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권병현 전 주중대사입니다. 권병현 전 대사는 1938년 경남 하동 출생으로 63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습니다. 65년 외무부에 입부해 아주국 국장, 미얀마, 호주, 중국대사를 지냈습니다. 외무부본부대사 시절인 1992년 한중수교실무교섭대표단장으로 협상을 진두지휘했습니다. 이루 2000년에는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중문화청소년협회 미래숲 대표와 동북아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박인규 : 벌써 15년이 지났습니다. 예전에 중공... 그래서 중국은 갈 수 없는 나라였는데 수교한 지 15년이 됐구요. 그 당시 한중수교의 물꼬를 튼 당사자로서 만감이 교차하시겠습니다.
권병현 : 네. 모자를 눌러쓰고 홍콩을 거쳐서 혼자 조용히 들어가서 수교교섭을 한 게 엊그제 같은데 그동안의 한중관계는 엄청난 변화가 생기고 있네요.
박인규 : 15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한중수교 실무교섭의 뒷얘기들이 다는 밝혀지지 않은 것 같아요. 최근에 권대사께서 일간지에 연재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는 거죠?
권병현 : 사실 그게 당시에 비밀외교교섭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비밀 속에서 이뤄졌고 대부분 다 비밀사항으로서 지금 다 비밀문서 속에 들어가 있을 겁니다. 저도 그동안 여기저기서 수시로 인터뷰라든지 그 당시를 이제는 공개할 때가 됐지 않느냐는 얘기를 해왔습니다만 아직까지 시기가 성숙되지 않았다 해서 미뤄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외교부에서 공문으로 이제 한중수교 비사를 국민에게 알려주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심사숙고하다가 쓰기 시작했습니다.
박인규 : 제 짐작으로는 한중수교가 되기 전에 남한은 대만과 국교가 있었고 북한은 중국과 국교가 있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파트너가 바뀌어 버린, 대만이나 북한의 반발, 그런 것이 아직도 있기 때문에 밝히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 않나 싶은데요..
권병현 : 그렇죠. 지금 특히 대만관계하고 중국과 북한관계도 만만치 않게 변했거든요. 그런 것 때문에 중국의 쉬둔신 부부장을 얼마 전에 가서 만났더니 15년간에 천지개벽이 됐다. 한반도와 중국과의 관계는 천지개벽이 됐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그렇게 개벽될 정도로 많은 변화가 있었으면 충격도 크지 않겠습니까. 특히 대만에 대한 충격도 컸을 거고, 북한도 충격을 많이 받았지 않겠습니까. 그 대산에 한중관계는 그보다도 어마어마하게 큰 하나의 좋은 충격이라고 할까요...
박인규 : 사실 동아시아 평화나 안보를 위해서는 대만이나 북한을 궁지에 몰아넣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이 들긴 하는데요...
권병현 : 그럼요. 원래 우리도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수교할 때 우리도 분명히 밝혔던 것이, 우리는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를 절대 손상시킬 생각은 없다. 다만 북한과 중국과의 너무 지나친 일변도적인 생각은 우리가 한중관계를 개선, 정상화하는 마당에서는 이제는 정상적으로 돌아와야 되지 않냐는 얘기는 했죠.
박인규 : 한국과 수교한다고 해서 북한을 버리라는 게 아니라 균형있는 외교를 했으면 좋겠다.
권병현 : 그렇죠. 오히려 북한이 당시 미국이나 일본과 수교하는 것도 우리가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던 겁니다.
박인규 : 92년 당시로 돌아가서 그 당시 중공이었죠. 한국과 중공과 수교하기 위한 협상을 하면서 여러 가지 걸림돌이 있었을 것 같은데 가장 어려웠던 건 뭐였습니까?
권병현 : 아무래도 대만 문제였지 않겠습니까? 우리와 그때 대만과의 관계는, 지금은 대만과의 관계라고 하지만 그때는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로서 자유중국이었고, 또 우리가 나라를 잃고 있을 때 바로 임시정부가 가 있던 것도 바로 그 정부였고, 또 1945년 카이로 포츠담선언을 하면서 장개석 총통의 역할이라든지, 우리 건국, 또 유엔에서의 역할 이런 걸 봐서 우리와 대만정부하고의 관계라는 건 그렇게 끈끈한 관계. 참 여러 가지 많이 쌓인 사연이 있었는데, 그런 관계 때문에 당시 대만 정부가 갖고 있는 외교 관계를 갖고 있는 20여 개 나라 중에서는 우리가 제일 중요한 나라였어요. 가장 믿음직한 나라였고, 그 관계가 끊어져 나갈 때 우리로서도 참 마음 쓰라린 데가 있었고 아마 대만에는 충격이 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중국으로서는,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려면 대만과는 단교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 확고했겠죠?
