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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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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293>

이순신과 명량해전

임진왜란을 통해 가장 불가사의한 승리로서 명량해전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조일(朝日)간의 군세는 조선의 군선 13 척에 일본 측이 330 척이었으니 양군의 세력 차이는 너무나도 압도적이었건만 조선이 승리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 하면 대개 지장(智將) 또는 덕장(德將)을 떠올리게 되지만 명량 해전의 승리과정을 보면 우리 역사 전체를 통털어 최고의 용장(勇將)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이순신 장군과 명량해전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13 대 330, 제 아무리 지략이 뛰어나고 군사들이 함께 죽기로 각오한다 해도 사실 싸워볼 엄두조차 나질 않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 이전에 이 순신 장군의 마음 속은 또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했었을까.
  
  전쟁을 모르는 조정의 문신들에 의해 나가 싸우길 꺼린다는 모함을 받고 지휘권을 빼앗기고, 그 결과 애써 키워낸 정예 장졸들과 백 여척의 함선을 바다에 수장시켰으니 말이다.
  
  또 개인적으로도 남이신(南以信)이란 나이 어린 서인(西人)측 문신의 결정적 모함으로 사형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겨우 백의종군을 명 받은 이 순신 장군이었다.
  
  (남이신이란 문신은 그 이후에도 출세를 거듭하여 대사간의 직책에 까지 오른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양반의 후손된 자라면 지금이라도 현충사를 찾아가서 향을 피우고 장군과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 앞에서 사죄를 청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아직 신에게는 12 척의 배가 남아있다고 하면서 수군폐지론을 잠재우고 분연히 싸울 준비를 했다.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적과 싸울 장소와 시기를 물색한 결과 오늘날 진도대교가 있는 울돌목을 선택했다.
  
  수백의 적 군선과 싸워서 이기겠다는 마음보다는 울돌목을 자신의 장렬한 전사 장소로 택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쯤에서 이 불가사의한 명장의 사주를 보기로 하자.
  
  1545 년 음력 3월 8일에 태어났으니 양력으로 환산하면 4월 28일이다. 기록에는 아침 새벽에 태어났다고 되어있으니 인시(寅時)로 추정된다. 따라서 사주는 다음과 같다.
  
  연 을사(乙巳)
  월 경진(庚辰)
  일 신미(辛未)
  시 경인(庚寅)
  
  양력 4월 28일은 곡우가 지난 때이니 진토(辰土)속에 있는 계수(癸水)를 용신(用神)으로 한다. 즉 물을 만나야 발전하는 법이다.
  
  일간(日干)이 신금(辛金)인 데 월과 시에 경금(庚金)을 둘렀으니 강직하고 지도력이 뛰어난 사람이며 진(辰)월에 났으니 인자한 성격이다. 따라서 타고난 무장(武將)의 기질이다. 이에 물이 용신이니 그가 해군을 지휘하게 된 것은 조선으로서는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년 신묘(辛卯)년 신묘(辛卯)월에 전라좌수사로 임명되니 그의 나이 47 세였다.
  
  신금(辛金)의 기운을 지닌 사람이 신묘년 신묘월에 자리를 잡았고, 나이마저 47 세이니 인생에서 가장 역량있는 시점이었다. 그러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은 당연지사. 게다가 대운이 을해(乙亥)라서 더욱 승승장구할 터.
  
  하늘이 가당치도 않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심에 결정적 쐐기를 박아놓은 것이었다. 이런 것을 안배라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사주를 보면 재미난 점이 있으니 자신 스스로가 뛰어난 공학(工學)적 기질에 차량이나 선박에 대한 대단한 호기심이 있다는 점이다. 그가 거북선 개발을 적극 추진한 것도 그런 성격의 일단이라 하겠다.
  
  임진년 전쟁이 터졌고, 조선의 군대는 지리멸렬 패퇴를 거듭했지만 세심한 준비를 통해 전력을 키운 이순신 장군으로 해서 일본의 전쟁수행은 커다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남해를 돌아 서해를 북상, 길게 늘어진 내륙 병참선을 지원하려던 일본의 전략은 섬으로 둘러싸인 남해 물길의 곳곳에서 수차에 걸쳐 고배를 마시다가 마침내 한산도 앞 바다에서 결정타를 입은 것이었다. 전쟁은 서로 지켜보는 대치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결국 불리함을 인식한 일본은 이듬해 1593년 계사년에 철병을 시작했다가 명분을 얻지 못한 히데요시는 1597년 정유(丁酉)년에 15만 군세로서 재침해왔다.
  
