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박재동 화백입니다. 박재동 화백은 1952년 울산 출생으로 76년 서울대 미술대 회화과를 졸업했고 79년부터 휘문고등학교와 중경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했습니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시사 만화작가 공모에 당선되면서, 한겨레 만평을 8년 동안 담당했고 이후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주)오돌또기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재 (사)우리만화연대 이사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 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환상의 콤비', '목긴 사나이', '만화 내사랑' 등이 있습니다.
박인규 :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박재동 : 감사합니다.
박인규 : 6년 전인가요? 한겨레 그만 두시고 나서 오돌또기에서 제주도의 뭘 그리신다고 인사동에서 전시하실 때 뵈었고, 벌써 한 10년쯤 됐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박재동 : 애니메이션...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이라는 게 생각보다는 쉽지 않습니다. 경험도 없고. 처음에는 금방 되겠지 했는데 오래 걸리더라고요.
박인규 : 사실 오늘 모신 건 시사만화 100주년 기념사업 때문인데, 감투도 하나 쓰셨고. 우선 2009년이 100주년이라는 건 1909년에 어떤 분이 시작했다는 건데...
박재동 : 그렇습니다. 그때 대한민보라는 신문이 발행됐습니다. 그때가 한일합방 바로 직전이거든요. 굉장히 사회가 들끓고 있고. 우려와... 그때 대한민보에서는 그동안 없었던 특별한 편집을, 파격적인 편집을 했어요. 만화를 넣었어요. 그땐 삽화라고 불렸는데, 물론 그림으로 그린 게 아니고 목판화를 해서 찍었어요. 인쇄술이 그때 당시엔 신통치 않아서. 이도영이라는 화백이 그렸어요. 그리면 목판실에서 조각을 막 해서 끼워서 출판했죠. 그 당시에는 테마가 한일합방을 앞두고 있으니까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비판이라든가, 또 그 당시에는 친일파들이 그렇게 설쳤나 봐요. 눈에 띄게... 그런 걸 비판한다거나, 이런 것들을 해왔는데 그동안에도 일제 당국에서 삭제하기도 하고 판을 없애 버리기도 하다가 결국 1910년 되면서 폐간해 버렸어요. 그런 역사가 있고. 그러니까 일제가 점령하면서 시사성 있고 비판적인 만화를 못 그리게 됐죠. 그렇지만 조선일보, 동아일보 이런 데선 어떤 생각을 했냐 하면 만화가가 직접 사회비판을 못하기 때문에 독자만화라는 걸. 투고를 받아서, 사실은 만화가들이 가명을 써서 하기도 하고. 그래서 사실 굉장히 격렬한 저항을 했습니다.
1920년대인데, 그런데 그 뒤에 그것도 힘들어져서 그 다음에는 생활만화, 유머만화들이 있다가 해방되고 난 뒤에 김성환 화백, 고바우라든가 두꺼비라든가, 안의섭 선생, 왈순아지매... 그 다음에 이승만 독재가 시작되니까 고바우 선생 같은 경우는 경무대 똥통사건이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그때 경무대가 지금의 청와대인데 워낙 위세가 등등해서, 어떤 지나가는 사람이... 그땐 똥 푸는 사람들이 다녔거든요. 그 사람 보고 막 인사를 하길래 왜 하냐, 아 경무대에서 똥을 퍼서 그렇다. 그래가지고 적심에 회부되기도 하고. 이러이러한 견제를 받고 했죠. 그러다가 4.19가 나면서 확 풀려서 황금기를 맞이했었어요 시사만화들이. 굉장한... 정말 멋진 만화들이 많이 나왔어요.
그러다 5.16 나면서 군사독재가 시작되니까 정부를 향한 비판은 거의. 그런 중에서도 두꺼비 안의섭 선생 같은 경우는 전두환 군부 때 대통령님 오래오래 사세요... 이런 식으로 비꼬았다고 가택연금도 당하고. 하여튼 그러그러한 저항... 80년 광주항쟁 때는 까투리여사라고 윤영옥 선생 같은 분은, 까투리여사가 항상 반창고를 붙이고 나와요. 광주의 상처다 이거죠. 이런 식으로 은근한 저항을 했죠.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엄청난 검열을 받고 그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6.29 선언이 있고.. 6월항쟁 뒤에 한겨레신문도 생기고 이럭저럭 하면서 표현의 자유가 거의 성역 없이 이뤄졌죠. 지금은 한국시사만화100년을 조망해 보면 지금이 가장 어떻게 보면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구가할 수 있는 시대에 왔다고 할 수 있죠.
