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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주요언론, 5대 미디어 그룹에 장악됐다"

[존 필저의 언론비평ㆍ①]프로페셔널 저널리즘의 추악한 실상

다음은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제작자이자 탐사보도 기자인 존 필저가 지난 6월 '2007년도 사회주의 회의'에서 가진 연설 '다음 시대의 자유: 필름메이커 & 저널리스트 존 필저가 말하는 선전, 언론, 검열, 그리고 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Freedom Next Time: Filmmaker & Journalist John Pilger on Propaganda, the Press, Censorship and Resisting the American Empire)이다. 원문은 지난 8일 녹취록을 게시한 DemocrcyNow.com에서 볼 수 있다.

존 필저는 이 연설에서 오늘날 세계적인 주요 언론들이 '프로페셔널 저널리즘'을 표방하며 어떻게 언론을 가장한 거짓말과 선전을 늘어놓는지 고발했다.

필저에 따르면 세계 주요언론들은 현재 5개 미디어 그룹에 의해 장악된 '기업형 언론'들이며, 이런 '기업형 언론'은 영국의 BBC가 창립된 직후인 1920년대 주로 미국에서 태동했다.

프로페셔널 저널리즘은 대형 광고주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체제순응적이며, 체제가 설정한 목표의 옹호자로서 '불편부당' '객관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왜곡된 보도를 일삼는다. 이들은 주로 정부와 제도권 기관 등 관급 취재원에 의존한다는 것이 특징인데, 독립언론은 극히 예외적인 사례로 존재할 뿐이다.

필저는 원칙적, 객관적, 중립적인 보도를 자랑하는 영국의 BBC조차 제도권이 위협받을 때마다 이러한 원칙을 폐기한다는 원칙에 충실할 뿐이라고 지적하며, 창립자 존 리스가 정권과 어떠한 협력 관계를 맺었는지 폭로하기도 했다.

분량 관계상 연설을 두 번에 나눠 먼저 전반부를 게재한다. <편집자>

▲ 최근 월스트리트저널 인수에 성공해 미디어황제의 위력을 발휘한 루퍼트 머독. ⓒ로이터

이 연설의 제목은 <다음 시대의 자유(Freedom Next Time)>인데, 내가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저널리즘으로 종종 위장된 선전의 실체를 폭로하기 위해 쓴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나는 언론, 언론이 전하는 전쟁, 선전, 침묵, 그리고 침묵이 어떻게 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이다.

PR의 창시자로 불리는 에드워드 버네이즈는 미국의 진정한 지배자인 눈에 보이지 않는 정부에 대해 썼다. 그것은 기업형 언론이 등장한 80년 전쯤 이후의 언론, 미디어이다.

기업 광고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이런 역사에 대해 말하거나 아는 언론인들은 별로 없다. 새로운 기업들이 언론을 접수하기 시작하면서 소위 '프로페셔널 저널리즘'이 등장했다 기업형 언론은 대형 광고주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체제순응적이고, 체제의 목표의 옹호자로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이 잡혀 있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프로페셔널 저널리스트들은 자유주의적 중립성이라는 신화로 덧칠해지게 되었다.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는 새로운 언론과 대기업들과 연결되었는데, 로버트 맥체스니가 잘 표현한 대로 '완전한 사기' 집단이 탄생한 것이다.

대중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프로페셔널한 언론이 되기 위해서 언론인들은 뉴스와 의견이 관급 취재원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는 것이며, 이런 사실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무 날짜의 <뉴욕타임스>를 한번 훑어보라. 국내외 주요 정치 기사의 취재원을 살펴보면 정부와 여러 제도권 기관들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프로페셔널 저널리즘'의 본질이다. 독립언론은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명예로운 예외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이라크 침공을 획책했을 때, 주디스 밀러 기자가 뉴욕타임스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상기해보라.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을 엄청나게 과장한) 그녀의 기사들은 나중에 그 실상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그래서 스캔들이 되었지만, 거짓말에 기반한 침략을 부추기는 데 강력한 역할을 한 뒤였다. 밀러처럼 관급 취재원과 제도권 기관들의 앵무새가 된 사례는 유명한 뉴욕타임스 기자들의 기사라고 별로 다르지 않다.

