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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안철수에게 이용당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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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문재인, 안철수에게 이용당해야 산다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다시 안철수를 생각한다

선거의 해 2012년을 앞두고 나는 선거에 관한 글을 가급적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기는 하지만 선거 때는 정치 이야기 제대로 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정치에 가진 관심은 정치철학의 측면인데 선거 때는 정치공학 측면에만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니까.

그런데 안철수의 후보 사퇴를 보면서는 생각을 한 차례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금년 대선에서는 보통 선거 때와 달리 정치철학적 이슈들이 많이 부각되었다. 누구보다 안철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빚어진 예상 밖의 상황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그 자신 정치의 근본적 의미에 관한 주장들을 열심히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의 사퇴가 던지는 충격의 의미를 가치관의 각도에서 해석해 본다. 그의 마음속을 내 멋대로 상상해 보는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지만, 주관적 해석을 필요로 하는 주제라고 본다. 읽는 이들이 각자 자기 식의 주관적 해석을 시도할 계기를 만들어드리고 싶다.

그런 주관적 해석을 작년 12월에 내놓은 일이 있다. 이렇게 마무리했던 글이다.

안철수 얘기를 입에 올린 이상 그가 대통령이 될지 안 될지에 대한 의견도 밝히는 것이 독자들에 대한 도리일 것 같다. 다들 궁금해 하는 일이니까. 미안하지만 나는 모른다. 다만 그가 대통령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 마음만 밝힌다.

안철수는 서울시장 선거에서 '불용지용(不用之用, 실제로 쓰이지 않으면서 쓰임새의 가치를 지킴)'의 의미를 보여줬다. 박원순이 더 잘할 사람이라며 양보했는데, 실제로 박원순의 경험과 인맥이 서울시장직 수행에 더 적합하게 맞춰져 있는 편이었다. 안철수가 맡는다 해서 박원순보다 꼭 못하라는 법은 없지만 그는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의 역할은 특정한 영역에 제한되지 않음)'의 경지를 택한 것이다.

대통령에도 더 잘할 사람이라고 안철수가 양보할 만한 상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품성과 능력이 대통령직에 적합하면서도 기존 역학관계 때문에 그 직에 접근하기 힘든 인물이 안철수의 도움으로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었으면. 그러면 안철수도 편안한 생활을 계속 누리면서 동시에 이 사회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직책 없이도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안철수를 생각한다> (전홍기혜, 강양구 엮음, 알렙 펴냄) 217-218쪽)

'제 눈에 안경'이란 말이 있거니와, 이런 주관적 해석은 나 자신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여론조사에서 50퍼센트 지지를 받는 사람이 5퍼센트 지지를 받는 사람에게 후보 자리를 양보하는, 우리 사회에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해석이 아니면 안 된다. 저런 선택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을 그의 입장에 대치하는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철수의 양보를 더 큰 것을 노리는 전략적 행위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가 거금을 출연해 재단을 만든다고 하자 그런 시각이 더 늘어났다. 그것도 '제 눈에 안경'이겠지만 나는 그것이 불만스러웠다. 이 사회에 모처럼 의미가 큰 행동이 나타났는데 그 의미를 너무 작게 보는 것이 아까웠다. 그래서 위의 글을 써낸 것이다.

박원순에게의 양보와 재단 출연에 자신을 유력 대선 후보로 부각시키려는 뜻이 있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뜻과는 다른 것이다. 그의 정치적 부상은 대통령 당선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가진 현상이다. 한 마디로, '정치'의 개념이 달라지는 일이다. 당장 현실적으로는 '박근혜 대세론'을 깨뜨리는 일이었다.

지난 봄 총선에서 안철수는 거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대선에 뜻이 있었다면 할 일이 많은 기회였다.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하고 뒤이어 야권이 큰 파탄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이번 대선에 그가 직접 움직일 뜻이 없었으리라고 나는 본다. 작년 가을 그의 등장만으로도 박근혜 대세론이 무너지고 한나라당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민주당을 위시한 야권이 그 과일을 무난히 따먹고 정권교체 전망을 굳혀 놓았다면 그는 정치에 뜻이 있더라도 천천히, 완만한 길을 찾았을 것이다.

두 달 전 대선 출마 선언 때 그의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느 시점에서든 물러서고 싶은 생각이었으리라고 짐작한다. 단일화를 원하는 국민의 여망을 등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 무렵에 장담한 일이 있다. 그런 말을 일방적으로 당당히 한 것은 이번에 결행한 것과 같은 최후수단을 마음속에 갖고 있었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사퇴나 양보를 절대로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출마한다고 선언한 이상 그 선언에 대한 책임도 회피하지 않는 성실성을 가진 사람이니까. 문재인 후보가 선거에 확실히 이기고 대통령 노릇 잘할 태세를 갖춘다면 박원순에게 양보한 것처럼 그에게 양보할 수 있지만,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자기가 뒤집어쓸 각오까지 했을 것이다.

