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남북정상회담을 전격 연기한 배경은 전화통지문의 내용대로 수해 복구에 대한 부담이 컸기 때문이라는 게 1차적인 분석이다.
남북은 지난 14일 개성에서 열린 정상회담 실무접촉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승용차를 타고 경의선 도로를 통해 평양을 방문한다는데 합의했다.
그러나 이번 수해의 주된 피해 지역이 평안남도와 황해도(황해남도와 황해북도)에 집중 분포되어 있어 노 대통령의 방북길이 곧 수해 현장이라는 게 북한 사정에 밝은 이들의 전언이다.
따라서 폭우에 따른 산사태와 지반 붕괴로 2차선 개성-평양 도로 곳곳이 유실되어 있고, 도로와 나란히 달리는 철로 역시 휘어지거나 끓어져 있을 텐데 그곳을 150여명에 달하는 정상회담 남측 대표단이 지나가는 것을 북한 지도부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회담 발표 당시 수해 상황 미처 파악 못해"
북한은 지난 7일부터 12일까지 주로 평양 이남지역에서 집중호우를 겪은 후 자신들의 피해 상황을 이례적으로 국제사회에 적극 알리며 자체의 힘으로는 복구할 수 없을 지경임을 내비쳐왔다.
최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한 인사에 따르면 평양 시내의 상황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일례로 남측 평화자동차그룹이 평양 보통강호텔 앞에 신축중인 세계평화센터도 1층까지 침수됐다고 한다.
북한 지도부가 이같은 평양의 모습이 정상회담을 계기로 세계에 비춰지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라는 게 김창수 민주평통 전문위원의 지적이다. 김 전문위원은 "대표단이 육로로 가면 그렇잖아도 카메라에 북한 지역 곳곳이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며 "북한 지도부가 그걸 감수하기로 했는데 피해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완전히 망가진 모습을 보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도 "수해 때문이라는 북한의 이유가 충분히 타당하다고 본다"며 "정상회담 합의와 발표 당시에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수해의 참상이 보고되면서 연기가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관세 통일부 차관도 "회담 전에 수해 복구를 해 보려고 했으나 물리적으로 힘들었던 것 같다"면서 "지금으로선 정상회담 연기요청을 한 이유가 말 그대로 수해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통일부는 북한이 9월 말에는 추석 연휴가 있고 10월 10일은 북한 노동당 창건일이기 때문에 10월 초로 정상회담을 열자고 요청한 것 같다는 분석을 하고 있다.
석연찮은 구석 몇 가지
그러나 일각에서는 수해 때문이라고 하기에 석연찮은 구석도 있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14일 정상회담 준비접촉에서 최승철 통일전선부 부부장이 평양-개성간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왔고 남측과의 회의에서도 대통령의 방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는 점 때문이다.
또 준비접촉이 있었던 날은 북한에서의 집중호우가 멈춘지 3~4일이 지난 뒤여서 북한 지도부도 수해 상황에 대한 대체적인 윤곽을 그릴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육로 방북에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은 북한이 9월에 있을 6자회담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6자 외무장관회담 등의 진행 추이를 본 뒤 남북정상회담에 임하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하고 있다.
특히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문제를 거론해야 한다는 남측의 여론을 감안해, 9월에 있을 일련의 회담에서 핵문제에 관한 어느 정도의 진전을 본 뒤,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북핵문제를 논의할 필요를 줄이려 한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북측이 이같은 판단을 한 배경에는 지난 16~17일 중국 선양에서 끝난 비핵화 실무그룹 회의에서 북핵 불능화와 농축우라늄 문제의 해법에 관한 진전을 보인데 따른 것도 한 요인으로 보인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북한이 남한의 대선에 영향을 줄 목적으로 선거가 가까워진 시점에 정상회담을 하려는 게 아니냐는 분석을 하기도 한다.
회담에는 '전화위복'…한나라당 공세는 더 심해질 듯
그러나 대선에 대한 영향이나 한나라당의 의혹 제기가 심해질 것이라는 점을 배제하고 본다면, 정상회담의 연기가 회담 준비에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나온다.
김창수 전문위원은 "8월에 남북정상회담을 하면 9월 이후 6자회담, APEC 정상회의, 유엔총회 등에서의 북핵 진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다"고 아쉬워하면서도 "순서가 조금 뒤바뀐 측면이 있지만, 북핵 문제 진전이 대세인 상황에서 정상회담을 내실있게 준비할 여유를 가지게 됐다는 다행스러운 점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상회담 연기가 북한의 대선 개입 시도라는 논란은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여 그같은 공세를 극복할 정부의 대책이 시급하다는 게 공통적인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위해서는 북한 수해 지원을 체계적으로 하면서 회복의 기회가 짧았던 남북관계를 완전히 정상화시키고, 정상회담 준비를 철저히 한 후 10월 회담에서 향후 정상회담 정례화를 합의한다며 누가 차기 정부를 잡아도 남북관계 운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적극 설득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 위원은 "정상회담에 대한 정부의 방침은 회담 준비를 차분히 하고, 합의 되는 게 있으면 다음 정부에 도움이 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라며 "시간을 벌었으니 그런 입장을 국회와 정치권에 잘 설명하고 정상회담이 정례화되면 다른 정권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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