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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외한이 세 번 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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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문외한이 세 번 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이봉수의 미디어 동서횡단] 프로와 아마추어를 비교해보는 재미

'뮤지컬' 하면 기억나는 게 <미스 사이공>을 보며 내내 졸다가 헬기 소리와 비행폭풍에 놀라 깨어났던 일이다. 실제보다 좀 작게 만들긴 했지만 헬기가 열대림을 뒤흔들며 난데없이 실내무대에 착륙하는 모습은 관객들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20여 년 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여행비를 뭉텅 떼내 들어간 본바닥 뮤지컬이었는데, 끄트머리만 보았으니 지금 생각해도 돈이 아깝다.

걸작을 보면서도 시차를 이기지 못하고 졸았던 것은 겉멋에 뮤지컬을 보러 들어갔기 때문이리라. 근래 영국에서 6년간 유학할 때는 런던 '웨스트엔드'를 지척에 두고도 딱 한번 <맘마미아>를 본 게 고작이다. 그것도 여행 온 친구부부 등쌀에 밀려서.
▲ 서울뮤지컬(왼쪽)과 세명대의 주연 배우들은 원숙미와 청순함이 각각 돋보인다.ⓒ 서울뮤지컬, 세명대 김유민.

그런 수준의 필자가 올 여름 감동의 뮤지컬 무대를 세 번 보았다. 그것도 모두 같은 레퍼토리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였다. 뮤지컬 매니아들 중에는 같은 뮤지컬을 공연기간 초·중·후반에 세 번 보는 이가 있다고 한다. 설익었기에 더욱 신선한 초반 무대와 원숙한 경지에 오른 중반 무대, 그리고 애드리브와 기교가 넘치는 후반 무대가 제각기 맛이 다르기 때문이란다.

나는 그런 수준의 관객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올 여름 처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본 것은 내가 세명대에 개설한 교양과목 <미디어와 한국사회>를 듣는 방송연예학과 학생의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명대 방송연예학과의 6월 29일 서울 공연을 보았는데, 다음날 자녀들을 데리고 다시 공연장을 찾을 정도로 기대 이상이었다.

역시 프로……배우들의 카리스마와 장엄한 무대장치

'근데 이건 뭘 모르는 문외한의 값싼 감동이 아닐까?' 그런 의구심을 풀 겸 해서 지난 4일 다시 찾아간 무대가 '서울뮤지컬'(대표 김용현)의 충무아트홀 공연이었다. 과연 프로는 달랐다. 일사불란한 댄스와 가창력, 화려한 무대가 대학 뮤지컬과는 차원이 달라 보였다.

무엇보다 마리아 역 쏘냐와 토니 역 장현덕의 맑은 음색은 뮤지컬의 생명인 대사전달에 전혀 무리가 없었다. 실은 공연을 보러 가기 전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의 평가들을 훑어 보았는데, 오디션으로 새로 뽑은 장현덕의 연기가 좀 미숙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러나 공연 막바지(11일까지)여서 그런지 연기에도 어색함이 없었고 뛰어난 뮤지컬 배우를 발굴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희롱을 비롯해 '산전수전'을 다 겪는 아니타, 라이벌 조폭의 두목들인 베르나르도와 리프는 그 배역만큼이나 꿀리지 않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한 조직원의 죽음으로 돌연 '차카게 살자'고 마음먹는 조폭들의 개과천선이 리얼리티가 떨어지긴 했어도……(원작이 그런 걸 어쩌랴).