저명한 W.H 로렌스 기자는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실제 위력을 은폐하는 데 기여했다. "히로시마의 폐허에서 아무런 방사능도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가 쓴 기사의 제목이었으며, 그 기사는 사실과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정부의 힘이 어떻게 커져 왔는지 살펴보자. 1983년 당시 세계적인 주요 언론들은 50개 기업에 의해 소유되었으며, 이 기업들은 대부분 미국 국적이었다. 2002년 당시 이들 언론들을 소유한 기업은 불과 9개 기업으로 더욱 줄어들었다. 현재는 아마 5개 기업 정도로 더 줄어들었을 것이다.

루퍼트 머독은 앞으로 3대 글로벌 미디어그룹이 등장할 것이며, 그의 기업이 그 중에 하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이러한 힘의 집중은 미국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BBC는 미국 시장으로 진출할 계획을 발표하면서, 미국인들은 BBC가 자랑하는 원칙적, 객관적, 중립적인 보도를 원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BBC 아메리카가 설립되었다는 광고를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BBC 창업주와 정권의 은밀한 거래

BBC는 미국에서 기업형 언론이 등장하기 직전인 1922년 출범했다. 창립자 존 리스 경은 불편부당과 객관성을 프로페셔널 저널리즘의 정수라고 믿었다.

그런데 BBC가 창립된 바로 그 해에 영국의 제도권이 공격을 받았다. 노조가 파업을 선언하자 당시 집권 보수당은 혁명이 일어날까봐 전전긍긍했다. BBC가 그들을 구하러 나섰다. 리스 경은 당시 스탠리 볼드윈 총리에게 은밀하게 반노조 연설문들을 써주고 이를 전국에 방송해주면서, 노조 지도자들의 입장 표명은 파업이 종료될 때까지 방송에 내보내기를 거부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관례가 구축됐다. 불편부당이라는 원칙은 제도권이 위협받을 때마다 중단되는 원칙이라는 점이다. 이 원칙은 이후 지속되고 있다.

이라크 침공 사례를 들어보자. BBC의 보도를 조사한 두 종류의 연구가 있는데, 하나는 BBC가 전쟁을 반대하는 의견 보도에는 2%만 할애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ABC, NBC, CBS보다도 더 적은 수치다. 또 하나의 연구는 웨일즈대학이 한 것인데, 이라크 침공을 앞두고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BBC 보도 중 90%는 사담 후세인이 실제로 이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부시와 블레어의 판단은 옳다는 취지였다. 지금은 우리가 BBC와 다른 영국 언론들이 영국의 비밀정보기관 MI-6에 의해 이용됐다는 것을 알고 있다.

MI-6 요원들은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이야기들을 흘려보냈는데,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꾸며낸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하는 요점은 그게 아니다. MI-6가 그렇게 나설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프로페셔널 저널리즘 자체가 어차피 같은 기사를 생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BBC 워싱턴 지국의 맷 프라이 기자는 이라크 침공 직후 전세계 시청자들을 상대로 "선과 미국적 가치를 전세계, 특히 중동에 전해주기 위한 열망이 특히 미국의 군사력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2005년 이라크 전쟁 기획자 폴 울포위츠를 "민주주의의 힘과 민중의 발전에 대한 열렬한 신념의 소유자"라고 치켜세웠다.
▲ 비디오 화면으로 이라크 전쟁 상황을 브리핑받고 있는 종군기자들.ⓒ로이터

이런 사례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다. BBC 뉴스는 이라크 침공을 그저 오판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이 불법적이라거나, 도발된 것이 아니라거나, 거짓말에 기반한 것이라는 비판은 외면하고 있다.