박인규 : 짧은 시간 동안에 시사만화 100년을 정리해 주셨는데, 말하자면 저항과 풍자를 통해서 국민들의 카타르시스랄까요, 그런 역할을 했는데. 일단 내후년이면 100년이 됩니다. 일찍부터 준비하시는 것 같은데, 박 화백께서 공동위원장이기시도 하고 어떤 준비들을 하고 계세요?
박재동 : 후배 시사만화가들이 재작년부터... 그래서 한 5년 전부터 준비를 합니다. 난 이런 문화가 참 아름답다. 당해년도에 6개월 남았을 때 번개같이 해서 이거 빠졌니 저거 빠졌니 하는데 5년 전부터 준비하는 것 보고 새로운 세대는 정말 우리하고 다르다 그래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어쨌든 준비하는 데 상당히 야심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선 건물을 하나 마련해서, 쉬운 일은 아니지만 시사만화박물관... 시사만화의 그동안의 역사와 작품들을 일반인들이 쭉... 어린이, 청소년, 어른들이 다 구경할 수 있고. 시사만화가 어떻게 흘러갔는가.. 도서관처럼 열람도 할 수 있고. 또 부설에서 연구 창작지원도 하고 그러면서 시사만화 100년사라든가 시사만화 100년 작품집이라든가 이런 것도 출판하고. 또 더 야심찬 건 세계시사만화가대회를 개최하겠다. 이런 야심찬. 그게 불가능하란 법은 없거든요. 그런 걸 아무도 안 해서 그렇죠.
박인규 : 세계의 시사만화가들이 우리나라에 다 모여서 그림도 그리시고...
박재동 : 그럼요. 서울선언, 이런 것도 추진하겠다. 이런 굉장히 야심찬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하나하나 잘 해나가야 될 일들이죠.
박인규 : 좀 전에 한국시사만화 100년을 간단히 정리해 주시면서 요즘이야 말로 표현의 자유에 관해서 아무런 제약도 없다.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사만화가 한 80년대나 90년대 전반까지에 비해서는 사회적 관심도랄까 위상이 상대적으로 침체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재동 : 그런 면이 있습니다. 물론 표현의 자유가 많고 하지만, 사실 들여다보면 아직도 신문사의 논조 이런 것들에 의해서 작가가 마음껏 말할 수 없는 것은 지금도 물밑으로 이뤄지고 있어요. 그러나 옛날, 군부독재나 이런 데 비해서...
그러면서 한편 지금이 어떤 시대냐 하면 옛날에는 신문 만화라는 게 주목도가 굉장히 높았거든요. 별로 볼 게 없고 신문을 펼쳐도 그림이라는 건 별로 없었고. 전체 사회적으로 봐도 라디오하고 TV채널 몇 개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TV만 해도 엄청나게 많은 선택을 할 방송이 넘쳐나고 있고. 그 다음에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등장해서 지금 신문 전체의 주목도, 만화, 그림, 이런 것들의 주목도가 많이 떨어졌죠.
박인규 : 다른 시각적인 매체가 많이 생기면서...
박재동 : 그럼요. 시사만화를 꼭 봐야 될 이유가 많이 줄어들어서 사실 지금 우리 후배 만화가들이 만화들 재밌게 잘 그리고 있어요. 만약 이 분들이 내 시대 때 그렸다면 천재들이죠, 굉장하죠. 그런데 독자들의 눈도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에 그게 그렇게 짜릿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 시사만화가들이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힘든 사정입니다.
박인규 : 그렇다면 박재동 화백께서도 88년부터 만 8년 동안 시사만화를 그려 오셨고 기본적으로 시사만화라는 것이 예술적 사회적으로 어떤 가치나 위치가 있다, 어떻게 보세요?