무엇보다도 나를 압도한 것은 수 억원은 들였음직한 무대장치였다. 스테인리스 파이프로 50년대 뉴욕 뒷골목의 아파트들을 연출한 것은 좀 거슬렸지만, 무대천정에 닿을 정도로 높게 아파트 6개동을 건설한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가볍기 때문에 아파트들이 무대 앞뒤로 전진-후퇴하는 모습은 원근 설정이 자유로운 영화 장면들을 보는 듯했다. 아리아를 부를 때 6개 동의 아파트들이 무대 중앙으로 몰려나와 주인공을 클로즈업 시키는 수법은 기발했다.
▲ 서울뮤지컬의 공연 장면.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아파트 6개동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뉴욕 뒷골목의 밤 풍경들을 실감나게 연출했다. ⓒ 서울뮤지컬

'옥의 티'조차 신선해 보이는 학생 무대

반면 세명대의 첫날 공연은 사실 보러 가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3학년까지밖에 없는 신설학과가 대작을 소화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게 기우였다. 오히려 처음 하는 사람들만이 내뿜을 수 있는 신선함과 열정을 관객들에게 선사했다. 서너 달밖에 안된 짧은 준비기간이 학생들과 지도교수들에게는 얼마나 길고 고통스런 연습시간이었을까?

뮤지컬은 연기·노래·춤 실력을 함께 갖춘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해야 하는 데다 음향 등 많은 장비와 경험의 축적이 필요하다. 그 점에서 학생들의 도전정신이 돋보였다. 물론 분야별로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지도교수들(현경석, 김성택, 롤라 장, 정은미 등)이 명예를 걸고 몰아붙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몇몇 주연급 학생들의 가창력은 '오디션을 거쳐 어디서 뽑아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앳된 모습 자체가 마리아와 토니의 애닲은 사랑을 표현하는 데 제격이었다. 고음에서는 쇳소리가 좀 섞여 나오는 학생도 있었으나, 아마 '살인적인' 연습과 거듭된 공연에 목이 지친 탓이리라.

영화로 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명 장면들과 비교되긴 했지만, 그거야 할리우드의 대자본이 수없이 'NG'를 내가면서 만든 것일 터. 쭉쭉 뻗은 다리는 아닐지라도, 군무에서 엇박자로 나간 댄서가 있을지라도, 별 문제가 안됐다. 막간의 어둠 속에서 무대를 바꿀 때 무대담당자가 걸려 넘어지는 소리가 나도, 조명이 일찍 들어와 무대담당자가 황급히 뛰어들어갈 때도 관객들은 그저 즐거웠다. 학생들의 '라이브 무대'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기에.

주인공 토니를 저격했는데 총소리는 나지 않고 격발음만 '틱틱' 날 때도 옆자리 관객의 나직한 반응은 "아! 어떡해." 같이 걱정하고 함께 어우러진 공연이었다. 나도 애가 타서 속으로 외쳤다. '토니, 그럴 땐 쓰러져주지. 무성권총도 있잖아.' 기성무대에선 야유가 터져나올 법한 실수까지도 학생무대에선 오히려 관객의 성원을 이끌어낸다.

나중에 학생들한테 들은 얘기지만, 지도교수들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대사와 노래와 춤을 익히고, 직접 무대와 소도구, 의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경비는 5백만원. '서울 뮤지컬'의 수십억원에 견주면 돈도 아니다. 그래도 '해냈다'는 성취감! 마지막 '커튼 콜'에 등장한 학생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 세명대 학생들이 나무로 직접 만들어 벽돌을 그려 넣은 아파트를 배경으로 신명 나게 춤을 추고 있다. ⓒ 세명대 김유민