'실수' '실책' 은 '실패'와 함께 BBC 보도에서 흔히 쓰이는 어휘다. 특히 '실패'라는 어휘는 방어할 힘도 없는 이라크에 대해 의도되고, 계산되고, 도발되지도 않은 불법적인 공격이 성공했다면, 적어도 그 자체로는 괜찮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단어들을 들을 때마다 에드워드 허먼의 뛰어난 글이 생각난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수 있는 일로 만들어버리는 과정에 대한 그의 글을 보면, 언론의 상투적인 어휘들이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있으며, 그런 의도로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과정은 내가 목격해온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비참한 전쟁의 참상, 잘려나간 팔과 다리들, 불구가 된 어린이들의 모습을 별 것 아닌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한다.

"똑같은 의견 보도가 나오게 하는 비결이 뭐요?"

냉전 당시 미국을 방문한 러시아의 언론인들이 보인 반응은 내가 즐겨 인용하는 사례인데, 러시아 언론인들이 방문 마지막 날 주최측으로부터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해 러시아 일행의 대변인은 "모든 신문과 TV가 날마다 쏟아내는 보도를 보니, 중요한 현안에 대해 똑같은 의견을 전달하는 데 충격을 받았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언론인들을 수용소로 보내야 하고, 심지어 손톱을 뽑아버리는 고문도 해야 한다"면서 "미국에서는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없는 비결이 궁금하다"고 말했다.

비결이 무엇이냐고? 편집국이나 언론학과, 언론비평지 등에서도 거의 제기되지 않는 질문이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수많은 대중의 삶에 중대한 의미가 있다.

지난해 8월 24일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우리가 지금 이라크 침공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당시에 알았다면, 여론에 의해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그 답을 시사했다.

이런 놀라운 언급은 언론인들이 그들의 역할을 하지 않고, 부시와 그의 일당이 하는 거짓말에 대해 도전하고 폭로하는 대신 그런 거짓말을 받아들이고 증폭시킴으로써 대중을 배반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소위 자유사회에서 검열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게 된 것은 전체주의 사회에 대해 취재를 하면서부터였다. 1970년대 나는 당시 스탈린주의 독재 치하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다큐멘터리를 비밀리에 제작하는 동안, 소설가 제네르 우르바네크가 인터뷰에서 나에게 들려 준 이야기가 있다.

그는 "독재 치하에서 우리가 서방세계의 당신들보다 한 가지 면에서는 더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되는 것은 선전과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선전의 이면, 보도의 행간을 읽도록 배웠다. 우리는 진실은 언제나 전복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이 당신들과 다르다"라고 말했다.

반다나 시바는 이러한 지식을 '정복당한 지식'(subjugated knowledge)이라고 부른다. 클로드 콕번은 "공식적으로 부인되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믿지 말라"고 말했다.

전쟁과 관련한 오래된 경구 중에 '진실이 가장 먼저 희생된다"는 말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저널리즘이 가장 먼저 희생된다. 베트남 전쟁이 끝났을 때 잡지 <인카운터>에는 베트남전을 취재한 저명한 로버트 엘레간트의 글이 실렸다. 그는 "근대사에서 처음으로 전쟁의 승패가 전장이 아니라 인쇄물과 특히 TV 화면에서 결정되었다"고 썼다.