권병현 : 그렇겠죠. 세계 모든 나라와 중국이 수교할 때는 소위 원차이나... 하나의 중국 정책은 확고부동한 원칙이다. 거기선 더 양보할 수 없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물론 우리는 처음 시작할 때 우리와 대만하고의 관계는 다른 나라와 다르다. 특수한 관계기 때문에 우린 다른 나라와 같이 할 수 없다고 한 번 버텼죠. 많이 버텨 봤지만 중국과 수교를 하는 이상은 여기에 대해서 예외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러면 대만과 우리와의 관계는 특별한 관계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원차이나 정책하에서는 우리가 대만과의 최상의 관계를 가져가겠다 하는 걸 교섭하는 과정에서 이끌어냈죠.
박인규 : 국교는 끊겠지만 관계에서는 최상을 유지하겠다.
권병현 : 모든 관계에서 우린 다른 나라하고 다르다.
박인규 : 그 당시 한중수교가 발표될 때 오히려 북한은 평온했고 대만이 격렬히 반발했는데,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권병현 : 아마 그런 게 있었죠. 우리로서도 배려를 한다고는 했습니다. 가장 먼저, 일주일 전에 통보를 해서 대만으로 하여금 한중수교 사실이 전 세계에 퍼져나가도록 한다든지 여러 가지 배려를 했지만 대만으로서는 그 당시 우리가 그렇게 빨리 수교하리라고는 아마 예상을 못했던 거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국내정치문제도 있었고 또 대만의 선거도 앞두고 있어서 반발이 우리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큰 반발이 있었습니다.
박인규 : 그 당시 대만과 관련해서 공개되지 않은 양해각서가 있다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게 아까 말씀하신 그런 겁니까? 국교는 끊지만 최상의 관계를 유지하겠다
권병현 : 이제는 얘기할 수 있겠죠. 15주년이 됐으니까 국민한테 알릴 건 알려야 되고, 그건 사실입니다.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하는 공동성명서가 있었고, 그건 1992년 8월 24일에 조어대에서 우리 이상욱 장관하고 중국 외교부장이 서명을 하고 공표했죠. 그러나 그 전날 8월 23일 오후에 수교를 위한 양국외상회담을 갖거든요. 거기에서 이 양해각서가 서명된 것도 사실이죠. 이건 아마 저로서는 처음으로 공개하는 얘깁니다만
박인규 : 그 양해각서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한다면 어떤 내용인가요..
권병현 : 제가 어디까지 얘기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결국은 대만 문제가 가장 민감했기 때문에 대만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그 양해각서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대만정부의 대사관이 명동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럼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가 어떤 정부냐 하는 문제거든요. 대만 정부는 원차이나, 하나의 중국 속에 자기가 정통적인 정부라고 주장하고 있었고 또 본토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은 PRC가 정통정부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소위 제로섬 게임이었거든요. 그러면 이 명동에 있는 중국대사관 땅이 누구한테 속하느냐 하는 것은 중국의 주인한테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손을 바꾸는 도리밖에 없다는 말이죠. 이게 국제법입니다. 국제법에 따라서 당연히 이것은 중국의 주인이 되는 나라에 넘어가게 돼 있었죠. 이 문제도 얼마나 민감한 문제였습니까. 그 명동에 있는 땅이 한 5천 평 가까이 됐는데 명동 땅값이 얼마나 금싸라기땅이었습니까. 이런 문제들을 그 당시로서는 결국은 양해각서로밖에 처리할 수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그 대사관을 비워주고 나간 겁니다. 8월 24일에 기억하시겠습니다만...
박인규 : 저도 기억이 납니다만 대만 사람들이 느꼈을 배신감은 대단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이15년이 지나면서 이제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최대교역국이 됐고, 특히 유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상해 같은 데는 대학마다 한국 영사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굉장히 가까워졌습니다. 대만하고는 어떻습니까 우리 관계가, 손상된 관계가 많이 복원됐나요?