박재동 : 저는 옛날에 시사만화를 그릴 때, 시사만화는 신문의 눈이다.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어요. 눈동자다. 그 한 컷으로 그 날의 이슈를 아주 집약해서 정서적인 것까지 담아서 표현해 주는 것이 독자와 논리적인 것 외에 정서적인 것까지 같이 담을 수 있는, 엄청나게 중요한 기능을 한다. 그리고 또 사회가 어지러울수록 제대로 등대처럼 비춰주기도 하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워낙 아까처럼 쉽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시사만화가 하는 일이 어렵지만 제가 생각하는 건 뭐냐면,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논조라든가 사회를 비판하는 기능은 시사만화가 아니라도 합니다.
사설이나 또 다른 식으로도 많이 그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할 땐 무엇이 중요하냐 하면 일반인들에게 정서... 감정이라는 것, 이런 것들을 함께 담아낼 수 있는 그런 매체로서, 또 다른 경험을 하는. 때론 웃기고, 저는 유머센스라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설도 똑같이 사회비평을 하지만 사설 보고 웃진 않죠. 그런데 이것은 그림이 있고 비주얼이 있고 거기서 때론 웃기도 하고 그런 카타르시스. 그런 점이라면 시사만화의 균형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필요하고 오히려 지금 같은 경우에 어쩌면 더 그런 기능을 발휘해야 될... 이렇게 복잡하고 스트레스가 많을 때 시사만화 같은 것으로 시원하게 풀어주는...
박인규 : 말씀하시면서 시사만화가 그 신문의 눈이라고 하셨지만 옛날에는 그 날의 사회분위기를 한 컷의 시사만화로 느끼기도 했는데, 오히려 100년을 맞으면서 주목도가 떨어지는 것 같다, 상대적으로 침체한다고 하면. 시사만화를 그리시는 만화가 분들 중에서 시사만화의 부흥이랄까요? 그런 걸 위한 나름대로의 움직임이 있습니까?
박재동 :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후배 만화가들이 때로는 저를 부러워해요. 박 선배님 있을 땐 참 좋았다. 그때는 사회도.. 주목도도 높았고 사회 자체도 단순화 돼 있는 구도였거든요. 군사독재와, 전선이 뚜렷했고. 지금은 굉장히 혼재돼 있고, 그땐 매체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좋았던 시절이라고 부러워해요. 사실 그렇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어느 정도 잘 그려도 표가 나지 않으니까 힘든 시대죠. 그래서 후배들은 시사만화의 위기감을 좀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책을 강구하고 있고. 많이 세미나들도 하고 그럽니다. 시사만화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되는가. 시사만화가 정말 필요하지 않은 것인가. 그런데 그래도 지금 이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하다. 그러면서 그런 길로 어떤 생각이 드느냐면 지금 시사만화라는 양식은 굉장히 오래된 양식이에요. 네 컷, 한 컷이라는 것은 수십 년 됐고 100년이 넘었고 그런 양식입니다.
그런데 지금 변화한 환경은 전혀 다르거든요. 사람들의 시각적 체험은 굉장히 와이드하고 굉장히 다양하고 굉장히 컬러풀하고 굉장히 다릅니다. 그래서 이만한 크기의 그런 것들이나 이런 형식만을 고집해야 될 것이냐. 지금 생각하지 못했던 그런 뭔가도 있다. 아, 이런 어법, 이런 스타일이 있다. 예를 들어 신문이면 힘들지만 인터넷에서는 플래시로 약간 움직여 준다든지.. 아주 약간. 많이 하는 건 힘들어요. 하루에 하기 때문에 도저히 힘들지만 협력해서 한다든가. 또는 다른 스타일이 뭔가 있을 수 있어요. 어! 이거 신선한 스타일이다, 이런 게 있을 수 있고. 그림의 크기도 작으면... 지금은 신문의 지면이 많이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옛날엔 신문의 지면이 작았기 때문에 그만한 크기인데 늘어났으니 조금 더 크게 할 수도 있고. 그 다음 저 같은 경우는 조금 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유머센스가 조금 더 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비판기능도 있지만 재밌다, 웃기도 하고 이런 맛에 또 찾게 되는데, 그런 맛이 부족하면 이걸 봐도 힘들고 저걸 봐도 힘들고 그러면... 그렇게,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해서 왜 없다고 하지 않을 수도 혹시 있지 않겠냐.
