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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산이 곧 인생이요, 인생이 곧 산입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8/22] 산악인 엄홍길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완등에 성공한 산악인 엄홍길씨가 이번에는 남북 청소년 역사 탐험대를 이끌고 쿠바와 멕시코 원정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원정은 KBS 1라디오의 기획으로 남한 청소년과 탈북 청소년이.. 현지 한인들과 함께 '애니깽'으로 불렸던 쿠바, 멕시코 노예 이민자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취지로 마련됐는데요. 특히 8월15일 광복절에는 현지 멕시코 메리다 공원에서 멕시코 한인 동포 2,3세들과 함께 8.15 독립기념 행사를 치르는 등. 그야말로 하나된 대한민국의 감동을 현지 교민들에게 전해주는 좋은 기회가 됐다고 합니다.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이번 원정대의 대장을 맡은 산악인 엄홍길씨와 함께 20일 동안 함께 했던 쿠바, 멕시코 원정길과 현지에서 느낀 애니깽들의 발자취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산악인 엄홍길씨입니다. 엄홍길씨는 1960년 경남 고성 출생으로 외국어대 중국어과를 졸업했습니다. 1988년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작으로 2000년 칸첸중가·K2까지, 아시아에서 처음이자 세계에서 8번째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했습니다. 또, 2004년에는 제 5위봉인 얄룽캉에 도전해 성공했고 올해 3월 히말라야 로체샤르를 등반해 세계에서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등정에 성공했습니다. 체육훈장 맹호장과 청룡장, 대한민국 산악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박인규 : 입국하신 지가 얼마 안 됐죠?

엄홍길 : 예. 월요일 오후에

박인규 : 여러 가지로 바쁘실 텐데 또 모시게 돼서 죄송합니다.

엄홍길 : 아닙니다. 이렇게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박인규 : 재작년에 희망원정대 때 뵌 것 같고요. 이번엔 산에 갔다 오신 게 아니고 역사탐험을 하셨어요. 16좌를 다 완등하셨으니까 산악등반은 접고 역사탐험으로 업종을 바꾸셨나?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엄홍길 : 왜냐면 제가 히말라야 8000미터 등반을 하면서 16좌를 완등하는 데 성공하게 되면, 목표한 것이 이뤄지게 되면 앞으로 제가 히말라야 등반, 산을 통해서, 도전을 통해 경험하고 체험하고 느낀 것을 자라나는 청소년들한테 나눠주고 전해주는 일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요, 마침 이렇게 좋은 인연이 돼서 아주 의미있는 남북역사탐험대... 그쪽에서 얘기가 돼서 제가 청소년들을 데리고 같이 한 번 갔다 왔습니다.

박인규 : 남과 북의 청소년들이 멕시코, 쿠바의 한인이민자들의 발자취를 다녀보는 역사탐험. 이게 어떻게 마련됐을까요? kbs1라디오에서 기획한 거죠?

▲ ⓒ프레시안

엄홍길 :
네. kbs 1라디오에서 기획해서 남한쪽 고등학생, 대학생 8명과 북한에서 탈북한... 새터민 학생들 8명하고 총 16명 학생들하고요. 거기 더불어서 멘토들, 그리고 방송요원들하고 32명 정도가 다녀왔습니다. 21일간 일정으로. 멕시코와 쿠바를, 지역별로 해서 100여 년 전의 애니깽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멕시코... 처음에 입항한 메리다 항구에서부터 쿠바 지역 쪽에... 다시 또 쿠바 쪽으로 이주를 하셨거든요 애니깽 농장으로. 그래서 그쪽 현장하고, 체험도 하고

박인규 : 애니깽을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 애니깽이 갱인가, 이런 분들도 있고 한인 이민자를 말하는 건가? 그런 분들도 있고, 원래 애니깽이 선인장 같은 식물이라던데요

엄홍길 : 그렇습니다. 아주 척박한, 건조한 사막지대 비슷한 데서, 사막지대는 아니라도 굉장히 척박한 땅에서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약간 건조한 데서 자라나는 선인장과거든요. 굉장히 큰, 줄기가 긴 건 1.5에서 2미터 되고, 줄기 길이만. 키는 큰 건 2, 3미터씩 되는 것 같더라구요. 그리고 가시가 있어서요