권병현 : 상당 부분 복원됐다고 저는 듣고 있습니다. 대만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나서 1년간은 어려운 시기를 넘겼습니다. 우리도 거기에 특사를 보냈고. 당시에 정일권 전 총리도 가셨고 김재순 국회의장도 가셨죠. 우리가 성의있는 노력을 했고, 또 대만도 이 자체가 우리가 인위적으로 한 게 아니라 역사의 흐름이고 현실의 반영이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아마 대만도 이 사실을 세월이 좀 지나고는 받아들이고, 실질관계를 지금 거의 회복했지 않습니까. 예컨대 항공노선도 한 ,1,2년 후에는 회복이 됐고 무역도 지금 상당한 수준에 올랐고 인적 왕래도 그 전보다는 훨씬 많을 걸요
박인규 : 공존공영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대사관 문제 관련해서는, 한국에 있던 대만대사관 주인이 중국으로 바뀌었다면 청나라 말기에 베이징에 대한제국에서 있던 공간이 있었는데 그걸 우리가 다시 되찾아야 되는 거 아니냐는 지적도 있던데요?
권병현 : 아마 이것을 공개적으로 공표한 것이 이번 제 한중수교비망록에서가 처음 아닌가 생각합니다. 구한 말 대한제국이 있지 않았습니까? 성립된 뒤 고종황제의 내탕금으로, 개인 돈으로 북경에 중국에 우리 공사관이 설립돼 있었거든요. 공사관을 설립하고 공사관 건물을 사들였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1905년에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가니까 그게 일본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 사이에 복잡한 문제가 돼서 결국 그게 우리 손으로 넘어오지 못하고 만 사실이 있었거든요.
박인규 : 그럼 일본 사람 것이 돼 버린 겁니까?
권병현 : 그건 아마 더 사실관계를 찾아봐야 될 것 같습니다만 우리가 한중수교를 하면서 명동을 중심으로 한 대사관이 중국정부에 돌아감과 동시에 저희들이 교섭할 때는 우리도 베이징에, 뭐 상호주의라고도 볼 수 있겠죠. 우리도 대사관을 지어야겠고 땅이 필요하다고 해서 작년 말에 완공됐죠. 베이징에 있는 대한민국 대사관이 완공됐는데 그 터가 거의 5천 평 됩니다.
우연의 일치는 아니죠. 이쪽에 있는 땅도 5천 평이고 저쪽에 있는 땅도 5천 평이라는 것은 한중수교교섭의 과정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박인규 : 그 말씀은 우리가 대금을 지불하지 않고....
권병현 : 물론 대금은 지불했죠. 중국에서는 땅값이라는 게 잘 아시다시피 국가소유기 때문에 그 땅값이라는 건 상당히 여러 가지로 호혜적인 땅값이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박인규 : 그 고종황제의 내탕금으로 만든 조선... 대한제국의 공사관 이 부분은 우리가 문제제기만 하고 풀리지 않은 상태인가요?
권병현 : 이 문제는 솔직히 얘기하면 그 당시에 우리가 너무 수교를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임하지 못했어요. 예를 들면 1992년 4월 13일에 이상욱 당시 장관이 베이징에 가 있으면서 그곳 장관과 단둘이 단독회담을 하면서 양국의 수교비밀교섭을 시작하자고 통보를 받습니다. 동시에 그 날 중국의 주석인 양상곤 주석은 특별기를 타고 평양에 날아갑니다. 날아가서 김일성 주석한테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서 한중수교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얘기를 뜸을 돌리고 난 뒤에 수교하게 되는데, 그러고 난 뒤에 내가 통보를 받은 게 5월 직초였거든요. 그리고 불과 1주일 준비해서 5월 13, 14일 제 1차 예비회담을 한단 말이에요. 그럼 일주일 동안 어떻게 다 준비를 하겠습니까. 참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많이 있나 하면 불과 딱 한... 당시 신정선 중국과장이 친병을 해서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는 걸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외교안보연구원에 연구원 발령을 내놓고 신정선 과장과 나와 단 둘이서 동빙고동 안가에 들어가서 작업을 해서, 물론 밤늦게 되면 김석우 당시 아주국장이 이상욱 장관 지시를 받아서 오기도 하고 우리가 작업한 걸 가서 보고하기도 했지만 불과 몇 사람.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서도 열몇 사람밖에 알지 못하는 비밀교섭을 시작했던 겁니다.
박인규 : 워낙 비밀리에 빨리 하다 보니 아직도 못 풀린, 우리 공사관 문제라든가 그런 게 있군요.