박인규 : 시사만화 100주년이 그냥 과거 100년을 기념하는 것으로 끝날 게 아니라 시사만화의 새로운 변신, 도약을 위한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박재동 : 그렇게 돼야지요.
박인규 : 박재동 화백께서는 한겨레신문 창간하면서 88년부터 96년까지 만평을 그리셨고 상당히 많은 분들이 박재동 만평 보는 재미로 한겨레신문 본다는 말도 있었는데 왜 그만 두셨어요?
박재동 : 애니메이션이 너무 만들고 싶어서 그런 게 있고. 둘째는, 제가 시사만화를 그린 건 그 당시로서는, 그 당시 화가로서... 시사만화가가 돼야겠단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림쟁이로서, 그땐 민주화운동이 이슈, 화두였어요. 절체절명의 화두였기 때문에 거기 뭔가 보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제가 그 일을 했던 건데, 그때 1996년 문민정부 들어서고..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어쨌든 독재정권에서 민주화로 축이 넘어갔다고 판단됐어요. 이미 대세가 갔기 때문에 이젠 이렇게 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뭐 할 일은 어느 정도 했지 않느냐. 그 다음 세 번째는, 쉽게 말하면 밑천이 떨어져서. 아이디어라는 게 내 나름대로 새로운 생각들을 막 해서 독자들이 식상하지 않게 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나는 발전하지만 독자들의 감각도 따라오기 때문에 애써도 그게 잘... 새로운 것을 못 줍니다.
박인규 : 하긴 매일매일 그린다는 게 쉽지는 않다고 하더라구요.
박재동 : 예. 그래서 내가 뭐 할 만한 아이디어를 거의 다 써먹은 것 같아서, 거의 바닥이 난 것도 있었어요
박인규 : 시사만화를 그만 두신 가장 큰 이유가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어서라고 하셨는데 애니메이션 작업은 만족할 만큼 잘 돼 가고 있습니까?
박재동 :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더라고요. 한국에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또 제가 하는 테마가 제주도 4.3항쟁이라고... 대단히 참혹한 이야기기 때문에 그걸 국민들, 어린이들이 보게 하는 것 자체도 어려웠고. 또 경험도 없고, 그래서 자금을 모으는 일이나 또 시나리오를 즐길 수 있는 것을 쓰는 것 자체가 어려워서. 또 모아 놓은 멤버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 이런 것들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박인규 : 그동안 단편 애니메이션은 몇 번 발표하셨죠? 오돌또기..
박재동 : 네. TV에 박재동의 애니메이션 만평도 했고 단편 애니메이션도 했습니다.
박인규 : 그렇다면 제가 10년 전에 본 개인전이 오돌또기를 위한 밑그림 같은 걸 그리신 걸로 기억하는데 앞으로 내가 언제까지 만들겠다..
박재동 : 그 이야기를 옛날부터 해서 조심스러워요. 많은 분들에게 기대를 갖게 해놓고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지금은 제주도하고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기 때문에 말씀은 조심스러워요.
박인규 : 시사만화를 하시다가 애니메이션도 해보셨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은 뭐가 다른 겁니까? 어떤 느낌이랄까
박재동 : 시사만화는 개인적으로 혼자서 집중해서 할 수 있죠.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팀을 이뤄야 되고 공동작업입니다. 또 그건 하나의 사업이고요. 투자를 받아서 적어도 투자해 준 사람한테 본전은 찾게 해줘야지요. 그런 조금 다른 면이 있습니다.
박인규 : 앞으로 10년 안에는 나오겠지요
박재동 : 그럼요. 그건 나와야지요.
박인규 : 기대를 해보겠습니다. 박재동 화백이 사시던 이력을 보니 어렸을 때 집안에서 만화가게를 하셨다는데 맞습니까?