박인규 : 100년 전에 가신 한국 이민자들이 처음 하신 일이 이른바 애니깽 농장에서 그걸 자르는 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엄홍길 : 네. 그 가지를. 그 당시만 해도 나일론이라는 섬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 줄기를 채취해서 가공해서 끈으로... 삼줄 식으로 로프, 줄을 만들어서 그 당시 줄로 썼거든요. 그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 채취작업을 하기 위해서 당시 한국에서 약 1014명의 선조들의 제물포항을 통해서

박인규 : 많이 가셨군요. 1903년인가요? 처음 가신 데가 메리다항구...

엄홍길 : 멕시코 메리다항구를 입항하셔서 멕시코에 들어가서 거기서 애니깽 농장으로 바로 들어가셔서 애니깽 채취작업을 하시다가 거기서 다시 쿠바로 일부 이민을 가셔서 농장에서 일하셨죠

박인규 : 이번 역사탐험도 메리다항구에서 시작하셨겠군요.

엄홍길 : 이번에는 거꾸로 갔어요. 멕시코시티로 들어가서 애니깽 후손들, 한인 2, 3, 4세들을 만나서 그들과 교류시간을 갖고. 멕시코 대사관에서 주최하는 환영행사도 참여하고, 교민들, 현지 후손들과 같이. 그 다음에 쿠바로 넘어가서 쿠바 아바나에서 다시

박인규 : 거기도 한인 교포가 꽤 있다고 하더라구요.

엄홍길 : 예. 꽤 있는데 멕시코보다는 적습니다. 그쪽의 후손들, 그쪽의 발자취. 그리고 거기 애니깽 선조들의 추모비가 있어요.

박인규 : 그럼 메리다 항구는 마지막으로

엄홍길 : 네. 나올 대 멕시코를 다시 들르면서 메리다항구를 들러서 나왔습니다.

박인규 : 100년 전에 우리 선조들은 가셔서 애니깽 농장에서 참 힘든 일을 하셨는데

엄홍길 : 너무 진짜 힘들어요.

박인규 : 직접 해보셨습니까?

엄홍길 : 네. 저도 그렇고 학생들도 해봤는데 진짜 참 땡볕에 풀이 막 자라고 가시가 너무 많고요. 더군다나 줄기가 가시가 있으니까 굉장히 힘들더라구요. 가시에 찔리고 독이 또 있답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독도 있고. 그 당시 선조들이, 환경이 워낙 열악하고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다른 생활구가 없으니까 나중에는 일하는 과정에 손가락이 잘라졌는데도 그래도 어쨌든 일해야 되고 당장 먹고 살아야 되니까 거기서 줄기를 자르는 낫 같은 게 있어요. 줄기를 자르는 일종의 낫 형태의, 그걸 손에 감고, 손가락이 잘라지니까 손을 못 쓰니까 그걸 손에 감고 손목으로만 잡고 일하셨다고 하고. 또 신발을 보니까 신발도 아니에요. 타이어 쪼가리를 잘라서 만든 발가락에 끼는 거, 애니깽 줄로 끊어서 만든 슬리퍼를 신고 가시밭길에서 얼마나 태양이 뜨거운지, 말도 못하게 덥습니다.

박인규 :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고생을 하셨군요. 100년 뒤의 애니깽들의 후손들은 그런 일을 하시진 않겠죠? 지금 멕시코나 쿠바 교민들은 괜찮던가요?

엄홍길 : 멕시코는 나라 자체가 경제적으로도 괜찮으니까 그 당시 선조들의 후손들이 그런대로 어느 정도 생활을 영위하고 살아요. 그래도 아직까지 어려운 분들이 계시지만, 쿠바쪽은 굉장히 많이 열악하더라구요. 아직까지 폐쇄되고 사회주의 국가다 보니 물자나 환경이라든가, 참 힘들고 열악하더라구요.

박인규 : 남과 북의 청소년들이 직접 가서 교민들을 만나면 참 느낀 게 많았겠어요.