권병현 : 네. 그건 한참 뒤에 밝혀졌죠.
박인규 : 또 하나는 이런 거죠. 6.25 때 사실 연합군의 북진통일을 막은 군대가 당시 중공군 아닙니까? 말하자면 적군이었는데 그런 부분들이 사실은 제대로 수교를 하려면 양측간에 정리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 당시의 중공군 참전에 대해서는 어떻게 얘기가 됐습니까?
권병현 : 맞습니다. 바로 92년 한중수교교섭을 하고 있을 당시만 해도 기술적으로 얘기하면 중국과 우리는 준전시상태에 있었거든요. 휴전상태에... 그리고 우리 한국전쟁에서 중국군이 개입한 것도 사실이었고 그것도 어마어마한 숫자가 개입됐고. 또 우리 국민이 근 100만에 해당하는 인명이 손실됐는데 이것이 국민들한테 납득이 갈 만한 뒤에 조치를 해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우리가 충분히 준비를 해서 수교과정에서 한국전쟁 당시에 중국이 개입해서 결국은 통일도 지연될 뿐만 아니라 우리 인명피해가 남한만 해도 한 100만 가까이 됐다. 여기에 대한 것을 분명히 해명해 주기 바란다. 또 가능하다면 이런 일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수교를 하는 마당에 과거의 역사로서도 여기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갔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죠.
박인규 : 그 부분에 대한 중국의 답변은 어땠습니까?
권병현 : 중국측은 우선 이건 수교하고 직접 관련된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 지금 우리가 수교를 하기 위해서 담판하는데 이 문제를 얘기한다면 중국으로서도 중국 입장이 있다. 무슨 얘기였던고 하니 중국의 국경이 위협을 받는 상황하에서 우리가 먼저 개입시킨게 아니고 한국의 상황이 전쟁이 일어난 뒤에 그 다음에 연합군이 압록강에 올라와서 중국 국경을 위협받는 상황하에서 우리는 정규군이 아닌 의용군, 지원군을 넣었던 건데 이건 지나간 역사기 때문에 이 문제는 한국의 입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입장이 있으니까 수교와 직접 관련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 얘기를 많이 하면 굉장히 시간이 많이 걸린다. 우선 수교와 관련 없는 문제는 분리하자는 얘기를, 상당히 많은 부분을 저희들이 이 문제로 논쟁했습니다.
박인규 : 과거보다는 미래를 보자, 이런 식으로 된 거군요. 92년 당시 한중수교의 실무지휘자 입장에서 15년이 지난 다음에 회고해 보시면 이 부분은 아쉬웠다, 혹시 그런 부분이 있습니까?
권병현 : 예. 바로 한국동란 때 희생된 우리 국민이 그렇게 많았는데 중국으로부터 참 유감이었다, 이건 참 유감이었다는 얘기를 한 번 듣고 싶었는데, 그걸 받지 못한 걸 지금도 아쉽게 생각합니다.
박인규 : 한국전쟁의 상처는 앞으로 중국, 또 앞으로 북한과의 관계도 개선되겠지만 언젠가는 풀어야 될 굉장히 큰 숙제란 생각이 듭니다.
권병현 : 그렇습니다.
박인규 : 15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굉장히 가까운 나라가 됐구요.
현재 한중관계, 제대로 가고 있다고 보십니까?
권병현 : 일단 정상화는 됐죠. 수교 전에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태였고. 그것 때문에 우리 국민이 얼마나 많은 불편과 손해를 입었습니까. 근 1세기 동안에 그 중국의 문이 꽝 닫혀 있었으니까 말이죠. 이제는 정상화가 됐으니까 자연스럽게 양국의 인적 교류, 무역, 투자... 세계 제1의 대상국이 됐죠 우리한테는
박인규 : 동북공정이라든가 그런 걸 보면서 중국이 좀 대국주의로 나가는 게 아니냐, 패권주의 아니냐, 그러면서 경계해야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런 동북공정 문제를 어떻게 봐야 될까요?
권병현 : 하나의 긴 역사적인 안목에서 우리가 대국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당당하게 우리가 대처해야겠지요. 동북공정의 역사를 다시 고쳐쓰겠다고 하는 중국의 의도가 있다면 그건 학문적으로, 또 여러 가지 정도로 당당하게 우리는 할 일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칫, 한중 양국관계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나 지리적으로 보나 현 국제정서로 보나 동북아 정세로 보나 대단히 소중한 관계기 때문에 그 전체적인 큰 안목에서 균형감각을 잊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양자를 어디서 조화, 균형시키냐 하는 문제는 전문가와 하나의 정치가, 또는 일반국민의 양식에 속하겠죠.
