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형, 나 먼저 갑니다. 나중에 봅시다."
"........."
1986년 5월 지금은 독립공원이 된 서울구치소. 아침부터 소내 공기가 싸늘한 게 영 꺼림칙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사형집행 때문에 출역도 운동도 없다고 한다. 잠시 후 옆방에서 철커덕 하고 문 따는 소리가 나더니 평소 같은 사형수로서 함께 목욕을 하며 지냈던 동료가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 당시에 나는 첫 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고 수갑을 찬 채 사동의 사형수들과 어울려 살고 있었다. 자기가 먼저 하늘나라에 가 있을 테니 천천히 오라는 말인가?
마지막 가는 이에게 뭐라고 위로의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저 인사를 하는 그 친구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 짧은 시간이 마치 낯선 나라의 시골 영화관에서 낡은 흑백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날 목욕탕에서 형집행을 면한 사형수들을 만났다. 교도관의 발걸음이 자기 방 앞에서 멈출까봐 조마조마 했다는 얘기부터 밧줄이 삐딱하게 걸려 두 번이나 고쳐 매달았다는 얘기까지 모두들 공포에 질려 전날의 느낌을 얘기했다. 한 친구는 밧줄이 잘못 걸린 상황을 리얼하게 연기하면서 얼마나 아팠을까 하고 혀를 차기도 했다. 몇 달 후 무기형으로 확정되기는 했지만 이때의 충격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나와 함께 공범이라는 이름으로 구속된 두 친구는 상고심에서도 사형을 언도받았다. 우리는 독재자의 정치적 야욕에 의해 조작된 공안사범이었기에 1심 확정선고가 있던 날 기껏해야 몇 년 정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내가 사건의 성격상 세 번째 자리에 섰는데 앞의 두 사람 모두 4년을 언도받았다. 그래서 나는 한 2~3년 정도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판사의 입에서 "무기징역!"이란 말이 떨어졌다. 무기징역이라니? 그렇담 앞의 4년은 '사형'이었단 말인가? 너무 긴장한 데다 아무리 생각해도 죄인으로 불릴 만한 행위를 한 게 없다보니 그런 엄청난 단어는 아예 머리 속에 입력되어 있지 않았던 탓에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은 사회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툭하면 사형을 집행했다. 나의 두 동료의 어머니들은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알리기보다 당장에 사형을 면하게 해달라고 천지사방으로 뛰어다니며 호소를 했다. 그 노력의 대가였을까 아니면 88년 6월 민주항쟁의 여파였을까 두 동료는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 무려 3년이 넘는 사형수 생활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이다.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시간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만약에 사회의 민주화가 더뎌지고 더 지독한 독재자가 정권을 이어갔다면 그들은 아마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그것은 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또 다른 '살인행위'일 것이다. 멀쩡한 사람에게 정치적 이유로 최고형을 들씌운 뒤 '법대로'를 외치면 과연 누가 범죄자일까? 이번에 인혁당 사건의 가족들이 34년 만에 거액의 피해보상금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은 비록 늦었지만 잘못된 법치주의의 과오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다행스럽다. 그러나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 해도 가족을 잃은 슬픔과 고통의 세월이 보상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형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비극을 연장시킬 뿐이다."
살인 피해자 가족들의 이야기를 엮어 책으로 만든 레이첼 킹이 한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은 살인자를 죽인다고 해서 피해자가 구원을 받는 것도, 또한 그 범죄의 비극이 사라지는 것도 아님을 피해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 증언하고 있다. 한마디로 사형은 보복일 뿐이지 결코 구원이나 보상의 수단이 될 수가 없다. 보복을 제도화해서는 결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우리가 진정 선한 사회를 원한다면 제도와 법률 역시 선함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만들어야 한다. 국민소득의 크기로 선진국 소리를 들으려 하지 말고 반인륜적인 제도를 없앰으로써 선진국 소리를 듣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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