엄홍길 : 네. 우선 그들이 이런 취지로 갔기 때문에, 그곳에서 교민들, 후손들, 2, 3, 4세들... 같은 또래 아이들도 있어요. 전혀 피부색도 완전히 현지인이 다 된 거죠. 말도 완전 현지말, 문화, 환경, 완전히 다 현지인이 된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뿌리, 한민족의 뿌리라는 것을 그들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문화를 배우고 언어를 배우고 같이 그들과 만나서, 우리 청소년 탐험대원들이 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짧은 시간, 짧은 만남이지만 그 만남 중에 굉장히 많은 것을 정신적으로 서로 주고받은 것 같습니다.

박인규 : 지내면서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엄홍길 : 처음에는 약간씩 언어적인 것 때문에

박인규 : 현지 교민들은 한국말을 잘 하던가요?

▲ ⓒ프레시안

엄홍길 :
거의 못합니다. 그 중에 한국어를 조금 배운 아이들은 그런대로 한두 마디 기본적인 정도는 되는데 거의가 언어가 소통이 안 돼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쨌든 비슷한 또래고 제가 방금 전에 얘기했듯이 한민족이라는, 한국의 원천적인 뿌리를 그들도 잊지 않고 있더라구요. 부모와 할아버지 세대, 한민족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쉽게 가까워지고 별 어려움 없이 친하게 되고. 헤어질 때는 서로 얼싸안고 눈물도 서로 흘리고

박인규 : 그 와중에도 또 산에 오르셨어요. 어디서 오르신 겁니까?

엄홍길 : 네. 멕시코에서, 산 이름이 이시와뜰산이라는. 4200미터 산인데요. 이스따시와뜰이라는, 산 이름이 좀 어렵긴 한데, 정상 부근에는.... 원래 4800, 4900대 산인데 4200미터 그 이상에는 눈이 있어서 못 올라가고 4200미터까지 올라갔는데. 이게 일반적으로 히말라야 등반할 때 저지대에서부터 저지대부터 걸어서 보도로 올라가는 게 아니고, 여기는 차가, 도로가 한 3900미터 되는 지점까지 나 있더라고요. 차가 거기까지 올라가는 겁니다. 차가 막 빠른 속도로 고도로 올라가니까 대원들이 상당히 고소로 인해서 호흡이나 걷는 걸 굉장히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 했죠. 그래서 제가 3900미터부터 내려서 올라가면서 판단했을 때 위험하고 어려울 것 같아서 3600미터 지점에서부터 내려서 올라갔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대원들이 여러 가지로 힘들어하고 어려워했는데, 특히 고소, 호흡곤란 때문에 호흡이 제대로 안 되니까 체력도 많이 떨어지게 되겠죠. 그러다 보니 굉장히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전 대원들이 거의 정상을 다 잘 사고 없이 갔다 왔습니다.

박인규 : 여러 가지 많은 경험들을 했네요.

엄홍길 : 굉장히 힘든 등반을 했죠.

박인규 : 그런 중에서도 우리 한인 조상들이 가장 먼저 도착했던 메리다항구, 메리다공원에서 8.15 독립기념행사를 했다는데 어땠습니까?

엄홍길 :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100여 년 전의 선조들이 메리다항구를 입항해서 첫발을 내딛은 곳이라는 그곳의 현장에서 62주년 광복절 행사를 현지 교포들 교민들과 2세 한국인, 후손들과 같이 했는데. 거기서 저희 한국사람들뿐만 아니고 현지인들도 굉장히 많이 참여했어요. 거기 주지사, 정부관료들도 참여하고 우리 멕시코 대사님도 참여하시고, 거기서 한국문화적인, 학생들은 탐험대원들은 태권도 시범도 하고 거기서 같이 여러 가지 율동도 보여주고. 현지의 한국인 애니깽 후손들은 한국 춤 같은 것들을 자기네들끼리 배우고 해서 상당히 잘 추더라구요. 한국무용 같은 걸

박인규 : 스스로 배운 건가보죠?