그는 언론인들이 베트남전에 대해 반대하는 기사를 썼기 때문에 패전했다고 주장했다. 로버트 엘레간트의 견해는 미국 정부가 지금까지 채택하고 있는 지혜가 되었다. 이라크에서 미 국방부가 종군기자 시스템을 고안한 것도 비판적인 보도가 베트남 패전의 원인이 됐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다. 젊은 기자로 사이공에서 취재 첫 날을 보낼 때 내가 들렀던 주요 신문과 방송국 사무실에는 끔찍한 사진들이 널려 있는 게시판들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이 잘려나간 신체부위를 들고 있는 베트남과 미군 병사들의 사진이었다. 어느 사무실에서는 고문받고 있는 사람의 사진이 있었다. 이런 사진들은 신문이나 전파를 탄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대중들이 결코 그런 장면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나도 그런 표면적인 논리를 받아들였다. 나 역시 독일과 일본에 대한 정의로운 전쟁 이야기를 듣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남에 오래 머물수록 우리의 잔인함은 일시적이거나 이례적인 것이 아니라 전쟁 자체가 잔인한 것임을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다.

물론 군사 전술이나 효율성에 대해 일부 유능한 기자들에 의해 의문이 제기되기는 했다. 하지만 '침략'이라는 단어는 사용된 적이 없다. '개입되었다'(involved)는 중립적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전에 개입되었다는 식이다.

649명의 기자 중 아무도 보도하지 않았던 '미라이 학살'

전복적인 진실은 다니엘 엘스버그와 '미라이 대학살'을 특종보도한 시모어 허시 등에 의해 폭로될 때까지 좋은 의도를 가진 강대국이 여러 가지 실수를 저지르며 아시아의 늪에 빠져있다는 허구는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미라이 학살이 일어났던 1968년 3월16일 당시 649명의 기자들이 베트남에 있었으나, 단 한 사람도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다.

베트남과 이라크에서 고의적인 정책과 전략은 집단학살에 가까운 것이다. 베트남에서는 수백만 명의 주민을 강제로 쫓아내고 자유사격지대로 만들었다. 이라크에서는 미국은 1990년대 내내 무역봉쇄조치를 내리는 바람에 유엔아동기금에 따르면 5세 이하 어린이 50만 명이 죽었다.

베트남과 이라크에서 금지된 무기들이 고의적인 실험을 위해 민간인들에게 사용되었다. 고엽제 살포는 베트남의 생태환경적 질서를 변화시켰다. 이 작전명이 '저승 작전'이라는 것을 안 미 의회는 나중에 'Ranch Hand 작전'이라는 보다 부드러운 이름으로 바꾸었을 뿐,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미 의회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취한 조치도 똑같다. 민주당은 이라크 전쟁을 비난하면서 이름을 바꾸면서 연장해 주었다. 베트남전 이후의 할리우드 영화들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언론의 확장판이었다.

일부 영화들은 군사작전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침략자들의 고뇌만 집중적으로 조명할 뿐이었다. 지금은 고전으로 취급되는 이런 유형의 첫 영화가 <디어헌터>이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미국이 험난한 고생을 했으며, 미국의 젊은이들은 동양의 야만인들에 대항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매우 잘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메시지는 더욱 사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극장에서 구경하다가 소리를 치며 항의하게 만든 유일한 영화이기도 하다.

올리버 스톤의 걸작이라는 <플래툰>이 반전 영화라고 알려지고, 이 영화에서 베트남 사람들을 인간으로 보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이 영화 역시 미국인 침략자들을 피해자로 그리기에 바빴다.

<그린베레>에 대해서는 당초 언급할 생각이 없었는데, 존 웨인이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배우로 뽑혔다는 기사를 보고 말았다. 존 웨인이 출연한 <그린베레>는 내가 베트남에서 막 돌아온 1968년 어느 토요일에 보게 되었는데. 그 영화를 보고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크게 웃기를 반복하다가 주변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같이 영화를 보던 남부 '프리덤 라이더' 회원 출신인 동료는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여기서 빨리 도망치자 "고 말했다.

숙소인 호텔로 돌아오는 내내 쫓김을 당했지만, 우리를 쫓아온 사람들이 그들의 영웅으로 생각하는 존 웨인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참전을 하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웨인이 연기한 허구적인 역할 모델은 조지 W. 부시와 딕 체니 같은 유명인사들을 제외한 수많은 미국인들을 베트남의 사지로 밀어넣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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