고구려의 천문기록은 모두 육안으로 관측한 기록으로 보인다. 다만 팔방위나 일 년의 시작 정도를 알 수 있을 정도의 측정이 수행되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은 발견된다. 또 천제를 지내거나 불교적 상징물, 왕권을 위한 점복의 기능이 있었다 해도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은 첨성대가 천문대일 때에 이러한 모든 복합적 용도와 자연스럽게 관련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했다.

▲ "나카무라 하루히사의 연구", 첨성대 기점 동심원상에 놓인 신라왕릉 표시와 그의 저서 <일한 고대도시 계획> ⓒ 나카무라

한편 앞서 일본에서도 첨성대를 연구한 사람이 있었다.

나카무라 하루히사(中村春壽)는 대학생 때인 1938년 경주박물관에서 일하면서 '첨성대엔 뭐가 있다'고 믿게 됐다. 전쟁에 징집되자 그는 '첨성대를 놔두고 죽으러 가누나' 했다가 돌아온 뒤 1978년 <일한 고대도시 계획>이란 책에서 '첨성대를 중심으로 경주의 30여 개 왕릉은 일정한 거리를 둔 동심원상에 있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그가 기본자료로 채택한 25만 분지 1 경주지도에 나타난 점 크기의 왕릉 위치를 두고 단언하기엔 무리가 따르지만 '왕릉에 대한 일정한 거리의 법칙성을 제시했다'는 평이 따른다.

명활산성, 선도산성, 남산성과 첨성대는 일정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것, 식점천지반의 존재를 첨성대와 연관시킨 것도 그였다. 나카무라는 첨성대 연구에서 '박일범 초대 경주박물관장의 큰 도움을 얻었다'고 밝히고 이 책을 헌정했다. 2009년 첨성대 별기 인터뷰에서 그의 아들은 "아버지는 살아생전 밤새도록 경주 지도 위에 컴퍼스를 돌리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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