엄홍길 : 네. 자기네들이 나름대로, 거기 한국학교도 있더라구요. 거기서 한국문화도 배우고 한국어도 배우고 우리 후손들이. 거기서 문화적인 걸 하면서 장구 치는 거나 고전무용 등을 배우나보더라고요. 그날 행사하는데 전혀 피부색, 생김새도 다르고 현지인이나 마찬가지인 한인 후손들이 아리따운 한복을 입고서 한국고전무용을 하고 부채춤을 추고 여러 가지 한국의 것들을 선보일 때 너무나 감동적이고 좋았습니다.

박인규 : 메리다에 계신 멕시코 교민 분들이 이번에는 한국에서 역사탐험팀이 갔으니까 했고, 그렇지 않고 평소에도 그런 행사를 하신답니까?

엄홍길 : 네. 매년 8월 15일을 기준으로 하되 가까운 전후, 주말과 휴일을 골라서 행사를 매년 여지껏 계속 하고 있다더라구요.

박인규 : 산은 항상 다니셨습니다만 이렇게 30명이 넘는 청소년과 멘토들을 데리고 20일 동안 역사탐험을 거의 처음 해보신 것 같은데, 갔다 오시니까 느낌이 어떠세요?

엄홍길 : 처음에는 제가 이런 제의를 받고 마음속으로 걱정을 많이 했어요. 학생들이고, 더군다나 하루이틀도 아니고, 굉장히 먼 거리인데. 더군다나 남한쪽 학생들만이 아니고 북한에서 탈북한 새터민 학생들을... 자란 환경, 문화적인 것, 언어적인 것도 한민족이라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100% 완전히는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상황이더라구요. 가끔씩 보면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더라구요. 그런 환경에서 자라온 남과 북의 학생들이 합쳐서 그런 행사의 취지에 맞게 일을 진행한다고 했을 때 과연 이 일이 잘 진행될까. 가장 중요한 것이 화합인데. 또 나이가 청소년 학생들인데, 얼마나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일 수도 있고 자기밖에 모를 수도 있고. 한국, 남한쪽 학생들 같은 경우는 얼마나 집에서 애지중지하면서 잘 자랐겠습니까. 그랬을 때 그들이 과연 20여일 동안 북한에서 내려온 탈북자 학생들과 생활할 때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을 것 같은데 과연 이것이 잘 될까, 할 수 있을까, 하나로 만들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탐험대원들이 너무나 열심히 열성적으로 자기 일 같이 형제 같이, 가족 같이 하나가 되고 금방 통하더라고요. 그래서 20여일 동안 아무 탈 없이 호흡도 잘 맞추고, 각각이지만 하나가 돼서 돌아왔습니다.

박인규 : 기본적으로 외국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엄홍길 : 네. 더군다나 그들 애니깽 후손들 현장을 직접 보고 8.15경축행사도 하다 보니 조국, 국가에 대한 애국심도 생기고 그렇게 되더라고요.

박인규 : 오시면서 나름대로 평가도 하셨을 것 같은데, 갔다온 남북 청소년들은 대충 어떤 반응들을 보입니까? 좋았다고 합니까? 뭐 좋았다고 하겠지요.

▲ ⓒ프레시안

엄홍길 :
나중에 나름대로 소감 같은걸 얘기하는 시간도 가졌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이번 이런 데에 참여하게 된 것 자체부터 너무나 영광으로 생각하고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한다면서, 자기가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자기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굉장히 큰 하나의 전환점적인, 굉장히 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도움이 됐다고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kbs남북역사탐험대 대원에 참여했던 것이, 이번 일이 굉장히 자기한테는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남한측 학생들도 그렇고 북한측 새터민 학생들도 그렇고 굉장히 많은 걸 보고 배우고 느끼고. 가기 전보다 성숙하고 어른이 된 것 같더라고요 애들이.

박인규 : 멕시코, 쿠바 탐험원정대에 관한 방송은 9월 3일 kbs1라디오에서 방송됩니다.
이번에는 세계 최초로 엄대장께서 이루신 16좌 완등. 제가 알기로 히말라야에는 8000미터급 봉우리가 16개 있는데 거기 다 오른 거다, 그게 맞습니까?