박재동 : 맞습니다.
박인규 : 저희 어렸을 때는 사실 만화가게 가면 공부의 적인 것처럼 돼가지고. 어떠셨어요?
박재동 : 지금도 저는 만화 이야기 나오면 그런 얘길 합니다. 만화가 책인가 아닌가, 만화가 독서의 적이냐, 공부의 적인가.
박인규 : 저희 때만 해도 적이라고들 했죠.
박재동 : 그런데 옛날에는 소설도 적이었어요. 옛날에 소설책을 학교에서 가방에 넣고 다니면 선생님들이 다 빼앗았어요. 영화관 가는 건 물론 나쁜 일이었고.
박인규 : 다 오락으로 치는 거죠. 쓸 데 없는 거 한다고
박재동 : 예. 공부에 방해되는 것. 그런데 요즘은 소설도 많이 읽히거든요. 왜냐면 소설이 시험에 나오거든요. 논술 같은 데. 시험에 나오면 다 장려하고 나오지 않는 것은 안 좋은 걸로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사실 만화를 많이 보는 사람이 공부도 잘 한다는 보고도 있고요. 왜냐면 같은 책이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는 만화도 안 보고 교과서도 안 보는 경우가 있죠. 옛날엔 그런 것들이 굉장히 심했습니다. 우리 만화가게에 학부모들이 와서 만화책을 찢어버리고... 애들 버린다고 그러고. 참 그때 만화라는 건, 정말 지금의 사랑합니다라는 말도 쓸 수 없는 순진한 것이었는데. 그런 사회적 인식이 그렇죠. 학교공부와 관계가 없다. 이런 본질이 그런 것 같아요.
박인규 : 지금 예술종합학교에서 애니메이션학과 교수를 하고 계신데 우리나라에 만화학과, 애니메이션 학과, 이런 만화 관련학과가 굉장히 많다던데요
박재동 : 굉장히 많죠. 세계에서 가장 많습니다. 150개 정도... 만화, 애니메이션 관련학과가 굉장히 많죠.
박인규 : 그런데 저희가 최근에 만화가 강철수씨를 모셨는데 그분이 만화학과는 굉장히 많은데 만화를 배우고 나서 사회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풍토가 아니다. 한국에서 만화 그리면 밥 굶는다. 이렇게 또 말씀하시더라구요. 어떻게 보고 계세요?
박재동 : 참 가슴 아픈 일이죠. 왜냐하면 지금 만화지망생은 굉장히 많은데 그 사람들을 담을 그릇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잡지도 지금 굉장히 시들해지고, 신문이 막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도 하지만 인터넷도 좀 유명한 작가 외에는 상당히 열악한 환경입니다. 그래서 만화가로서 자기 작품을 해서 살 수 있는 작가는 굉장히 드물고 힘든 게 사실이죠. 또 옛날에 청소년보호법이나 이런 걸 만들어서 만화가 굉장히 위축되기도 하고.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박인규 : 그런 재능과 꿈 있는 만화학도들을 키우기 위한 방안은 없을까요?
박재동 : 그런 것은... 교육기관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많습니다. 굉장히 많은데 다만 나와서... 그러나 어떻게 보면, 다른 면으로 보면 미술대학 나와서 그림 그려서 먹고 사는 사람 얼마 안 됩니다. 음악을 해서 음악, 역사학과 나와서 역사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문학 해서 책 써가지고...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런데 워낙 배출이 많이 되고 그걸 담을 그릇이 없는 게 사실이죠.
박인규 : 시사만화 100주년 기념사업 말고 박재동 화백 개인적 차원에서 하시고 계신 일이나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간단히 말씀해 주시죠.
박재동 : 지금은 학생들과 같이 공부하고 있고 그 다음에는 아무래도 애니메이션이죠. 한 10년의 숙원사업을 지금 또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걸 제대로 만들어서 이것부터 해야 되겠다. 그게 꿈입니다.
박인규 : 우선 100주년 기념사업 잘 되시길 바라고요. 무엇보다 오돌또기...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볼 수 있도록, 기다려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재동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한국시사만화 10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박재동 공동위원장과 함께했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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