뮤지컬 붐 타고 세계의 '견본시장'으로

뮤지컬은 지금 예술뿐 아니라 산업으로서도 급성장하고 있다. 한국뮤지컬협회에 알아보았더니 지난해 서울에서 공연된 뮤지컬만도 111편이었으며, 그 중 71편이 창작뮤지컬이었다고 한다. 관객수 4백만명에 2천억원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삼성경제연구소가 내놓은 한 보고서의 이름이 <신감성상품, 뮤지컬산업이 뜬다>였다. 이 보고서는 2008년의 뮤지컬 시장규모가 3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뮤지컬은 '원 소스, 멀티유즈'(One Source, Multi-Use)에 적합한 예술이어서 대중음악·영화·드라마처럼 이미 '한류'의 힘을 확인한 분야와 결합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전망이 밝다. <왕의 남자> <대장금> 등은 이미 그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 영미뿐 아니라 세계각국 뮤지컬들이 한국 무대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올 여름 서울 거리의 육교와 버스정류장 간판들은 <캣츠> <댄싱섀도우> <대장금> 등 온통 뮤지컬 광고들로 뒤덮였다. 서울이 런던 뉴욕에 이어 세계 뮤지컬의 견본시장이 될 가능성까지 엿보인다. 그만큼 자본과 인재가 몰려들고, 두터운 매니아층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인종 사회로 진입하는 '우리들의 얘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1957년 9월 26일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지 딱 50주년이 됐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적으로 각색해, 이민자들간 갈등 속에 핀 비극적 사랑을 줄거리로 한다. 이 뮤지컬이 오늘날 우리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우리도 다인종·다문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공연은 50년 묵은 '고전'을 리바이벌한 것이 아니라 시의적절한 기획이었다. 국내 거주 외국인이 1백만명, 해외 거주 동포가 6백만명에 이른다. 지난해 국제결혼만도 3만9천건으로 8쌍 중 1쌍이 외국인과 결혼했다. 특히 아시아 여성과의 국제결혼으로 태어나는 아이들(Kosian)이 많아 3~4년 뒤에는 농어촌 초등학생의 1/4을 차지할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들 여성의 30%가 차별과 멸시를 받은 적이 있고, 18%가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 조사결과는 고발한다. 이혼으로 끝난 경우도 지난해 6,100건에 이른다.

이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서쪽 얘기'가 아니라 '동쪽 얘기' 즉 '우리 얘기'이다. 국내 이주노동자뿐 아니라 해외에서 우리 동포가 겪는 얘기이기도 하다. 푸에르토리칸 남녀가 군무를 추면서 주고받는 노래는 우리 동포의 노래이다.

"미국에 사는 게 좋아." "원하는 모든 게 다 있어."
"돈 벌어 아파트 살 거야." "돈이 한 푼도 없잖아."
"자유와 평화가 있지요." "겉으로 보기엔 그래."
"공해가 많은 아메리카." "그래도 좋은 아메리카."
"돈 벌면 고향에 갈 거야." "꿈도 참 야무져."


'기회의 땅'으로 간 우리 동포들. 그러나 더 이상 '기회의 땅'이 되지 못하는 미국.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세탁소와 야채가게도 이젠 멕시칸과 남아시안들에게 밀린다.

이원종 연출자도 마지막 장면이 가장 걸리는 문제였다고 한다. "원작은 세상에 절규하는 마리아에게 종교적 색채를 부여해 성스럽게 그리고 있다. 난 종교적 분위기를 없애고, 인간 마리아의 사랑이 현실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달라지게 했다고 보았다. 미움으로 점철된 비정한 사회가 그녀의 사랑을 앗아갔지만…… 그 깨달음이 미움으로 차갑게 얼어붙은 이들의 마음을 녹이게 되리라는 희망을 우리 함께 느꼈으면 한다."

"우리 모두가 토니를 죽였다. 나는 모두를 죽일 수 있어. 나를 위해 한 발을 남겨놓고 말이야." 총을 겨누어 든 마리아의 절규는 어쩌면 조승희의 절규였는지도 모른다.
▲ 애인 토니의 시신(왼쪽 아래)을 뒤로 한 채 마리아가 "우리 모두가 토니를 죽였다"고 절규한다. ⓒ 김유민

버지니아 공대의 조승희 추모석에는 이런 글귀들이 남겨져 있었다. "네가 그렇게도 절실히 필요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슬펐단다." "조승희 부모에게도 사랑을 전한다."

우리는 오랜 기간 '단일민족'이라는 환상 속에 갇혀 있었다. 그 때문에 인종 문제에 대한 특별한 의식 없이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끼리 살아왔기에 인종에 대한 편견이 오히려 클 수도 있다. 말과 피부색에 상관없이 한 데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 관용적인 사회로 나가는 길은 역시 '사랑'을 토대로 건설될 수밖에 없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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