엄홍길 : 히말라야에 8000미터 이상 되는 주봉은 14개 있습니다. 대표적인 국가가 파키스탄, 네팔, 중국 쪽으로 해서 14개가 들어가 있는데요 8000미터 이상 되는 14개 주봉 외에 8000미터 이상 되는 위성봉들이 여러 개 있습니다. 몇 개 되는데, 그 중에서 제가 올라간 얄룽캉이라는 8500미터 봉우리하고, 로체 샤르라는 제가 이번에 마지막으로 16번째로 등정한 8400미터 봉우리는 다른 여느 8000미터 위성봉들과 다르게 독립적인 성격과 등반의 가치와, 어떤 개별의... 여러 가지, 산을 오르는 길도 다르고 다른 8000미터 같이 등반의 허가도 별도로 받아야 되고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독립봉의 자질과 성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 세계산악회에서도 거론이 여러 번 됐었고, 이걸 인정해야 되지 않느냐는 얘기도 가끔씩 나오기도 했었고, 그래서 제가 14좌를 완등하고 나서 누구도 아직 시도해 보지 않은 새로운 도전을, 새로운 영역의 8000미터를 도전해 봐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제가 2004년도에 얄룽캉을 5월 5일에 성공했고요 16번째 로체 샤르를 이번 5월 31일에 성공했습니다.

박인규 : 3월에 떠나셔서 5월 31일에 오르셨다면 거의 두 달 이상을 계셨던 건데 상당히 힘든 산인가 봐요 로체 샤르가.

엄홍길 : 네. 제가 그동안 이 산을 세 번 실패하고요, 네 번째에

박인규 : 3전4기 하셨군요. 왜 그렇게 힘듭니까? 지형이 어려운가요?

엄홍길 : 제가 8000미터 등반한 봉우리 중에서 가장 정상 부근이 어렵고 아주 위험하고 굉장히 난해한 것 같습니다. 굉장히 까다롭고요. 산 전체가 상당히 위험합니다. 눈사태 위험이 많고요. 그래서 제가 2001년도 봄에 한 번 시도했는데 그때도 마찬가지로 눈사태와 기상악화로 인해서 실패했고. 그 다음에 제가 2003년도에 또 도전했는데 결국엔 정상을 바로 150미터 남겨 놓고, 바로 정상이 눈앞에 있죠. 그런데 거기서 뜻하지 않은 눈사태가 일어나서 바로 눈앞에서 동료 둘을 눈사태로 잃었어요. 거기서 떨어지면서 동료들을 잃고 두 번째 실패하고. 그 다음 작년에 제가 세 번째 가서 작년에도 기상악화로 인해서, 폭설이 내려서 정상 직전에, 8200미터 지점에서 실패를 했어요.

박인규 : 그동안에 로체 샤르를 오른 산악인도 그렇게 많지 않겠네요?

엄홍길 : 등반한 팀도 성공한 팀도 거의 없고요. 그 다음에 제가 이번에 올라가서 성공한 루트 자체가 누구도 아직 등반해보지 않은 새로운 초동 루트거든요.

박인규 : 말하자면 개척하신 거군요.

엄홍길 : 네. 저희가 직접 길을 하나, 코리안루트를 하나 만들어냈어요.

박인규 : 엄홍길 루트로군요.

엄홍길 : 엄홍길 루트라고 명하지는 않고, '인간한계의 벽을 넘어서'라는 이름으로 정했습니다.

박인규 : 150미터를 남겨 두고 철수하시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동료를 잃으시기도 하고. 그런 봉우리를 딱 오르시는 순간 진짜 만감이 교차했겠습니다.

엄홍길 : 네. 이번에 제가 정상에 올라갈 때 오후 6시 20분경에 정상에 도착했어요.

박인규 : 그럼 어둡지 않나요?