  마침 이순신 장군이 자리에서 쫓겨나자 조선 수군은 전멸하게 되었고, 육지에서도 경상남도 함양 부근의 황석산성과 남원에서 패함으로써 전라도의 전주까지 일본군이 진출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이어서 한양을 향해 북진하던 중 명나라의 명장 양호(楊鎬)의 눈부신 활약으로 직산(오늘날의 천안 부근)전투에서 기세가 꺾였고 이에 조선 조정은 간신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역사를 잘 모르는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원병들은 행패만 부리고 전쟁은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이며 양호를 비롯하여 용감히 싸워준 장수들도 많았다.
  
  육군이 직산 부근에서 진로가 막히자 일본군은 또 다시 뱃길로 전라도를 돌아 병력을 서해로 북상하여 양쪽에서 수도 한양을 협공하자는 작전으로 나왔다. 이순신이 살아있었지만 조선 수군이 궤멸한 마당에 무서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울돌목 해전 또는 명량해전은 이런 상황 하에서 벌어진 전투였던 것이다.
  
  만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의 수군을 막지 못한다면 전쟁 양상은 단연코 일본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는 절대절호의 기회를 일본은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살이 워낙 거칠게 우는 소리를 내면서 돌아나간다고 해서 울돌목이라 했던 명량(鳴梁)의 좁은 뱃길로 일본 수군은 거침없이 밀려들었다.
  
  싸우기 전날 이 순신 장군은 이 자리가 자신과 장병들이 죽을 자리임을 알았지만 승리에 대한 기대 역시 저버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훈시로서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바로 결사의 각오였다.
  
  330 대 13의 대결이었으니 여기에서는 제 아무리 지략이 뛰어나도 그보다는 그저 분연히 죽겠다는 각오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명량 해전이 있었던 날은 양력으로 환산하면 1597년 10월 25일이었다.
  
  330 척중 일부인 130 여척의 일본 선봉대가 조수의 급한 물결을 타고 울돌목의 좁은 수로를 지나쳐나오자 조선 해군은 그 위세에 눌려 물러났고, 이순신 장군의 기함만 일직선으로 적진을 향해 쳐들어가면서 총통을 연달아 발사했다. 1 대 130 의 대결 양상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작전이란 결사의 정신으로 적의 기를 꺾으면서 물살이 바뀌는 두어 시간만 벌 수 있다면 그 다음에는 오히려 기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뒤쳐진 아군 함대를 불러들이는 초요기를 높이 매다니 다시 두 척의 조선 함선이 따라왔다. 이제 3 대 130 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적 선봉장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리자 일본 수군은 그 기세에 주춤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머지 열 척의 함선도 전투에 참여했다.
  
  선체 구조가 견고한 조선 수군의 배는 배와 배끼리 박치기하는 육박전에서 유리했고 총통과 화살이라는 화력에서 우세했던 조선 수군이 이순신 장군의 엄청난 감투정신에 최면이 걸려 치열하게 싸웠고 일본 해군은 그만 넋을 놓고 질리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 물살이 서에서 동으로 바뀌자 좁은 해역에 너무 많은 배들이 들어선 상태에서 전진도 힘들고 뱃머리를 돌려 후퇴도 어렵게 된 일본 해군은 우왕좌왕하면서 혼란을 거듭했다.
  
  이에 기세가 오른 조선수군의 진종일 치열한 공격을 받아 일본 함대는 133 척 중 31 척이 침몰하고 수천의 병력을 잃고 간신히 후퇴할 수 있었다.
  
  돌아가서 이 날의 음양오행을 살펴보자.
  
  연 정유(丁酉)
  월 경술(庚戌)
  일 갑진(甲辰)
  
  신금(辛金) 일간인 이 순신 장군에게 있어 경술(庚戌)월은 기세가 더 없이 강한 달이었다. 동시에 자칫하면 기세가 지나쳐서 목숨을 잃는 운세이기도 하다.
  
  이 날 장군은 사실상 죽음을 달게 받아들일 마음이었는데, 다행히도 갑진(甲辰)일의 진토(辰土)가 월의 술토(戌土)를 눌러 사중생유(死中生有)의 천기(天機)를 얻었던 것이라 하겠다.
  
  이로서 이순신 장군은 역사(歷史)를 초월하여 신화(神話)의 문턱을 넘어섰으니 민족의 영원한 수호신(守護神)이 되었다. 장군은 이 시각에도 우리와 호흡을 함께 하니 이름 하여 성웅(聖雄) 이순신이며 그 자손만대에 영화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전화:02-534-7250, E-mail :1tgkim@hanmail.net)
  김태규의 명리학 카페 : cafe.daum.net/8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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