안철수의 이러한 소망에 문재인이 매우 잘 부응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권력욕 없는 리더십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다. 단일화 과제 앞에서도 민주당의 고질병인 정략적 행태를 그만큼 억누른 것이 놀라울 정도다.

안철수도 문재인의 능력과 태도에 기대 이상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물러날 마음을 굳혔을 것이다. 단일화 과정의 기싸움이니 신경전이니 논란이 일 때도 나는 그것이 '승리'를 위한 다툼이 아니라 '성공'을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했다. 대선의 승리를 넘어 문재인 대통령의 성공적 직무 수행을 위한 기반을 다지는 노력.

문재인 후보가 저만큼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상 승리는 힘든 일이 아니다. (내 생각이고, 안철수의 생각도 같다고 짐작하는 것이다.) 안철수 지지층이 얼마나 문재인에게로 넘어갈지 걱정들 하는데, 안철수의 호소 능력과 문재인의 화답 능력으로 95퍼센트 이상 인도가 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승리 이후의 일이다.
ⓒ연합뉴스

민주당의 변화 필요에 대한 안철수의 인식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민주당을 좋은 정당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분들이 큰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해방공간의 한민당에서 시작된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전통이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남아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뜻을 펴기 힘들던 가장 큰 장애물도,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의 패배를 불러온 것도 이 더러운 전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얼마 전 문 후보 캠프의 한 친구가 메일 보내는 길에 상황에 대한 내 의견을 물어 왔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내는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문 후보가 훌륭한 점이 많고 그 동안 잘해 왔지만, 정권교체를 떼놓은 당상으로 만들고 그 자체보다 더 큰 의미의 변화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든 공로는 문 후보보다 안 후보에게 있다는 게 분명한 사실이야. 문 후보가 결국 청와대로 가게 된다 하더라도 안 후보를 이용하는 자세보다 거꾸로 안 후보에게 이용당한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지금 단계 한국 사회의 요구에 더 잘 부응하는 길이라고 나는 생각해.

안철수 역시 "더 큰 의미의 변화"를 바라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말해 온 '정치개혁'이 민주당의 변화만을 뜻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민주당의 변화를 정치개혁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으로 여겼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재인 같은 지도자를 만난 것이 민주당에게 정말 생산적인 정당으로 거듭날 좋은 기회고, 민주당이 제대로 바뀌면 새누리당도 변화를 피할 수 없다. 한국 정치계에서 모처럼 정당 노릇 제대로 하기 위한 건설적 경쟁이 일어날 기회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문재인 측에 대한 안철수의 압박은 민주당의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적대세력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우호세력의 정비를 위해 촉매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단일화 방법을 둘러싼 옥신각신도 안철수 입장에서는 승리를 위한 치사한 샅바싸움이 아니라 압박을 가하는 입장에 오래 머물기 위한 방편이라고 나는 내내 생각하고 있었다.

이 생산적 긴장관계가 오래 계속되기를 나는 바랐다. 그래서 후보 등록까지 둘 다 하기를 바랐다. 어떤 방법으로 경쟁을 하든 상당한 오차범위를 넘지 못하면 단일화를 후보 등록 뒤로 미루기로 하고, 그 오차범위에 걸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후보 등록 직후에 한 차례 글을 써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유감스럽게도, 안 후보가 벌써 사퇴하고 말았다.

아무리 생산적인 긴장관계라도 긴장관계에는 부담이 따르기 마련이다. 압박을 받는 문재인 캠프의 스트레스가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고 안철수 지지자들의 기대감이 너무 커지는 것도 부담이 될 수 있다. 현실 상황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안철수가 어떤 판단에서 후보 등록 전에 전환점을 만들 결정을 내렸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내가 소설을 쓴 건가? 그렇다. 논설보다는 소설에 가깝다. 논설이라면 독자가 내용을 사실로 믿어주기 바랄 텐데, 이 글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독자들도 해보시라고 권할 뿐이다. 안철수의 '진심'에 대한 믿음을 지켜 온 한 사람으로서, 전개되고 있는 뜻밖의 상황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그런다면 좋은 변화에 대한 희망을 갖고 각자의 역할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안철수와 문재인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한국의 정치발전에 대한 국민의 희망을 예상하지 못했던 수준까지 끌어올려주었다. 안철수의 사퇴는 이 발전과정이 양상을 바꾸는 하나의 전환점이다. 두 사람이 다음 단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계속 맡아주겠지만,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보다 능동적 역할을 맡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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