박인규 : 중국의 비중이 상당히 커지면서 일각에서는 미국이 또 지나치게 군사주의로 나가니까 동아시아지역협력이 중요하다. 따라서 미국보다는 중국과 가까워져야 된다는 쪽이 있는가 하면, 그래도 한미동맹이 60년 된 동맹이고 쉽게 버려선 안 된다. 중국이 우선이다 미국이 우선이다, 이런 식의 논란이 많은데 외교관으로 일생을 보내오셨으니까 이런 중국과 미국의 관계에서 한국은 어떻게 나아가는 게 바람직한 건지
권병현 : 바로 이거야말로 끝없이 변하는 소위 새로운 이퀼리브리엄. 새로운 균형이 자꾸 형성돼 가는 게 우리 일상생활 아닙니까? 과거에 한 수천 년 동안의 역사를 본다면 인류 역사상 중국이 가장 큰 영향력이 있을 때 우리는 중국과 가장 가까운 하나의 선린이었고, 또 지난 한 1세기 남짓한 세월을 본다면 동방문명이 쇠퇴하면서 서방문화가 우월하는 과정에서 구라파가 흥했던 시절이 있고 지금은 소위 팍스아메리카나라고 해서 미국 주도의 세계정치, 세계운영이랄까요. 이런 속에서 지난 한 5, 60년 동안 우리는 한미동맹을 잘 누려왔지 않습니까. 중국이 다시 부상하는 게 새로운 현실이라고 한다면 일상적으로 변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 대한민국 같은 소위 미들파와 소위 중견국으로서 균형과 조화와 국익과 이것을 잘 모아 가면서 어느 한쪽도 버리지 않고 또 어느 한쪽도 기울어지지 않게, 쉽게 얘기하면 눈터지도록 현실을 지켜보면서 매일매일의 일을 균형을 맞춰나가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박인규 : 지난 봄에 한국이 한미FTA를 체결했습니다만 노무현 정부에서도 초창기에는 오히려 한중, 한일FTA를 한 다음에 한다는 말이 있었고. 또 일각의 얘기를 들어보면 중국도 굉장히 한중FTA를 바라고 있다. 또 지금이라도 하고 싶다, 그러고 있다던데 실제로 중국에 계신 고위인사를 만나시면 어떻습니까? 한중FTA를 바라보는 그쪽의 시각이
권병현 : 한중FTA는 저는 하나의, 꼭 필요한 거라고 생각되고 이건 단지 시간과 방법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제1의 무역대상국이 이미 돼 버렸고, 또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로서 유무상통하고 사는 게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현실이 돼 버렸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멀리 있는 사람과도 지금 FTA를 하는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과 FTA를 안 하고 거기는 관세를 다 주고 한다는 건 서로간에 뭔가 괜히 불필요한 장벽을 놓고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건 시간과 방법의 문제지, 어차피 우리가 가야 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중국도 잘 알고 있고 우리도 알고 있지 않나 생각되네요
박인규 : 지난 15년 동안 한중수교를 통해서 우리 경제적인 진출 등을 포함해서 많은 득도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만, 앞으로 한중관계가 더 나아지고 동아시아 평화랄까 안정을 위해 기여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한중관계가 좀 이런 방향으로 나가는 게 좋겠다. 그런 걸 마지막 마무리 말씀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권병현 : 어쩌면 우리 인류문명사 속에서 동방문화가 꽃이 필 때 중국과 한국이 가장 인류문명의 중심무대에서 같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길게 보면요. 지난 1, 2 세기 동안에 약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 한중관계가 복원되는 것은 하나의 역사의 복원력이라고 보거든요. 그렇다면 이 역사를 제대로 직시하고 우리는 현실에 발을 붙이고서 중국과의 관계를 가장 건전하게. 꼭 무역이나 투자라든지 여기에만 국한하지 말고 문화나 예술 또는 역사라든지 모든 부분에서 가장 정당하고도 올바른 방법으로 양국관계를 정립해나가는 총체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박인규 : 그동안의 경험과 식견, 그런 것들을 바탕으로 한중관계는 물론이고 대만관계 남북관계 등에 많은 역할을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권병현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1992년 당시 한중수교협상을 진두지휘했던 권병현 전 주중대사와 함께했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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