엄홍길 : 예. 거의 뭐... 한쪽에서는 석양이 지고 한쪽에서는 달이 떠오르고, 양면이 그런 상태인데, 그러고 나서 바로 어둠이 시작된 거죠. 그러니까 정상에 섰을 때 제가 어떻게 정상에 올라갔는지, 정상에 딱 올라서는 순간 아, 드디어 내가 정상에 올라섰구나, 성공했구나 그걸 알았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제가 마지막 구간에서 8000미터 이상에서부터, 8200미터 이상에서부터 정상 가는 구간에, 뭐 진짜 죽을힘을 다해서 올라간 거죠. 만일 여기서 사고로 인해서 죽는다고 해도 그 당시에는 두렵지도 않고, 모든 것을 어쨌든 거기에 성공해야겠다, 정상에 가야 된다는 목표 하나만 갖고 올라갔기 때문에 중심을 다해서 올라간 거죠. 제가 어떻게 정상에 올라갔는지 그 과정이, 무념무상입니다. 무아지경 상태에서 정상에 간 거죠. 정상에 딱 서는 상황에서 아, 성공했구나.

박인규 : 엄대장이 느끼시기에, 엄대장한테는 산이 뭡니까?

▲ ⓒ프레시안

엄홍길 :
처음에는 제가 오름의 대상, 도전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산을 다녔거든요. 그 다음에 제 자신이 그런 과정에서 높이를 추구하고 좀 더 어려운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 과정을 느끼면서 산을 오르게 됐어요. 그 다음에 성공이든 실패든 크게 연연하지 않고 히말라야 등반을 하게 됐는데, 제가 8000미터 14개봉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15개, 16개 봉우리를 오르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등반하면서 많은 성공과 많은 실패를 했어요. 더 나아가서 죽음과 삶의 엄청난 많은 고비를 넘겼거든요. 또 동료도 많이 잃었어요.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그렇게 산이 모질게 저한테 대하면 대할수록, 또 너는 산에 오르면 안 된다. 잘못하면 너까지 죽는다, 그런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를 수없이 느끼면서도. 산이 저를 오지 말라고 하면 할수록 제 자신이 더욱더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고, 제 영혼이나 모든 것이 산에 빨려들어가는 걸, 산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걸 볼 때 전생이 있다면 제가 산이 아니었나. 그러지 않고서는 제가 산과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고 인연이 되고, 아직까지 산을 떠나지 못하고 산 주위를 맴도는 걸 봤을 때, 산이 아니었나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서 제가 이제는 산이 있음으로 해서 제가 존재하고 제가 있음으로 해서 산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산은 곧 제 인생이고 인생은 곧 산이라는 것을 저는 생각하기 때문에 산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인간이 갈 수 있다는 산은 거의 다 가보신 건데

엄홍길 : 그렇지는 않습니다. 안 간 산도 많습니다.

박인규 : 어쨌든 어렵다는 16좌 완등도 하셨고, 앞으로 삶에서 새로운 계획이랄까 그런 게 있으시면 마지막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엄홍길 : 제가 방금 전에도 얘기했듯이 8000미터 히말라야 고산등반을 38회 했습니다. 그 중에서 20번을 정상에 갔더라구요. 거의 제 청춘, 젊음의 모든 것을 히말라야 8000미터 고산등반하는 데에 바쳤는데, 제가 그동안 산을 통해 수많은 도전과 모험을 하면서, 8000산을 오르면서 경험하고 체험하고 느낀 것을 자라나는 청소년들, 특히 젊은이들한테 도전정신, 모험정신, 개척정신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가교역할, 산과 자연과 친숙해질 수 있는 역할을. 요즘 청소년들을 보면 굉장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좀 나약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번에도 남북청소년역사탐험대 대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면서도 많이 그런 것을 강조했어요. 너희들이 산에 올라가는 건, 정상에 오르는 건 목표를 향해서 올라가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너희 자신들을 이겨내는 것이 더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너희 자신을 이겨내야만 산에 올라갈 수 있고 정상을 갈 수 있는 거라고 얘기했듯이, 젊은이들한테 그런 정신을 길러주고 전달해 줄 수 있는 그런 일을 하고 싶습니다.

박인규 : 지난 40년 이상 쌓아 오신 산악경험으로, 물론 앞으로 또 새로운 도전도 하시겠습니다만, 우리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자라날 수 있도록 역사탐험도 많이 하시고, 많은 역할을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엄홍길 : 네.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KBS 남북청소년 역사탐험대 2기를 이끌고 멕시코, 쿠바 원정을 다녀온 산악인 엄홍길씨와 함께했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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